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 운명의 변환점
이경덕은 지난 한 달간 했던 자책을 반복했다.
‘아아, 이 은혜는 영원히 갚지 못하겠구나!’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창백한 피부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누구지?’
“체리라고 해.”
체리는 마치 이경덕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이경덕 플레이어, 맞아?”
반말로 말하는 체리가 수상했지만 이경덕은 그걸 문제 삼지 않았다.
“음, 내가 이경덕이오만, 누구시라고?”
“설명할 시간 없어. 나는 이곳에서는 앞으로 1분 정도밖에는 머무르지 못하니까.”
아름다운 처녀의 몸이 마치 그림자처럼 까맣게 변해 갔다.
“이쪽으로 와.”
체리는 까맣게 변한 손으로 이경덕을 잡아끌었다.
이경덕은 주변의 블러드 솔저에게 도와달라고 외치려 했지만.
“바둥거리지 좀 마. 그리고 숨 참아.”
파앗!
체리와 이경덕은 심연으로 사라졌다.
* * *
‘아, 여기가 지옥인 걸까?’
새까만 공간으로 한없이 끌려 내려가며, 이경덕은 생각했다.
우우우웅……!
주변의 어둠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다 왔어. 숨 쉬어도 돼.”
“아……?”
어느새 숨쉬기가 편해졌다.
그리고 주변은 매우 아름다운 인테리어의 궁전 내부였다.
그곳에는 다과를 먹고 있는 한 사내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정말 데리고 왔군.”
사내의 이름은 어센션이었다.
이경덕은 물론 어센션이 누군지 몰랐기에, 어센션이 이곳의 주인인가 하고 생각했다.
“여, 여긴 어디오?”
이경덕이 물었지만, 다시 체리가 잡아끌었다.
“구경할 시간 없어. 어둠의 장막 너머로 빨리 가야 해.”
체리는 그렇게 말하더니 어디론가 더 안쪽으로 이경덕을 끌고 갔다.
아주 거대하고 짙은 검은색 커튼이 쳐져 있는 곳이었다.
“이 안에 내 주인이신 움브라 님과 강은혁이 있어.”
“앗, 뭐요?”
“급하니까 얼른 들어가!”
파악!
체리는 이경덕을 커튼 너머로 밀어 버렸다.
화아악……!
“허억?!”
우당탕!
“아, 오셨군요.”
은혁이 이경덕을 얼른 일으켜 세워줬다.
“여, 여긴? 아니, 자넨?!”
“강은혁입니다. 기억하시죠?”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근데 자넨 죽었는데!”
이경덕은 귀부인처럼 생긴 움브라를 보고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여, 여긴 저승 세계인가?! 저 여자는 심판관이고!!”
이경덕이 말하자 움브라는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었다.
은혁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설명했다.
“이곳에서 저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아니, 뭘 알아야 돕…….”
투덜거리듯 말하려던 이경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어리석은 놈!’
방금까지만 해도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며 한탄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이것저것 재려고 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뭐가 되었든 자네를 무조건 돕겠네.”
“진심이십니까?”
“그럼! 나도 은혜는 갚을 줄 아는 사람이야!”
“든든하군요.”
은혁은 흐뭇하게 웃었다.
“저희가 어르신을 부른 이유를 간략히 먼저 설명드리겠습니다. 저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곳 어둠의 장막 너머 어딘가에 운명의 성좌가 존재합니다.”
“엥?”
“저는 여기 계신 그림자의 성좌, 움브라 님을 설득하여 여기로 들어왔지만, 운명의 성좌께서는 대화를 원한다면 한 가지 가치 증명을 해보라 하셨습니다.”
“서, 설마 산 제물을 바치라는 건……?”
“하하! 설마요. 운명의 성좌의 요구는…….”
은혁이 말하려는 순간, 운명의 성좌가 목소리를 내왔다.
-네 운명의 변곡점을 가지고 오라.
은혁은 빙긋 웃었다.
“들으셨지요? 어르신께서는 100층탑에서 제가 자유의지로, 최초로 구한 생명입니다. 저는 당신을 저의 운명의 변곡점으로 삼았습니다.”
이경덕은 이해를 못 했다.
“어어, 내가 그리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생각하긴 어려운데.”
“이걸 설명하려면 가장 중요한 비밀을 설명해야 합니다. 비밀을 지켜주시겠습니까?”
은혁은 이경덕과 움브라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둘 다 동의하자, 은혁은 입을 열어 염훈에게도 한 적 없는 말을 했다.
“사실 저는 회귀자입니다.”
“어?”
“일단 기억을 받으십시오.”
은혁은 블러드 데이터 칩을 이경덕의 머리에 넣어줬다.
파앗!
“아, 아아아……!”
모든 기억은 아니고, 은혁이 회귀자라는 걸 증명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기억들이었다.
물론, 그것만 해도 5층에만 머물러 있던 이경덕에게는 엄청난 것이었다.
“회귀자라는 게 정말 있다니……! 그리고 내가, 내가……!”
이경덕은 자신이 원래는 죽었어야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은혁이 우선 사과했다.
이경덕은 혼란스러웠다.
생명의 은인이 자신에게 사과를 한다는 게 우선 혼란스러웠고, 또 은혁이 당연히 자신에게 사과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 배로 혼란스러웠다.
“살고자 하는 사람을 죽였을 때, 우리는 지탄하며 살인자라 칭합니다. 하지만 원래 시간선에서 죽었어야 할 사람을 살린 지금 같은 경우에는 좀 상황이 어색하지요.”
“그, 혼란스럽구만.”
이경덕은 차라리 진실을 몰랐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
이경덕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으음, 혼란스럽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만 집중하지. 이제,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나?”
“아무것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거기 가만히 서 계시겠습니까?”
“응? 그러지.”
은혁은 어둠을 향해 말했다.
“여기 계신 이경덕 님은 제가 회귀한 이후, 가장 처음으로 살린 사람입니다. 들으셨다시피, 원래는 죽었어야 할 존재이지요.”
-그를 왜 구했는가? 그리고 그를 구한 일이 구체적으로 너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그를 구한 이유는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위대한 성좌여. 인간만큼 과거로 시간을 감아 회귀하는 것을 꿈꾸는 존재도 드물 겁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아마도 과거로 돌아가서 이득을 보기 위해. 또는 후회스러운 일을 없애기 위해서겠지.
“맞습니다. 이경덕 님을 구한 이유는 그중 후자입니다.”
-그를 구하지 못한 게 그리도 후회된다고? 그 노인에게 신비로운 힘이 있나? 아니면 어떤 중대한 순간의 열쇠 역할을 하는가?
성좌의 의문에, 이경덕은 생각했다.
‘나야말로 그게 궁금하군.’
“아뇨. 그는 정말로 평범한 노인입니다.”
은혁은 단칼에 말했다.
이경덕은 가만히 선 채로 머쓱해했다.
“위대한 성좌여. 그를 구한 일이 후회 때문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후회 중에도 납득 가능한 후회가 있고, 아닌 게 있습니다.”
-그 노인을 구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후회를 극복하기 위함이라는 거겠지? 구체적으로?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할 때의 부끄러움이지요. 남 보기 부끄러운 경우보다, 나 혼자서 스스로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부끄러운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이 회귀를 꿈꾸는 것은, 과거로 돌아와서 그것을 바꾸기 위함입니다.”
사람으로서, 어른으로서 살다 보면 고개를 숙일 때도 있고, 불의에 굴복할 때도 있다.
하지만 특히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저에게는 1층에서 노인이 무력하게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던 것. 그것이 저에게는 극심한 후회였습니다.”
박태돈이 이경덕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이번 회차의 은혁은 이렇게 말했다.
‘웃기지 마.’
그리고 은혁은 박태돈과 싸웠고, 이경덕을 구했다.
박태돈은 은혁이 의외로 강하자, 은혁에게 다시 덤벼드는 대신 이경덕을 향해 공격을 날렸다.
놀란 은혁은 이경덕을 보호하러 몸을 날렸고, 회귀자라는 메리트도 없이 순식간에 박태돈에게 역전당해서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 직후, ‘모든 직업의 가능성’이 각성했습니다.”
왜 하필 그 순간이었을까?
단순히 ‘고오급 소화제’가 뮤비즈의 마정석의 힘을 완전히 소화한 타이밍이 우연히 그 순간이었던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운명이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면, 나는 그것을 우연이라 보진 않는다.’
회귀 전 무력하게 바라보기만 하느라 구하지 못했던 특별할 것 없는 노인을 구하려다 역으로 위기에 처한 그 순간, 은혁의 운명은 갈림길을 탄 것이다.
‘가진 거라곤 노력과 악바리뿐인, 후회 가득한 검성의 삶에서 후회 없는 만능 최강자의 삶으로.’
그 분기점이 바로 이경덕을 구한 순간이라고 은혁은 확신했다.
“인간의 후회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 관한 이야기라, 제대로 설명드리기가 어렵군요.”
-이해했다. 내게로 와라.
파앗!
은혁은 운명의 성좌가 지배하는 곳으로 전송되었다.
* * *
대형 병원의 1인실을 연상시키는 곳으로 은혁은 전송되었다.
커튼에는 노을빛이 묻어 있었고, 병실 안에는 약품 냄새가 가득했다.
병실 창가에 놓인 침대에는 노인이 누워 있었는데, 마치 영원보다 더 오래 이곳에 누워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내 몸 상태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하기도 어렵군.”
운명의 성좌는 은혁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은혁이 살던 지구의 병실과 환자 느낌이 나도록 자신의 차원과 자신을 꾸몄다.
“죽어 가고 있습니까, 성좌여?”
“그렇지. 너희 식 표현대로 하면 겨우 산소만 꼽고 있지. 클클클…….”
운명의 성좌는 그게 마음에 드는지 한참 웃었다.
은혁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약하다. 예상보다 훨씬.’
성좌는 강력한 존재이지만, 그들 간의 힘은 천차만별이다.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많은 신도 수를 확보한 성좌일수록 일반적으로 강하다.
많은 이들에게 잊히거나, 계약한 성직자가 전혀 없는 성좌일수록 약하다.
운명의 성좌가 특히 그러했다.
“나를 만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입니다.”
“말해봐.”
“첫째. 무아의 성좌, 아카식 제로와의 퀘스트 계약 때문입니다. 그는 운명이란 존재하는지, 운명에 법칙이란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운명을 극복 가능한 것인지 알고 싶어 했고, 저는 심연에 가면 답이 있을 거라 했습니다.”
“후후. 자네는 그 말대로 했군. 실제로 심연을 뒤져서 운명의 성좌인 나를 찾았으니, 정답까진 한 걸음 남았구만? 둘째는 뭔가?”
“둘째. 개인적인 궁금증과 연관된 부분입니다만…… 운명의 성좌께서는 왜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이곳에 계십니까?”
심연만 해도 일반 플레이어는 닿기 어려운 곳인데, 운명의 성좌는 그곳에서도 어둠의 장막 너머에 숨어 있다.
완전히 은둔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둘째 질문부터 답해주지.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모두에게 잊힌 채 죽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으음……!”
은혁은, 운명의 성좌가 본명을 밝히지 않는 게 아니라 애초에 없는 것 아닐까 싶었다.
스스로 잊히고 소멸하길 원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왜입니까?”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지. 운명은 모든 걸 무의미하게 만들어.”
“어어, 그 말씀은 그 누구도 운명은 극복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아니. 일부 초월자들은 가능하지. 아, 초월자에 대해 아나? 그들은 성좌나 관리국보다 상위의 존재인데.”
“잘 모릅니다.”
“뭐, 100층에 올라가면 알게 될 거라고만 해둘까.”
운명의 성좌는 적당히 말하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나조차도 결국은 운명에 휘둘리는 존재야.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의문은 뭘까?”
“어쩌면 초월자들조차도 운명에 휘둘리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거야. 웃기지 않나?”
“음…….”
운명의 성좌가 칩거한 것도 이해가 갔다.
모든 성좌가 자신이 맡은 도메인을 절대적으로 관장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들어봤지만, 이토록 무력한 경우도 드물었다.
“비웃으려면 비웃어라.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어. 운명의 성좌가 자신의 운명의 한계를 깨닫고, 잊혀서 죽고자 한다~라는 건, 오히려 운명의 성좌에게 가장 어울리는 최후라는 거지. 그리고…….”
운명의 성좌가 천장을 아득한 눈으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