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 그림자의 궁전에서 (2)
은혁은 지난 퀘스트를 읽으며, 까마득한 옛날에 쓴 일기장을 본 것 같은 기분마저 느꼈다.
‘정말 길었어. 심연까지 오는 게 이토록 힘이 들 줄이야.’
심연에 대한 정보는 회귀자인 은혁으로서도 모르는 게 많았기 때문이다.
은혁은 움브라에게 말했다.
“어둠의 장막 너머에, 운명의 성좌가 있을 겁니다.”
은혁은 심연의 어둠에 담긴 옛 기록을 해독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아카식 제로와 직접 대화를 나누어 보시겠습니까?”
아카식 제로를 비롯한 성좌들은 심연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다.
단, 은혁은 무아의 성좌 아카식 제로와 계약을 맺은 상태고, 무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 상태.
새로 얻은 [무아의 성좌 강림]을 쓰지 않아도 대화를 시키는 게 가능할 터.
“후, 생각할 시간을 좀 주겠니?”
“정말 죄송합니다. 무례한 소린 줄은 알지만 시간을 길게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은혁은 무례를 무릅쓰고 그렇게 말했다.
이곳과 밖의 시간의 흐름이 2배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면, 지상에서는 2일이 지나는 셈이다.
아주 큰 차이는 아니지만, 염훈이 3군주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럼 노골적으로 묻지. 내가 얻는 건?”
“성좌 연합을 차지하게 도와드리죠.”
그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화사하고 아름다웠던 인테리어는 사라지고, 다차원 성계의 공허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음.”
갑자기 찾아온 진공과 추위에, 어센션이 불편한 듯 몸을 보호했다.
“방금 뭐라고 했니?”
“성좌 연합이라고 했습니다.”
“흐음…… 현재 내가 성좌 연합에 속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성좌 연합에 포함되지만, 예외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눈앞에 있는 그림자의 성좌다.
그밖에, 어둠의 장막 너머에 있는 잊힌 성좌들 대부분도 그러했다.
“저는 움브라 님이 성좌 연합의 수장이 되는 것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감히 일개 플레이어가 입에 올릴 소리는 아닌 것 같구나. 지나친 농담은 싫어한단다.”
“농담이 아닙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설명해 보렴.”
“플레이어가 도전하게 될 90층~99층 구간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높은 곳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른단다.”
“난이도에 따라 다르지만, 성좌, 지고의 위상, 드래곤 컬트를 두고 협력하거나 대결을 벌이는 층입니다. 아마 난이도가 높을수록 훨씬 거대한 규모의 미션이 펼쳐지겠지요.”
은혁이 회귀 전에 택한 이지 루트는, 층에 따라 협력할 집단을 선택해서 축복을 받거나, 반대로 적대시할 집단의 한 개체를 골라서, 플레이어 연합이 집단 레이드를 펼치는 식이었다.
만약 은혁이 이번에 하드 루트를 택한다면…….
‘훨씬 거대한 규모의 집단전이 펼쳐질 수도 있어.’
물론, 확신하긴 어렵다.
90층~99층은 관리국장, 즉 알파레몬의 직접적인 의지가 개입되는 층이다.
회귀 전 은혁이 이지 모드를 고를 수 있었던 것은, 약하디약한 ‘노력하는 검성’인 은혁이 밀입국자로서 쟁쟁한 자들을 제치고 90층에 먼저 도달한 걸 알파레몬이 갸륵하게 여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네 말은, 90층~99층 구간에서 성좌 연합을 적대하겠다는 거니?”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죠. 성좌 연합을 도와서 지고의 위상들과 드래곤 컬트에게 큰 피해를 주고, 그 대가로 당신은 성좌 연합에 목소리를 낼 수 있겠죠.”
미간을 찌푸렸다.
“별로 대단찮은 계획이구나. 불확실하기도 하고.”
“문제라도 있습니까?”
“지금의 너라면 성좌의 본체를, 성좌의 차원에서 싸워서 이길 정도지. 그래서 성좌 연합을 깔보고 있는 것 같구나.”
“흠…….”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은혁은 원래 성장 속도가 빨랐지만, 최근에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지수 곡선을 그릴 정도로 성장이 빨랐다.
통합길드장이 되고 3중 승급, 3군주와 대결, 100층탑을 탈출했다가 다시 1층으로 돌아가 직업 포션을 모두 마시는 일, 심연으로 내려와 심연의 깨달음을 얻은 일, 어센션으로부터 무아의 경지를 전수받은 일 등등.
과장 좀 보태서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강해졌다고 해도 될 정도.
그래서 은혁은 무의식중에 성좌 연합조차 발밑에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건 예의가 아니지 않니?”
“예의라…….”
은혁은 아직, 자신과 성좌 연합에 대한 판단이 정리되지 않았다.
회귀 전 은혁에게 성좌는 압도적인 신적 존재일 뿐.
적으로 삼을까 말까 고려조차 하지 못했었다.
“성좌가 위대한 존재이고, 그들의 연합 또한 마찬가지이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위대함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을 맹목적으로 신종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적으로 돌릴 수도 있겠다는 거구나? 오호호! 그럼 차라리 나를 적으로 돌리고, 강제로 어둠의 장막 너머로 넘어가지 그러니?”
도발조로 말하자, 은혁은 다투고 싶은 의사가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들었다.
“그거야말로 예의가 아니겠지요. 이 안쪽까지 초대를 해주셨는걸요. 게다가 심연에서 그림자의 성좌와 싸우는 건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지능의 문제겠지요.”
은혁의 말에 움브라는 깔깔 웃었다.
차가웠던 진공의 공간이 사라지고, 다시 움브라의 궁전 내부로 돌아와 있었다.
“아아, 이런 대화는 오랜만이라 그런지 재밌구나. 하지만 시간이 없다 했으니, 그냥 내가 대놓고 원하는 걸 말할게. 나는 성좌 연합의 수장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애초에 없단다.”
“성좌 연합의 수장이면, 사실상 최강의 존재입니다. 수많은 권능을…….”
“얘는! 그깟 최강이 뭐 좋니? 이미 나는 원하는 걸 다 가지고 있으니, 추가 권능도 필요가 없단다.”
‘으윽. 오늘따라 설득이 잘 안 먹히네.’
은혁은 자신의 설득 전략이 조금 삐걱거리는 걸 느꼈다.
은혁은 움브라가 심연 속에서 음모를 꾸미며 때를 기다리는 잠룡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실제로 대화를 해보니 움브라는…….
‘의외로 어센션이랑 비슷해!’
심연에 오래 머무른 탓일까?
성좌인 움브라나, 길드장인 어센션이나, 권능이나 최강의 힘 같은 것들에 대한 욕망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걸 말해줄게. 그것은 이곳, 100층탑을 나가는 것이란다.”
심연은 과거와 현재의 중첩이며, 100층탑의 내부이면서 동시에 바깥에 해당하는 어중간한 곳.
‘움브라가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는 어쩌면……!’
“그래. 나는 네 짐작처럼 성좌 연합에서 떨려난 게 아니야. 스스로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거지. 100층탑에서 가장 밑바닥에 해당하는 이곳이, 100층탑 바깥과 가장 가까운 곳이니까.”
“……정말로 100층탑 밖에 나가고 싶으신 겁니까?”
“후후. 그래.”
“많은 게 설명되는군요. 저에게 지난번 39층에서 ‘절대 열쇠’를 선물해 주신 것도, 제가 100층탑을 탈출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던 겁니까?”
“응. 그리고 지구로 돌아갔다가 돌아온 너에게 관심이 많은 이유도 알겠지?”
그제야 은혁은 움브라가 정말로 100층탑을 나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100층탑을 나갔다 들어오는 것과 성좌가 100층탑을 나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알아. 나도 시도해 봤으니까.”
움브라의 다락방에는 온갖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하다.
그중에는 관리국의 눈마저 속일 수 있는 ‘도깨비 감투’도 있다.
움브라는 100층탑을 몰래 나가기 위해 자신을 심연에 숨기고, 온갖 희귀한 아티팩트를 활용했지만.
“성좌라서 오히려 불가능하더구나. 불완전한 플레이어가 부러워.”
움브라는 가운 주머니에서 금메달을 꺼냈다.
“아, 그건.”
“내 부하인 체아트리가 가져다준 거란다. 네가 튜토리얼 때 2층에서 얻은 금메달이지? 이 안에는 플레이어에 관한 정보가 많이 있지.”
“음…….”
“너로 변장하고 나가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단다.”
“이런, 그건 좀.”
“걱정 마렴. 실패했으니까.”
움브라는 금메달을 은혁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어쨌거나, 내가 정말로 100층 밖에 나가고 싶어 한다는 건 알겠지?”
“왜 그렇게 나가고 싶어 하시는 겁니까?”
은혁이 알기로 100층탑 내부의 세계는 바깥 세계에 비해 결코 좁지 않다.
내부에 이미 다양한 차원이 구현되어 있고, 관리국이 원한다면 파괴된 다른 차원을 100층탑의 스테이지로 삼아서 추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움브라가 마음만 먹는다면 심연을 개조하거나, 관리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가능할 터.
하지만 움브라가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불완전함을 원해.”
“불완전함……?”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의식주 필요 없이, 심지어는 육신조차 없이 존재할 수 있는 나와, 어느 것 하나라도 모자라면 병들고 죽어 버리는 너희들의 차이를.”
움브라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내가 모르는 세계를 원해. 내 뜻대로 안 되는 세계로 가고 싶어. 아아! 나는 너희 플레이어들이 부러워. 마법이 없는 세계에서 태어나서, 마법이 존재하는 곳에 들어온 너희들이 어찌나 부러운지…….”
움브라의 다락방에는 인간이 꿈꿀 만한 온갖 것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움브라의 마음을 일시적으로만 기쁘게 할 뿐, 진정한 욕망을 채워주지 못했다.
은혁은 돌파구를 찾았다.
“그럼 더더욱 운명의 성좌를 만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성좌가 성좌의 운명을 극복하는 게 가능한 건지 확인하고 싶지 않습니까?”
“…….”
움브라는 자신이 운명의 성좌와 맺은 계약과 은혁의 요구,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한데 놓고 이리저리 저울질했다.
“……좋아. 이제 결정을 내리마.”
움브라는 결단을 내렸다.
* * *
노인 요양원 앞.
이경덕은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노인 요양원이 생긴 이래로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이렇게 사는 길도 있구나.’
지구에서 바쁘게 살아온 이경덕은 노후 자금 마련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노후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구와의 술 한 잔도 하지 않고, 자식에게 돈도 단 한 푼도 물려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설마 100층탑에 끌려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끌려오자마자 죽을 뻔했지.’
이경덕은 올해 100층탑에 온 사람 중 가장 먼저 죽었을 뻔했다.
강은혁이라는 이름의 청년이 나서서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죽었으리라.
이경덕은 은혁에게, 언젠가 은혜를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나는 그 청년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했는데. 정작 그 청년은 나 따위의 은혜는 필요도 없어 했지.’
오히려, 은혁은 길드연합국 내의 약자들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임시 통합길드장이 되기 이전이었음에도, 불패불굴 길드를 통해 장애인, 노숙자, 노약자를 위해 요양원을 여럿 짓고, 겉보기에는 무시무시한 ‘블러드 솔저’까지 소환수로 활용해 가며 약자들을 도왔다.
‘애초에 내가 은혜를 갚겠다는 소리가 주제넘은 소리였지. 허허.’
은혁을 떠올리며 웃던 이경덕의 표정이 갑자기 슬퍼졌다.
대략 한 달 전, 염훈이 60층~69층 구간을 뚫고 올라가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기 때문이다.
“…….”
빗자루를 움켜쥔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은혁에 대한 슬픔보다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었다.
‘은혜를 갚을 기회가 없었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려 하다니. 이 못난 늙은이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