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 운명의 성좌와의 대화
“플레이어는 물론이고 이 세상의 모든 지적 존재가, 운명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아니,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확실히 운명의 성좌가 정말로 잊히고 죽어 버린다면, 적어도 플레이어는 운명이란 개념에 이전처럼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소멸한다고 해서 운명이란 개념 자체가 소멸하진 않을 텐데요.”
“맞아. 하지만 지성체들이 운명을 의식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운명에 휘둘릴 가능성은 줄어든다.”
“음…….”
“자, 이제 나는 마지막으로 네 부탁을 들어주고 소멸할 것이다. 우선 아카식 제로의 의문에 대해 답하겠다.”
“네. 경청하고 있습니다.”
“그의 의문대로, 운명이란 것은 실제로 존재하긴 한다.”
은혁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운명이란 편의상 만든 개념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이봐, 운명의 성좌가 코앞에 있는데 운명이 없을 거라 생각했나? 하하하!”
“으음…….”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운명은 확률론에 가까운 것이다.”
그 말에 은혁의 표정이 풀어졌다.
“제 예상대로군요.”
“그래. 마왕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악마 같은 놈으로 자라난다는 보장은 없지. 하지만.”
“마왕의 자식이라는 운명은 그의 인생 내내 작용하겠지요.”
“바로 그거야.”
“그럼 역시 운명을 극복하는 것은 가능하겠군요?”
“으음…….”
운명의 성좌는, 자신이 관장하는 운명에 대한 대화를 하면서도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결과론적인 답변만 가능하겠군.”
“실제로 극복하는 데 성공한 경우 극복한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아니다?”
“그렇지.”
“하…….”
은혁은 조금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운명의 성좌는 태평했다.
“답변이 불만인가? 미안하지만 전부 진실이야.”
“하지만 당신이라면 운명을 자유롭게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아아. 나는 어지간한 운명은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 단, 근본적인 세계 전체의 운명을 관장하진 못한다.”
“어째서입니까?”
“내가 운명의 성좌라고 해도, 나보다 격이 낮은 존재, 나보다 약한 존재의 운명만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성좌는 나 혼자가 아니거니와, 성좌나 관리국보다 강력한 초월자의 존재 때문이지.”
“알 것 같군요.”
가령, 죽음의 성좌가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성좌조차 죽을 수 있다.
말장난 같지만, 100층탑의 성좌는 그러한 존재다.
“만족했나?”
“답변을 잘 주시긴 했지만 솔직히…….”
운명의 성좌가 준 답변은 아카식 제로가 요구한 의문들에 대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은혁은 아카식 제로가 이런 답변에는 만족하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피곤하다. 몇 번을 물어도 나는 같은 대답을 해줄 뿐이야. 이제 됐겠지?”
“네. 제 질문에 모두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왜 널 이곳에 불렀는가, 라는 점이겠지.”
“네. 왜 저의 운명의 변곡점을 요구한 건지, 굳이 이곳에 저를 불러 약해진 당신의 모습을 보여준 것인지…….”
“내 임종을 마지막에 봐줄 존재가 필요하니까. 하찮은 놈에게 그 일을 맡기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자기 운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운명의 변곡점을 정확하게 짚어 낼 정도의 지능과 운을 지닌 놈이길 바랐다.”
“그게 저였군요.”
“맞아. 하지만 단순히 참관인을 뽑은 건 아니다. 성좌는 자살을 못 하거든.”
운명의 성좌는 자신의 몸과 연결된 플러그를 가리켰다.
은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부러 병실과 환자로 이미지화한 것도 그런 이유였군요.”
“그래. 저 플러그를 뽑으면, 너희 세계의 적극적 안락사와 비슷한 방식으로 내 숨은 곧 끊어진다.”
“…….”
“내가 죽으면 너는 성좌를 죽인 것에 걸맞은 막대한 경험치를 얻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이미 성좌의 본체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강해지겠지.”
“아마 그렇겠지요.”
은혁이 수긍하자, 운명의 성좌의 눈에 마지막 화광반조가 깃들었다.
“그래. 나를 죽이고 힘으로 너만의 운명을 개척해라……!”
“웃기지 마.”
“뭐?”
“제가 밖에서 보여드렸던 운명의 변곡점 말입니다.”
은혁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그때, 그 노인을 죽이고 자신만 살려는 이기적인 악당 놈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웃기지 마.’라고.”
“……그 소리를 나에게 하는 이유는?”
“저는 지금이 또 다른 운명의 변곡점이라 생각하고, 마침 그때처럼 눈앞에 이기적인 존재가 있군요. 그래서 웃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기적인 놈이란 건가?”
“달리 해석할 수도 있습니까? [성좌 계약] 발동.”
은혁은 꽤 예전부터 ‘???급 직업 아직 계약을 하지 않은 성직자’ 직업을 갖고 있었다.
누구와도 계약을 맺지 않았기에 [하급 치유]와 [설득의 태도] 정도를 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직업.
은혁에게 직업이 여러 개였고, 염훈의 회복 스킬이 월등히 좋았기에 망정이지, 그것을 여태 달고 다니는 건 확실히 낭비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기다렸다.’
- [성좌 계약]이 발동했습니다!
“뭣?!”
운명의 성좌가 경악했다.
“자아, 계약을 진행해 볼까요?”
은혁은 사무적으로 말했다.
“요구 사항을 말씀해 보십쇼.”
“내 요구 사항은 이미 말했을 텐데? 나는 자연히 소멸하고 싶다고 했다.”
“그건 안 됩니다. 운명의 성좌를 죽게 놔둘 리가 없죠.”
은혁은 신념을 담아 말했다.
“운명은 인간의 삶 속에서 미쳐 날뜁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운명에 간섭당하고, 죽어서야 끝나죠.”
“……전부 방금 우리가 나눈 대화를 요약해서 어쩌자는 건가.”
“억울하다는 걸 말하려는 겁니다. 운명은 인간을 갖고 놀지만, 인간은 운명에 대해 속수무책이죠. 적어도 현실 세계에서는 말입니다.”
은혁은 히죽 웃었다.
“그런데 100층탑은 확실히 신기한 곳이죠. 무려, 운명을 다루는 성좌가 존재하고, 그 성좌와 대면하거나 협상하거나, 또는 싸울 수도 있는 겁니다.”
운명의 성좌의 안색이 더 창백해졌다.
“더 나아가, 내 죽음을 막을 수도 있겠군?”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습니다.”
“위험한 자군. 나는 심연을 뚫고, 운명의 변곡점을 찾고, 무아의 성좌와 그림자의 성좌로부터 존중받는 자네를 나 또한 존중했다네. 그래서 자네 손에 죽기를 바라고 자네를 불렀는데…….”
“정작 그런 저는 당신을 그냥 죽게 둘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얄궂은 운명 아닙니까?”
“다만 자네는 나를 너무 깔보고 있군. 나는 이미 운명을 변환시키는 게 가능하다 했네.”
“해보시죠.”
어느새 은혁은 프로스트 스파이럴을 들고 있었다.
‘지금의 나라면 할 수 있다.’
“자네를 존중하지만, 자네의 운명을 조작해야겠네.”
그 순간.
-성좌 계약이 진행 중인 경우, 그 성좌는 계약 당사자인 성직자에게 위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어?”
“하하하! 뭘 모르시는군요.”
은혁은 웃었다.
운명의 성좌는 심연에서도, 어둠의 장막 너머에만 있다 보니 계약에 대해 아는 게 부족했다.
“계약 중에 성좌가 성직자를 괴롭히면 정당한 계약이 되겠습니까?”
“쳇.”
“운명의 성좌이시면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영 부족하시군요.”
“너무 놀리지 마라. 계약을 취소하겠다.”
운명의 성좌가 선언한 순간.
“규칙술사 스킬 [시스템 해킹 2.0]. 계약은 쌍방이 모두 중단하길 원하지 않는 한 계속 진행한다.”
파앗!
-계약은 쌍방이 모두 중단하길 원하지 않는 한 계속 진행됩니다!
시스템은 정확히 은혁이 요구한 그대로를 읊었다.
“자, 제대로 계약 하시죠!”
“뭐가 제대로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쯤 되면 계약이 어떻게 될 건지 궁금해지는군.”
운명의 성좌는 그 이름답지 않게, 자신의 운명을 아예 놔버리고 은혁에게 맡겨 버렸다.
“우선, 힘의 절반을 주십시오.”
“처음부터 막 나가는군.”
“어차피 죽으려고 했다면서요?”
“이봐. 나는 모두에게 잊힌 채로 소멸하는 게 목적이라고 했네. 어차피 죽을 거 장기 기증이나 하라는 식으로 말하다니. 내 말을 이해 못 한 거 아닌가?”
“아뇨. 그렇게 요구해도 상관없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될 테니까요.”
“어떻게?”
“왜냐하면 저는 100층탑을 정복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소원 이룰 수 있다는 말 들어보신 적 있죠?”
“있지. 그거랑 나랑 뭔 상관?”
“그렇게 제가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면, 저는 ‘소원 100개 이룰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빌 겁니다.”
“너, 너 설마.”
“그 소원 100개 중 하나에, ‘운명의 성좌를 영원히 잊힌 채 죽어 없어지게 해주세요.’라고 하면 되죠.”
“미쳤군.”
“100층을 클리어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소문이 진실이라면, 딱히 미쳤다고 할 수는 없죠.”
“네 말대로라면 네가 100층을 정복할 때까지, 나는 내 힘의 절반을 네게 빨아 먹힌 채 죽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는 거군?”
“그렇죠. 다른 선택지도 있습니다.”
“그건 또 뭐지?”
운명의 성좌는 자꾸 말려드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놈이 또 무슨 미친 소리를 하려나?’ 하는 마음으로 자꾸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지닌 성좌의 힘을 아예 저에게 전부 주는 겁니다.”
“……!”
운명의 성좌는 입을 떡 벌렸다.
‘뭔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만, 무지막지하구만.’
처음에는 성좌의 힘을 절반 달라는 식으로 계약을 진행하더니, 이제는 아예 다 달라고 했다.
“그 경우, 운명의 성좌로서의 당신은 소멸하고, 일반 NPC로 강제 윤회됩니다. 시스템 해킹뿐만 아니라, 새로 얻은 규칙술사 스킬인 [관리자 자격 10초 생성]을 쓸 수 있으니 이 있으니 가능하죠.”
“…….”
“그 경우 당신은 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운명이란 개념도 살아남겠죠. 하지만 운명의 성좌라는 개념은 서서히 사라질 겁니다.”
“허…….”
“왜요? 공짜로 밑천 다 털리는 기분이라 선뜻 입이 안 열립니까?”
“거, 못하는 소리가 없……! 아니, 네 말이 맞다.”
막상 소멸과 망각을 요청한 죽음의 성좌지만, 이런 식의 ‘어차피 쓸 일 없는 당신의 힘을 달라.’라는 요청을 재차 들으니, 그야말로 털리는 기분이었다.
운명의 성좌는 묘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은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럴 겁니다. 음, 제가 밖에서 교황제를 비판할 때와 같은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아니, 이미 스트레스가 과하거든? 추가 비판은 사양하…….”
“안 됩니다.”
은혁은 차갑게 말했다.
누군가를 팰 기회가 있으면 마다하지 않는 것.
그 누군가가 성좌건 플레이어건 가리지 않으며, 염훈을 제외하면 예외는 없다.
“죄송하지만 운명의 성좌께서는 운명을 다루는 분이면서, 운명의 한계에 대해 너무 일찍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차라리 성좌 연합에 남아서 플레이어들을 좀 더 관찰했다면 지금과는 그 결과가 달랐겠지요.”
은혁이 운명의 성좌를 비판할 때의 논리는 교황제를 비판할 때의 논리와 비슷했다.
“즉, 플레이어와의 계약을 통해, 운명의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는 등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지요. 가령…….”
“가령 너와 성좌 계약을 맺는 경우를 말하는 건가?”
“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첫째 제안과 둘째 제안 중 하나 고르시죠.”
은혁이 물었다.
“……속아 넘어가는 기분이지만, 그래도 첫째 조건이 낫겠군. 너 같은 놈에게 모든 성좌의 권능을 넘기는 것은 아주 미친 짓이니까.”
“그것도 좋죠.”
“성좌 계약을 맺고 내 힘의 절반은 네게 줬을 때, 내가 얻는 이득은 뭔가?”
“음? 아까 말한 소원은 불만이십니까? 100층 정복 소원으로 영원히 잊혀서 사라지게 해드릴 수 있는데?”
“장난하냐? 100층 클리어의 소원은 소문일 뿐이잖아!”
운명의 성좌가 버럭 화를 냈다.
‘좋은 반응이군.’
은혁은 내심 속으로 웃었지만, 겉으로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 보십시오, 성좌여. 그럼 정말 원하는 걸 한 번 대놓고 말씀해 보세요.”
“계약을 하면 내 힘의 절반을 네가 가져가는 거였지?”
“네.”
“계약과 동시에 너는 이득을 보는 것에 반해, 나는 당장의 이득도 없고, 네가 100층을 클리어했을 때 내가 얻는 보상도 불확실하잖나?”
“저는 100층 클리어 시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 믿지만, 뭐, 전부 맞습니다.”
“좋아. 그럼 결정했다.”
확!
운명의 성좌는 병원 침대에서 일어났다.
물론, 실제 병원은 아니었지만, 그의 각오는 은혁도 느낄 수 있었다.
“너와 계약을 맺고 필요에 따라 힘을 빌려주겠다. 하지만.”
운명의 성좌의 눈이 이글거렸다.
“왠지 화가 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