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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모든 직업-400화 (400/434)

400화 : 운명의 사도가 되다

“호오? 왜죠?”

“왜긴! 너랑 대화하다 보니, 운명에 대한 회의를 넘어, 분노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나도 이 운명을 다루는 힘을 휘둘러야겠다~라는 생각이 드시나 보군요?”

“그렇다! 타인의 운명을 함부로 망가뜨리는 게 두렵고, 운명 자체가 지닌 한계 때문에 어둠의 장막 너머에 나 자신을 숨긴 게 한심할 지경이다!”

은혁 같은 존재도 멋대로 사는데, 정작 운명의 성좌인 자신이 스스로를 너무 빨리 한계 지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어둠의 장막 너머에 스스로를 봉인하다시피 한 상태이므로, 이제 와서 다시 뛰쳐나가 멋대로 깽판을 칠 수는 없는 일이지!”

“단, 플레이어와 성좌 계약을 한다면, 그 플레이어를 단말로 삼아 어느 정도 의지를 투사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거다. 그게 바로 성좌 계약이겠지. 아닌가?”

“맞습니다.”

‘후후.’

은혁은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평소에 권력욕이 없는 강자도, 극한의 이득충을 보면 없던 권력 욕구가 생기는 법!’

은혁은 운명의 성좌의 반응을 빠르고 정확하게 해석해 냈다.

“네가 나를 이긴다면! 계약하겠다!”

“엥?”

“뭐가 이상한가? 내 유일한 성직자가 되어 전권을 위임받는 건데? 당연히 그만큼 강해야 하지 않겠나?”

“제가 어려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많이 다치실 텐데?”

“덤벼라.”

“그러죠.”

[성좌 계약]이 발동 중일 때는 성좌가 함부로 플레이어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한다.

하지만 은혁과 운명의 성좌는 합의하에 이 대결은 예외로 두었다.

계약 과정의 일부였으므로.

그리고 둘은 싸웠다.

싸움은 1분 만에 끝났다.

털썩!

“어……?”

완전히 제압당한 운명의 성좌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싸워서 설득되는 거였으면 진작 싸울 걸, 시간만 낭비했군요.”

은혁 또한 묘하게 억울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어, 어째서지? 왜 너에게는 [운명 지배]가 안 통하는 거냐?”

“막상 당해 보니 예전에 시리우스가 쓰던 [확률 지배]랑 비슷하던데요?”

“아니, 성좌의 권능이…….”

“아니, 대단하긴 한데, 문제는 그게.”

“뭔데?”

“제가 너무 강하다는 거죠.”

은혁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믿을 수 없다!”

운명의 성좌는 그렇게 외치며 은혁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달려들면서 발동한 [운명 지배]는, 섬광이나 메시지 없이 즉각 발동된다.

은혁은 이미 [운명 지배]의 범위에 들어갔지만, 은혁은 그것을 미리 알고 스킬을 발동했다.

“[순간 망아] + [심연의 심장] + [스파이럴] 융합.”

-히든 이펙트 발동!

“퓨전 스킬 [운명 왜곡].”

우우우우우웅……!

은혁에게 작용하려는 [운명 지배]가 무효화되었다.

“이, 이럴 수가……!”

운명의 성좌는 망연자실했다.

“역시, 당신은 많이 약하군요.”

은혁은 약간의 실망감마저 비쳤다.

“성직자가 전혀 없는 성좌는 약할 수밖에 없죠. 더군다나 당신은 심연, 어둠의 장막 너머에 머물러서 그 어떤 플레이어와도 성좌 계약을 하지 않은 상태.”

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은혁은 고전했던 재난의 성좌를 떠올렸다.

재난의 성좌보다, 지금 운명의 성좌가 훨씬 더 약했던 것이다.

‘내가 압도적으로 강해진 것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많이 약해.’

“그, 교황제라는 자도 나만큼 약했나?”

“풉. 알긴 아는군요.”

“……그럼 나와 계약을 꼭 하려는 이유가?”

“당신 없이도 [운명 왜곡]을 쓸 수 있지만, 그래도 운명의 성좌와 독점 계약을 하는 건 필수입니다.”

은혁은 단지 더 강한 힘 때문에 운명의 성좌와 계약을 맺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회귀자로서, 운명 관련 보험(?)이 필요해.’

은혁은 99층에서 죽었고, 뮤비즈의 마정석을 통해 회귀했다.

그런데 다시 99층에 간다면?

‘지난번과 다른 루트로 가니까 저번처럼 똑같이 뮤비즈가 나온다는 보장이 없지만, 그래도 주의해야 한다.’

회귀자가 죽음의 원인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운명의 폭풍이 발생할지 모른다.

‘그런 예상치 못한 운명의 장난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운명의 성좌를 완전히 내 편으로 해야 한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은혁은 성직자 직업을 비워뒀고, 마침내 운명의 성좌를 힘으로 굴복시킴으로써 계약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럼 계약을 진행하죠.”

-운명의 성좌는 강은혁을 유일한 사도로 임명하며, 권능의 절반을 제공합니다!

-강은혁은 운명의 성좌를 대표하는 전권 대리인이 되며, 운명 앞에서 절대 굴복하는 일 없이 늘 떳떳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위의 계약 내용에 상호 동의합니까?

-YES/NO

“당연히 YES다.”

-성직자로서, 운명의 성좌와의 ‘성좌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급 직업 아직 계약을 하지 않은 성직자 → SSS+급 직업 운명의 성좌와 계약한 성직자

우우우웅……!

은혁은 심장이 작게 떨리는 걸 느꼈다.

별것 아닌 느낌이었지만.

‘운명의 성좌가 지닌 권능 그 일체가 내 몸에 들어왔다.’

반쪽짜리 권능 그 자체를 무기화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은혁의 행보에 도움이 될 터였다.

-성직자 패시브 스킬 [미완성 운명 저항]을 획득하셨습니다!

-성직자 스킬 [미완성 운명 지배]를 획득하셨습니다!

“에계, 주는 스킬은 이게 다입니까?”

성직자 스킬은 은혁이 혼자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게 한정되어 있고, 성좌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왜, 불만인가?”

“흐음, 좀 미진한 느낌이 들긴 하군요…….”

부여받은 스킬도 겨우 2개인 데다가, 테일러나 시리우스가 쓰던 스킬보다 위력이 특별히 더 강하다는 느낌도 없었다.

특별히 강해진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유일한 사도인데 좀 더 주시죠.”

“무슨 소리야? 내 힘의 절반을 줬구만. 사실, 스킬 가짓수가 중요한가? 그 위력이 중요한 거지?”

“쩝. 그렇게 말씀하시면 또 맞긴 한데.”

은혁은 아쉬움을 느끼며 계약을 마무리했다.

“이제, 죽지 마십쇼.”

“오냐. 네가 100층을 정복하고 그놈의 소원 100개인지 뭔지를 이루기 전까지는 살아남겠다.”

“후후…….”

“그럼 가라! 운명의 사도여!”

약해 빠진 운명의 성좌는 은혁에게 명령했다.

파앗!

은혁은 그림자의 궁전으로 전송됐다.

* * *

“아!”

“어떻게 됐소?”

그림자의 궁전에는 움브라, 체리, 어센션, 이경덕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 잘됐습니다.”

“딱히 바뀐 것 같진 않군요.”

움브라가 은혁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은혁은 그렇게 말했지만, 표정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그럼.”

은혁은 자기 몫으로 나온, 먼지 묻은 생명과 하나를 집어 들더니 이경덕에게 내밀었다.

“드시죠.”

“응? 이건 무슨 과일인가?”

“건강에 좋은 겁니다.”

“흠.”

노인은 별생각 없이 그것을 먹었다.

“으음?! 맛이 좀.”

“꼭꼭 씹어 드십쇼.”

은혁은 그렇게 말하고는 움브라에게 말했다.

“혹시 대련 신청 해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요청에 움브라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은혁이 이유 없이 싸움을 거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여긴 내 차원인데? 그리고 이 그림자 궁전은 심연의 힘과 맞닿아 있어서, 아무리 너라도 여기서는 이길 수 없단다.”

“으음…….”

“갑자기 대련을 요청한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말에 움브라는 피식 웃었다.

“역시 그냥 대련이 아니었구나. 플레이어들의 ‘계약 대결’ 같은 걸 요청한 거구나?”

“네. 사실 그렇습니다.”

은혁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지금의 저는 운명의 성좌의 힘을 이어받은 유일한 사도이기에 성좌와 거의 대등한 계약이 가능한 몸이 되었습니다.”

“후훗. 그래, 그렇지…….”

원래 움브라는 은혁이, 운명의 성좌에게 운명에 관한 질문만 하고 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예 성좌의 힘을 절반 흡수해 가지고 왔다.

움브라는 모르지만, 은혁은 재난의 성좌의 핵을, 염훈을 시켜서 반으로 쪼갠 뒤, 그 절반을 흡수한 바 있다.

‘운명의 성좌와 재난의 성좌의 힘을 반씩 흡수했다. 합치면 어엿한 일반 성좌의 격을 지닌 것에 가깝다.’

은혁의 격은 어지간한 성좌에 크게 밀리지 않아서, 성좌 연합을 향해 진지하게 자신을 성좌로 받아 달라고 해도 당장 거절당하진 않을 것이다.

“어디, 계약 대결을 한다고 치고, 한번 들어보자꾸나. 왜 나와 계약 대결을 원하는 거니?”

“첫째. 심연 전체를 장악할 필요가 있어서요. 움브라 님은 저를 많이 도와주셨지만, 저의 동맹이 된 것도, 부하가 된 것도 아니죠. 그러니 소속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체리가 화를 냈다.

“이런 무례한 것!”

“체리. 가만히 있으렴.”

움브라는 체리를 말렸지만, 그녀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둘째는?”

“제가 너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뭐?”

“힘을 시험해 볼 곳이 여기 말고는 딱히 없어요. 저는 올라가서 염훈을 도울 생각인데, 그, 힘 조절이 안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은혁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오직 심연만이, 그중에서도 그림자의 궁전인 이곳만이 제 힘을 완전히 개방할 장소인 것 같군요. 그래서 하필 여기, 하필 당신에게 대련을 요구한 겁니다.”

“도저히 못 참겠다!”

체리가 다시 나섰다.

“야!! 아까는 손님이니 예의의 조건이니 하면서 들어오더니! 뭔 시비를 거는 거얏!! 무례하기 짝이 없는 놈아!!!”

이번만은 체리의 말이 맞는지, 움브라도 가만히 있었고, 오히려 어센션이나 이경덕은 은혁을 타박했다.

“야, 이건 저 여자 말이 맞는데?”

“이보게, 강은혁 군! 손님으로 와서 대련을 청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데, 그런 무례한 말을 이어서 하다니. 어서 사과하시게.”

그러자 은혁은 피식 웃었다.

“더 잘된 거 아닙니까? 움브라 님께는 저, 예의 없는 놈인 강은혁을 처벌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후후. 정말 작정하고 덤비는구나?”

움브라는 흥미를 느끼더니, 비스듬히 섰다.

“좋아. 받아들이겠어.”

“움브라 님!”

체리가 막으려 했지만, 움브라는 고개를 저었다.

“강은혁의 말도 일리가 있단다. 운명의 성좌의 대리인으로서의 대결이라.”

그 순간.

-운명의 성좌가 이의를 제기합니다!

-강은혁의 대결 신청은 자신의 본의가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운명의 성좌는 이 상황을 보며 기겁하고 있으리라.

자신의 사도가 바로 위험에 스스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흠? 거기서 저 보입니까?”

어둠의 장막 너머라서 사도의 행동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운명의 성좌가, 권능의 절반이나 가졌으니 당연히 단말이 강하게 이어지는 건 당연지사 아니냐며 화를 냅니다!

“훅!”

은혁은 연기를 흩어내듯, 입김 한 번 불어서 시스템 메시지를 치워 버렸다.

시스템을 해킹하는 혼돈술사에서 규칙술사로 승급한 뒤로, 해피가 하던 짓 대부분을 은혁은 해낼 수 있었다.

움브라는 빙긋 웃었다.

“플레이어들처럼 계약 대결을 맺어볼까? 내가 이기면 얻는 게 뭐지?”

“운명의 성좌와의 계약을 취소하고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호오……?”

움브라의 눈이 검은 호수처럼 깊어졌다.

“정말이니? 없던 야심이 생기게 하는 말이구나.”

움브라는 모든 걸 버리고 인간이 되어 100층탑을 나가는 것을 꿈꿔왔다.

하지만 은혁의 제안은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가는 제안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군요. 제 몸을 뺏을 생각이시군요.”

“후후. 평소에 하던 몽상이지.”

은혁은 그림자를 지배하는 도적으로 시작해, 지금은 얼티밋 로그까지 승급한 상태.

일반 플레이어가 [그림자 왕국] 스킬까지 개발해 낸 경우는 전무하다.

바꿔 말하자면, 모든 플레이어 중 움브라의 그림자에 가장 가까운 존재.

만약 은혁이 패배하여 말 그대로 움브라에게 모든 걸 바치는 노예가 된다면, 플레이어 자격과 몸과 정신까지 전부 뺏어서 사용하는 게 가능해진다.

‘100층탑을 나가는 것도, 100층을 정복하는 것도 가능해지겠지?’

움브라는 꿈꾸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좋아! 하겠어!”

“제 조건을 듣지도 않고요?”

“후훗. 보나 마나 같은 조건이겠지?”

“비슷합니다. 제가 이기면, 움브라 님은 정식으로 저의 부하가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안 됩니다!”

체리가 또다시 말리려 했다.

“후훗. 체아트리. 또 끼어드는 거니?”

“절대 저 제안을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주인님!”

“체아트리, 너의 충심을 높이 사며, 자유를 주겠다.”

파앗!

움브라의 부하였던 체리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

“평생 내 잔심부름만 해온 너였지. 하지만 나는 네게 거래와 수집의 재능이 있는 걸 안 단다.”

“아, 주인님…….”

“너는 그동안 내 다락방을 잘 관리해 왔지. 다락방의 소유권을 통째로 넘기겠다.”

“주인님!”

“지금부터는 자주적인 ‘비밀 상점의 성좌’가 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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