392화 : 심연으로 몸을 던지다
은혁은 히죽 웃었다.
“꼭 가야겠습니다. 그리고 한 번만 더 내 앞을 막으면 그냥 죽이겠습니다.”
-이, 이 흉포한 노옴……!
엥글러는 트롤의 신답게 금방 흉포해지려 했다.
하지만 은혁이 노려보자 멈칫했다.
“좋게 말할 때 떠나십쇼.”
-크웃, 크우우욱……!
엥글러는 주춤거렸다.
이곳은 그의 차원이고, 현재 본체인 상태.
성좌의 본체가 자기 차원에서 플레이어와의 기 싸움에서 밀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스윽.
은혁은 프로스트 스파이럴을 들어 올렸다.
“트롤의 신 아니랄까 봐 감정 기복이 심하시군요. 정말로 다시 덤벼야겠습니까?”
-쿠오오옥!!
엥글러는 주먹으로 은혁을 내리치려 했다.
하지만.
“[스파이럴].”
퍼억!!
엥글러의 주먹이 자신의 턱을 올려쳤다.
-크와악?!
은혁은 엥글러의 주먹이 날아오는 공간 그 자체를 왜곡시켜서, 엥글러가 스스로를 때리도록 만들었다.
쿠쿵!
엥글러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성좌의 본체가 날린 주먹이다 보니, 얄궂게도 성좌에게 매우 깊은 피해를 줬다.
-쿠르륵? 어억?
엥글러의 주먹은 턱 밑에 박혀 있었다.
압도적인 재생력 때문에, 턱을 부순 주먹을, 회복된 뼈가 꽉 붙들어 버린 상태.
엥글러가 상황 파악을 하고 손을 빼려는 순간, 이미 은혁은 세븐칼리버를 제5형태로 전환했다.
철컹!
“칼라미티 해머.”
그리고 엥글러의 팔꿈치를 올려쳤다.
빠카칵!!
엥글러의 팔꿈치가 박살 나고, 이미 엥글러의 턱에 박힌 주먹은 더욱 깊이 박혔다.
쿠구궁……!
공중에 잠깐 떴던 엥글러는 바닥에 완전히 쓰러졌다.
강대한 성좌였지만, 엥글러는 0.5층의 지배자로 군림했을 뿐이기에 진지한 전투 경험은 일천했다.
다 학살하고 잡아먹어 왔을 뿐.
지금이라면, 은혁이 전력의 50%만 써도 엥글러를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내게 도움을 준 성좌죠.”
엥글러가 없었다면 칼라미티 해머를 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죽이지 않겠습니다. 떠나십쇼.”
-크루르륵……!
엥글러는 허둥지둥 어디론가 가버렸다.
은혁은 [질주]를 발동해서 빠르게 달려갔다.
파바바박……!
달려가는 와중에도 이따금 섬광이 번쩍거렸다.
-경고! 특수 매립지에는 접근하면 안 됩니다!
밑도 끝도 없는 경고였다.
보통 왜 안 되는지 이유가 붙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는 그런 것도 없었다.
‘수상쩍네.’
은혁은 시스템 메시지를 무시하고 더 다가갔다.
그 순간.
“더 가까이 오지 마시오.”
한 청년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년은 5km 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다.
“목소리가 무척 크시군요.”
은혁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평소 목소리였지만 5km 밖의 청년은 알아들었다.
“나는 이 땅의 모든 소리를 듣고, 모든 소리를 꺼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SS급 직업 공기의 성좌를 섬기는 대사제, 데니얼이기 때문이지요?”
은혁은 교황제를 직접 만나고 부하로 만들었기에, 교황제의 부하들에 대한 정보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역시 날 아는군. 당신이 식탐의 성좌, 엥글러와 대화하는 걸 들었소.”
“멀리서 대화하려니 영 불편하군요.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은데,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제가 그쪽으로 가도 되고.”
“안 됩니다. 저는 이곳을 지키기로 관리국과 계약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가로 저는 스스로를 안전히 봉인할 수 있게 되었죠.”
“뭘 지키는 겁니까?”
“당신은 다 알고서 온 것 같군요.”
그 말에 은혁은 히죽 웃었다.
“이곳이 0.5층으로, 1층보다 낮은 곳이죠? 그렇다면, 흐음…… 0.5층보다 더 낮은 곳으로 향하는 통로가 여기 어딘가에 있겠지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해야 할 겁니다.”
“무슨 권리로?”
“교황제를 부하로 부리는 자의 권리로.”
은혁은 그렇게 말하며 교황제가 준 증표를 꺼내 들었다.
교황제의 지장이 찍힌 증명서였다.
“이거 보입니까?”
“보일 리가 없죠. 모습도 겨우 보입니다.”
아무리 탁 트인 평야라고 해도, 5km나 떨어져 있어서 잘 보이진 않았다.
‘소리는 잘 통하는데, 정작 보이진 않는다니.’
은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직접 와서 보시거나, 제가 가서 보여드리죠.”
“둘 다 거절합니다. 당신이 이곳에 존재하는 것, 그리고 교황제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비범한 자가 아니란 건 압니다. 하지만 더 가까이 오진 마십시오. 마지막 경고입니다.”
“이미 왔는데.”
“헉?!”
은혁은 이미 데니얼의 코앞에 서 있었다.
그 직후.
콰콰콰콰콰쾅!!!
은혁이 원래 있던 지점에서 한 박자 늦게 대폭발이 일어났다.
“뭐, 뭘 어떻게……!”
“퓨전 스킬 [차원폭발추진권]…… 이라고 해야 할까요? 스킬명이 영 이상한데.”
우선, 옆으로 선 뒤, 왼쪽 팔은 뒤로 하고 오른쪽 팔을 앞으로 뻗는다.
왼손으로 [플레임 인플레이션]을 발동하여, 공간을 확장시키고 터뜨리는 초화염 공간곡률추진을 발동한다.
반대로 오른손으로 [광풍돌진권]을 써서, 정면으로 고속 돌진한다.
이 두 가지 힘을 합쳐서 쓰는 것이 [차원폭발추진권].
‘원래는 60층~69층 구간에서 3군주를 상대로 도망칠 때 쓰려고 구상한 스킬이지만, 죽은 척 전략을 쓰기로 한 데다가, 그때는 레벨이 낮아서 쓸 자신이 없었지.’
빙천대제를 상대할 때 쓴 공격용 융합 스킬인 [플레임 인플레이션]과, 자신 있는 무투가 스킬인 [광풍돌진권]을 동시에 융합하는 스킬이기에 난이도가 높았다.
“으음……!”
데니얼 또한 눈앞의 존재가 교황제를 까마득한 높이에서 내려다볼 정도로 강한 존재임을 깨닫고 침음성을 냈다.
“이거나 받으시죠.”
은혁은 데니얼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블러드 데이터 칩을 만들고, 데니얼의 이마에 꽂아 버렸다.
파앗!
“아, 아아아……!”
교황제가 100층탑을 탈출했다는 것.
그리고 눈앞의 은혁이 100층탑을 나가서 그 교황제를 복속시키고 다시 들어왔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아아……!”
“협조 좀 해주시죠.”
“아, 알겠습니다.”
“아니, 그냥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은혁은 [사이코메트리]로 데니얼로부터 정보를 싹 다 뽑아냈다.
“흠…… 과연. 오랫동안 힘들게 사셨군요.”
교황제의 명령대로 스스로를 봉인하기 위한 방도를 찾다가, 관리국과 계약하여 일반 플레이어는 절대 올 수 없는 이곳에 왔다.
‘여기에 도달한 것은 데니얼을 포함해 나까지 두 명뿐이지.’
“그럼 비켜주시죠. 심연으로 가야 하니까.”
“그렇게 하는 경우, 저는 관리국으로부터 실패 판정을 받고 5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잘됐군요. 그곳에 가게 되면 제 지시대로 하십시오.”
은혁은 한 장의 쪽지를 데니얼에게 내밀었다.
은혁이 심연에서 마주치게 될 시련에 대한 작은 보험이었다.
“아, 지금 펼쳐보진 마시고.”
“……쪽지를 남기는 게 무척 자연스러우시군요. 이런 식으로 동료나 부하에게 쪽지 남기는 일을 많이 해보셨나 봅니다.”
“눈치가 빠르군요.”
은혁은 씨익 웃은 뒤 데니얼이 보호하고 있던 심연의 출입구로 다가갔다.
심연의 출입구는 바닥에 있었는데, 손잡이 달린 금속 맨홀 뚜껑과 비슷해 보였다.
-경고! 이것은 심연의 출입구입니다!
-플레이어가 심연에 들어가는 경우 생존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관리자와 상담하세요!
“싫음.”
은혁은 심연의 출입구를 단숨에 열어 버렸다.
퀴오오오오오……!
바람이 강하게 빨아들였고, 은혁은 지체 없이 안으로 몸을 날렸다.
짙은 어둠이 은혁의 온몸을 감싸고, 눈앞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머리 위에서 출입구가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길드연합국과 3군주 세력 간의 전투가 한 달째 이어졌다.
그동안 3군주 세력에 큰 변화가 두 가지 있었다.
첫째. 3군주 사이에 협력이 이뤄진 것.
둘째. 3군주의 부하들 중 탈주자들이 생겨난 것.
위의 두 가지 변화는 사실 길드연합국의 염훈이 유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염훈의 [자비로운 석방] 스킬 때문이다.
염훈에게서 [자비로운 석방]에 1회 당하고, 한 번 더 붙잡히게 되면 무조건 염훈의 명령을 따르게 된다.
한 달의 싸움 동안, 염훈은 일부러, 거의 혼자서 최전방에서 싸움을 이어 갔고, 자연스럽게 [자비로운 석방] 스킬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3군주의 부하들 중 ‘변절자’들이 많아지고, 그들은 길드연합국에 항복하고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되었다.
이것만 해도 큰 이득이지만, 염훈이 예상치 못한 추가적인 이득이 있었다.
그 이득은 전혀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던 노예병들 사이에서 발생했다.
3군주 세력은 세부적인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시스템적으로 ‘노예’로 규정된 이들을 많이 부려먹고 있었다.
인치는 노예를 실험체로 활용하고, 카인은 노예병으로 부려먹는 식이다.
그런 노예들 사이에 작은 희망이 생겨나고 있었다.
‘탈주…….’
70층~89층의 경우 군주와 신민의 미션창이 다르다.
노예나 용병의 경우에도 다른데, 노예의 미션창은 다음과 같다.
<70층~89층 노예 메인 미션 : 대탈주 또는 대혁명>
-목표 : 대탈주 또는 대혁명에 성공할 것.
대탈주 : 70층~89층 구간을 벗어나, 다른 층으로 도주하는 데 성공할 것.
대혁명 : 전체 노예의 51% 이상이 스스로 일어나 군주에게 도전하는 것. 성패를 불문하고 대혁명을 일으킨 순간 미션 클리어로 간주한다.
-성공 시 보너스 : 대탈주 성공 시 모든 노예는 자유민이 되며, 추가 성공 보너스는 없음. 대혁명 성공 시 전원 자유민이 되며, 레벨 20 상승. [대혁명의 날] 버프 획득.
-실패 시 페널티 : 죽음.
-제한 시간 : 100년.
노예들 대부분은 노예 전용 메인 미션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미션창을 확인할 새도 없이 세뇌당하거나, 노예 생활에 끌려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가끔 탈주 노예가 나오기도 했지만, 악랄한 노예장은 그런 탈주 노예를 잡아서 잔혹하게 살해했다.
애초에, 카인의 노예들은 몸에 구속구가 박힌 자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다른 층으로 도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모든 노예가 탈주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노예들 중에도 레벨이 90에 근접한 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노예로 부려지면서도 강한 정신력을 유지해 왔다.
‘기회를 봐서 탈출하자.’
대놓고 말하진 못했지만, 적지 않은 강인한 노예들 사이에서는 그런 의식이 감돌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3군주 세력의 ‘귀족’들이었다.
3군주 세력권에는 평민이나 시민의 개념이 없었다.
길드연합국에서도 신민과 시민이란 개념을 혼용해서 쓰지만, 염훈이 성황제이자 길드연합국의 통합길드장의 지위를 공동으로 사용하기에 큰 문제는 없다.
3군주 세력권의 경우에는 군주, 귀족, 노예의 체제가 확고하게 존재했다.
“노예 놈들이 심상치 않더군.”
“그러게 말이야.”
“우리의 주군들께서는 뭐라 하시지?”
“한 달 전과 같아.”
“두 달만 버티라 하셨지. 이미 한 달 지났으니, 그럼 앞으로 한 달만 더 버티면 되는 건가?”
“도대체 무슨 계획들을 꾸미시는 건지…….”
3군주 세력 휘하의 귀족들이 모여 잡담을 나눴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다.
3군주 세력의 각 귀족들은 자신이 섬기는 주군의 명만 들었고, 상대 세력의 귀족은 잠정적인 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한 달간, 길드연합국의 공격 앞에, 3군주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밀착했고,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3군주가 통합되길 기다리시는 걸까……?”
한 귀족이 읊조렸다.
다른 귀족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작아.”
“어째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