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 심연에서 (1)
“운명치 채무 때문이지.”
“운명치 채무? 아, 그것 말인가.”
3군주는 오랜 세월 운명치를 무시하고 날뛰었다.
상대 3군주를 이기기 위해 다른 차원으로 무단으로 넘어가서 몰락한 지고의 위상을 복속시키거나, 낮은 층으로 몰래 넘어가 학살을 벌인다거나 하는 일이다.
그런 일은 당연히 막대한 운명치를 요구하고, 비축한 운명치가 없다면 운명치 폭풍이 발생한다.
3군주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운명치를 모을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자신들 때문이다.
70층~89층 구간에서 3군주끼리 서로 싸우다 보니 정상적으로 스테이지를 공략하며 운명치를 더 모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3군주는 부족한 운명치를 채우기 위해, 노예들의 운명치를 뺏거나, 귀족들에게 운명치를 대신 납세시키는 등의 방법을 써왔다.
정확한 명칭은 아니지만, 3군주의 귀족들은 이를 ‘운명치 채무’라고 불렀다.
3군주 자신들도 운명치 조작 꼼수를 너무 복잡하게 써서 계산이 안 될 정도.
“만약 우리들의 주군이 정말 하나로 통합된다면 3군주 중 한 명이 위에, 나머지 두 명이 아래에 속하게 되겠지? 그 경우…….”
“위에 올라가는 군주가 나머지 둘의 운명치 조작 책임을 덮어쓰거나, 반대로 군주의 운명치 문제를 나머지 둘이 뒤집어쓴다?”
“그렇지. 서열 정리 자체도 해결될까 말까인데, 더 큰 문제는 우리들의 주군들도 정확히 운명치 계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를 거라는 거야.”
3군주의 연합 문제는 쉽다.
외부의 적, 길드연합국이 있으므로.
그러나 3군주의 완전한 통합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럼, 우리의 주군들은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한다는 거지?’
귀족들은 알 수 없었다.
“하여간 노예들이 딴마음 품지 못하게 잘 간수하자고.”
“그러지. 참, 모두들 운명치 깎이지 않게, 다른 차원이나 더 낮은 층으로 가는 일은 없도록 해.”
“어차피 전쟁 중이라 그럴 일은 없어. 70층~89층 구간에서는 운명치가 잘 모이지도 않지만, 중간에 낀 귀족인 우리들은 운명치를 쓸 일도 많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조만간 우리의 주군들이 갑자기 운명치 내놓으라 할 수 있단 말이야. 그걸 대비하라고.”
“허참. 같은 귀족끼리 잔소리하긴.”
“새삼 적국의 염훈이 부럽구만. 그놈은 운명치가 사실상 무한이라지? 길드연합국 전체가 지지한다고 하니…….”
“어이, 목소리 낮춰. 가뜩이나 5층 기습 작전이 실패해서 주군들 심기가 안 좋은 마당에.”
“큭큭. 하긴. 다들 이쯤 하자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잖나?”
귀족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자신들이 장악하는 층으로 돌아갔다.
3군주의 귀족들은 몰랐지만, 이들이 대화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길드연합국이 자랑하는 ‘쥐 떼’들이 정보를 열심히 수집하고 있었다.
‘쥐 떼 네트워크.’
언론 기관인 ‘밤말 신문’의 비밀 조직이었다.
쥐 떼 두목이 특별히 양성한 쥐 인간을 쥐 형태로 변신시켜서 스파이로 삼았다.
각 층의 성채의 방어 시스템은 뚫지 못하지만, 성채로부터 거리가 좀 있는 영지들의 정보는 수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귀족들이 만나서 회담을 나눈 이곳은 각 성채로부터 멀리 떨어진 경계면에 설치된 고급 찻집이었다.
이곳에 잠입해 있던 쥐 스파이 하나가 우연히 귀족들의 대화를 듣고, 즉시 5층으로 귀환했다.
얻어낸 정보를 들으며, 길드연합국 수뇌부는 흡족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안도하진 않았다.
“놈들이 흔들리고 있군. 하지만 3군주 놈들은 아직도 뭔가를 노리고 있어.”
황금 궁전의 회의실에서 빌이 말했다.
회의에 참석한 염훈과 올마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한 달 아니면 두 달 휴전하자고 한 것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겠죠.”
염훈이 중얼거렸다.
그때로부터 한 달이 지났으니, 앞으로 남은 한 달 동안 예상치 못한 변수가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공세를 더욱 몰아붙여야겠습니다.”
염훈이 말하자, 빌이 동의했다.
“맞아. 그것 말고는 대책이 없지. 문제는 아직도 본성을 뺏지 못했다는 거야.”
아직도 적의 본성을 하나도 빼앗지 못했다.
일반 성채는 서로 뺏고 뺏기는 상황.
장기전으로 가면 인재풀이 넓은 길드연합국이 이길 것이라는 의견이 주도적이지만, 그래도 3군주의 본성 셋 중 하나도 여태 뺏지 못한 것은 불안 요소였다.
3군주의 영역에 발을 들였던 김경철이나, 기타 항복한 플레이어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신규 플레이어들이 들어왔다지?”
올마스크가 지나가듯 한마디 했다.
염훈은 피식 웃었다.
“벌써 그렇게 됐군요.”
염훈은 은혁과 함께 처음 1층에 왔던 때를 떠올렸다.
옷이 없어서 당황하던 염훈에게, 은혁은 안 입는 옷을 하나 건넸다.
“신규 플레이어들이 충원되면 그들을 빠르게 키우고 보호해야 할 겁니다. 신규 플레이어의 유입은 3군주 세력이 꼭 피하고 싶은 일일 테니까.”
“후후……. 그래. 새로운 인재가 들어오는 것을, 3군주 놈들은 꼭 피하고 싶겠지.”
올마스크가 묘한 장난기가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진정으로 위험한 작전은 같은 편도 속여야 하는 법.’
올마스크는 이번에 누가 돌아올지 알고 있었다.
그는 가면 덕분에, 숨기지 않고 빙긋 웃었다.
* * *
알파레몬과 3군주는 대화 중이었다.
“결국 합의가 된 겁니까?”
“응…….”
미치오가 대표로 말했다.
‘히든 미션 : 패왕의 권좌.’
지금 70층~89층은 처음 만들어진 상태와 비교했을 때, 많은 부분이 3군주의 의지로 바뀌어 있었다.
관리국은 그에 대해 개입하지 않았다.
정말로 강력한 플레이어들이 스테이지를 개변시키는 것 또한 100층탑의 일부이므로.
대표적으로, 5층 길드연합국이 이러한 관리국의 인정 하에 변화한 곳이다.
다만 관리국장 알파레몬이 개입한 부분도 있었는데, 그것이 70층~89층의 여러 히든 미션 중 특별한 것인 ‘패왕의 권좌’ 미션이었다.
3군주는 이 또한 없애려 했지만, 국장 권한으로, 그것들을 폐기하는 대신 일단 봉인해 두기로 결정했다.
‘훗날. 여러분이 이 히든 미션을 필요로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날이 정말로 왔다.
“그 히든 미션을 개방해 줘.”
지난 한 달은 이 히든 미션을 진행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다른 이들이 알면 어이없어할 일이지만, 그 준비 기간 대부분은 망설임이었다.
‘돌이킬 수 없으니까.’
개방된 히든 미션 내용은 다음과 같다.
<89층 히든 미션 : 패왕의 권좌>
-목표 : 89층에 존재하는 패왕의 권좌를 차지하고, 패왕이 될 것.
-성공 시 보너스 : 패왕은 89층에 위치하고 있는 동안 [절대 불멸] 판정을 받으며, 천상황제에의 도전 권리를 획득한다.
-실패 시 페널티 : 죽음.
-제한 시간 : 30일.
“결국 배수의 진을 펼치게 되었군.”
카인이 중얼거렸다.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미치오 님이 크게 이득 보는 미션인데.”
알파레몬이 물었다.
89층은 미치오의 본성이 있는 곳이다.
즉, 미치오가 패왕의 권좌를 장악할 가능성이 크다.
“그에 대해 계약을 맺었다.”
카인이 말했다.
“천상황제가 되면, 나머지 두 사람을 부활시키기로.”
“아하……?”
천상황제는 관리국이 만든 더미 데이터다.
90층~99층 구간을 혼자 클리어할 수 있는 강함을 상정하여 만든 데이터.
온갖 사기 스킬로 떡칠 된 데이터다.
패왕이 되면, 그 데이터인 천상황제에게 도전할 수 있다.
도전해서 이기면, 그 데이터의 힘을, 천상황제의 온갖 사기적인 능력을 모조리 흡수할 수 있다.
“흐음, 확실히 천상황제의 스킬 중에 [광역 플레이어 부활]이 있긴 합니다만.”
알파레몬이 100층탑 제작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카인과 인치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알파레몬은 그 모습을 슬쩍 확인하고 생각했다.
‘힘의 균형추가 미치오 쪽으로 옮겨졌군.’
지리적인 이유가 컸다.
카인과 인치의 세력권은 71층~82층 언저리였기에 염훈을 상대하는 방파제 역할이었다.
특히 카인의 성채는 대부분 염훈에게 뺏기고, 본성에서 지루한 물량전을 치르고 있는 상태.
반면에 미치오의 세력은 83층~89층이었기에 염훈의 직접 공격으로부터 안전했다.
‘미치오 입장에서는 염훈이 고맙겠군. 결과적으로 패왕 자리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총관리자 알파레몬이 그렇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데, 미치오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미치오 님? 질문 있습니까?”
“응…….”
미치오는 조금 자신 없이 질문했다.
“저기, 천상황제가 되어도 패왕 자격은 그대로 유지되는 거지……?”
“물론입니다. 근데 그건 왜 물으시죠?”
“불길해서…….”
미치오가 말끝을 흐렸다.
“오늘이 100층탑에 신규 플레이어 오는 날이잖아?”
“그렇습니다만?”
“이번에 또 강은혁 같은 이레귤러가 나타나면 곤란하니까.”
“네?”
“사실, 내가 원하는 건 패왕의 힘 즉, 89층에 한해서 절대 무적인 힘이거든.”
“아하…….”
미치오는 특유의 감으로 새로운 존재의 출현을 경계하고 있었다.
“현명하시군요. 철저히 대비해서 나쁠 건 없지요.”
알파레몬은 히죽 웃었다.
미치오는 알파레몬을 흘겨본 뒤 카인과 인치에게 말했다.
“그럼…… 각자 열심히 패왕의 권좌에 도전해 보자……. 어차피 누가 되건, 상대를 부활시켜주기로 계약한 거니까 너무 걱정 말고…….”
미치오는 이미 자신이 패왕이 된 것처럼 말했다.
카인과 인치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 * *
-심연의 바닥에 도착하였습니다!
-현재 위치 : 마이너스 1층.
은혁은 심연의 바닥에 착지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진짜 어둡다.’
다른 광원은 전혀 없었다.
“[화염 지배].”
화륵…….
손바닥 위에 불꽃이 떠 오르고, 주변이 보였다.
“허허…….”
은혁의 눈에 보이는 주변은, 검은색 물감처럼 꿀렁거리는 어둠이었다.
은혁이 불꽃을 꿀렁이는 어둠으로 보내면, 어둠은 슬금슬금 조금 물러났다.
물론, 물러난 자리도 여전히 어둡긴 마찬가지다.
“[파이어볼].”
투쾅!!
강력한 화염구를 한쪽으로 날려 보냈다.
쐐애애애액……!
밝은 빛과 열을 내뿜으며 한참을 날아갔다.
끝이 없는 듯이 한참 날아가더니,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예상보다 넓고, 짙은 어둠뿐이었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그림자 지배].’
은혁은 몸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라? 나쁘지 않은데?’
어쩌면 은혁은, 100층탑을 통틀어 가장 심연 적응력이 높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사이코메트리].”
우우우우웅……!
은혁은 별 기대 없이 꿀렁이는 어둠에 [사이코메트리]를 썼다.
그 순간.
“으아악……!”
너무나 많은 기억이 들어왔다.
가면을 쓴 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기억.
그중에는 은혁이 통합길드장이 되었을 때 대화를 나눴던 설계자도 있었고, 총관리자 알파레몬도 있었다.
* * *
어느 창문 없는 넓은 회의실.
창문이 있을 법한 곳에는 실험 모니터링을 위한 스크린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그 회의실 중심에 회의용 테이블이 있고, 가면을 쓴 자들 여럿이 앉아 있다.
유일하게 가면을 쓰지 않은 여인, 설계자가 총관리자에게 따져 물었다.
‘지금 100층탑의 난이도는 지나치게 높아. 이래서야 그냥 죽이는 것과 다를 게 뭐야?’
설계자가 따지자, 알파레몬은 고개를 저었다.
‘설계자여. 당신의 선량한 마음이 당신을 나약하게 하는군요. 난이도가 어느 정도는 높아야 플레이어는 빨리 성장합니다.’
‘하지만 적응 못 하는 자들은 전부 죽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