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 미치오와의 협상
“후후후.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이유로, 제가 총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100층탑의 끝을 가까이서 지켜볼 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염훈으로서는 더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였지만, 대화 당사자인 은혁은 곧 깨달았다.
“끝이 다가왔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솔직히, 패왕이 탄생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패왕이 저를 메신저로 쓸 줄도 몰랐죠. 아, 이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패왕의 전언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듣죠.”
“당장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100층탑의 최종벽을 부수고 나가서 지구를 멸망시키겠다더군요.”
* * *
총관리자의 대사관.
그곳에 은혁, 염훈, 미치오, 총관리자가 모였다.
“……정말 안 죽었나 보군.”
미치오가 은혁을 보며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미치오의 겉모습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어서, 정말로 패왕이 된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은혁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엄청 강하네?’
급속도로, 비정상적으로 강해져서 돌아온 지금의 은혁과, 거의 6 대 4에 가까울 만큼 미치오는 강해져 있었다.
‘물론 내가 6이고, 미치오가 4지만.’
여전히 은혁이 우위에 있었지만, 미치오가 급격히 강해졌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패왕에 대해서는 심연의 어둠으로 알아낸 정보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나.’
유심히 보니, 패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새로운 능력을 몇 가지 얻은 듯했다.
그중 가장 이질적인 것이 바로 ‘운명치 채무’였다.
은혁이 심연의 힘을 다루듯, 패왕이 된 미치오는 운명치 채무를 힘으로 쓸 수 있었다.
‘신기하군. 운명치 채무는 운명치와는 달리, 없어야 좋은 건데. 그걸 새로운 힘으로 삼다니.’
은혁은 자신이 지닌 강력한 힘인 [미확인 운명 지배]와 상극의 힘이 아닐까 추측했다.
‘아니, 그보다 한 플레이어가 저토록 많은 운명치 채무를 지는 게 가능한가?’
은혁은 알지 못했지만, 미치오가 패왕이 되기 직전, 카인과 인치가 쓰러지면서, 미치오는 그 둘의 운명치 채무를 떠안았다.
미치오는 카인과 인치가 부당하게 운명치를 활용해 온 업보로서의 운명치 채무를 새로운 무기로 활용할 수 있었고, 새로운 종류의 힘이었기에 은혁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미치오 또한 은혁을 무심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역시 강하군. 일대일로 싸우면 내가 질 것 같군.’
미치오는 은혁을 한 수 높게 쳤다.
이 또한 정확한 평가였다.
은혁은 수많은 실전을 겪으며, 자신의 힘이 급성장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반면에 미치오의 경우에는 초창기 플레이어로서의 이득을 선점하고, 70층~89층에 오래 눌러앉아 있다가 이번에 갑자기 패왕이 되었다.
급성장 적응력이 부족하므로, 순수한 힘 자체가 비슷해도, 미치오가 더 약하다고 봐야 한다.
“아주 재미있는 협박질을 하셨던데?”
은혁이 묻자 미치오는 피식 웃었다.
“아아, 오늘 너희가 이 회담장에 안 왔다면, 지구를 멸망시켰을 거다.”
지금의 미치오는 [공간 지배]를 넘어, 차원마저 지배할 수 있었다.
당장 차원의 문을 열어 100층탑 밖으로 나가는 게 가능한 수준이다.
“요구 조건은 뭐지?”
지구를 인질 삼아 항복을 요구할 경우, 은혁과 염훈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 자리에서 미치오를 죽이려 할 것이다.
하지만 미치오 또한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었다.
“오해하지 마라. 내가 지구를 가지고 협박한 것은, 네가 날 무시하고 위로 올라가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이니까.”
염훈이 12개 층을 정복하며, 군주 미션을 클리어했다.
은혁과 염훈은 미치오를 무시하고 90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것을 막기 위해, 미치오가 협박을 하게 된 것이다.
“내 요구 조건은 나와 대결을 벌이자는 것이다.”
“음? 의외군.”
은혁은 씨익 웃었다.
그러자 미치오가 손을 내저었다.
“당장 우리끼리 싸우자는 게 아니다. 그 반대다.”
“대결이라면 보통 싸우는 거 아니었나? 뭐랑 싸우자는 거지?”
“계약 대결을 준비해 왔다. 보고서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해라.”
<계약 대결>
-목표 : 강은혁과 미치오는 파티를 맺고, 천상황제 레이드를 함께한다. 당연히 강은혁과 미치오는 레이드 중에는 서로를 공격할 수 없다.
두 사람 중 천상황제를 먼저 처치하는 쪽이 승리.
-조건 : 제삼자의 참가는 금지.
-강은혁이 이기는 경우 : 미치오는 강은혁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미치오가 이기는 경우 : 강은혁은 미치오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어떤가……?”
“흥미롭군.”
은혁은 계약 대결 내용을 훑어보았다.
“다만 천상황제 레이드가 구체적으로 뭔지 안 나와 있는데.”
“아, 그거라면 제가 보여드리죠.”
총관리자가 나서서 미션창을 띄워 줬다.
<패왕 전용 히든 미션 : 천상황제에의 도전>
-목표 : 천상황제를 쓰러뜨릴 것.
-개요 : 패왕은 원할 때, 원하는 장소에 천상황제를 소환할 수 있다.
-성공 시 보너스 : 90층~99층 구간을 ‘베리 이지’ 모드로 진행할 수 있다.
-실패 시 페널티 : 패왕 자격의 영원한 상실.
-제한 시간 : 1년.
“흠.”
은혁도 천상황제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최소한 플레이어나 관리자가 과거에 진행했거나 진행 중이어야 관련 정보가 심연에 흘러내려온다.
하지만 천상황제는 그 누구도 도전해 본 적 없는 존재였기에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아니, 하나는 안다.’
총관리자의 태도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
그것은 이 미션의 난이도가 극도로 어렵다는 것.
‘천상황제 클리어 시 얻을 수 있는 베리 이지 난이도 모드는 미끼일 뿐이야. 그전에 반드시 죽을 거다.’
아마 이 사실을 미치오도 추측할 수 있을 터.
그럼에도 미치오가 이 미션을 가지고 은혁에게 도전을 제안한 데에는,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은혁에게 질 바에는, 완전히 판을 흔들어보자는 의도가 더 클 것이다.
“총관리자님이라고 했나요?”
염훈이 총관리자를 보며 물었다.
“후후. 그렇습니다.”
“몇 가지 질문 좀 해도 될까요?”
“아, 물론입니다.”
“왜 말리지 않습니까?”
“뭐를, 누구를 말입니까?”
“미치오가 지구를 멸망시킨다고 대놓고 협박했을 때, 왜 말리지 않았죠?”
“음? 그거야 미치오 플레이어의 마음이지요.”
“아니, 윤리적인 문제를 떠나서, 지구인이 모두 죽으면, 더 이상 플레이어 유입이 없어질 텐데?”
“두 가지 이유에서 괜찮습니다. 첫째, 그렇게 예비 플레이어가 전멸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운명적인 귀결이니 괜찮겠지요. 둘째, 여러분이 여기까지 올라온 이상, 100층탑의 끝은 지척입니다. 지구상의 인류가 전멸해도 큰 문제는 없으니 괜찮을 겁니다.”
“…….”
염훈은 화가 나서 추궁했다.
“역시, 당신네들은 지구인이 아닌 거군.”
“하하! 우리의 외모가 인간이라서 당연히 지구인이라고 여긴 것인가 보군요. 뭐, 당신이 아는 그런 지구인은 아닌 게 맞습니다. 단, 우리들 관리자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고, 자세히 밝히는 건 금지되어 있으니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구인도 아니면서, 도대체 왜 지구에 100층탑을 만들고 우릴 시험하는 거지?”
“후후……. 원래는 이것도 미리 알려주면 안 되지만, 특별히 말씀드리죠. 그것이 초월자들의 뜻이니까.”
“초월자? 성좌나 신화급 드래곤, 지고의 위상 같은 존재 말인가?”
“후후……. 글쎄요.”
총관리자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자. 두 분, 결정하시죠.”
“흠, 당장 결정해야 합니까?”
그 말에 총관리자가 미치오를 바라봤다.
미치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중재는 총관리자가 맡기로 했다. 총관리자인 네가 결정할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30분 이내에 답을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잠깐 염훈과 단둘이 대화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은혁과 염훈은 밖으로 나갔다.
* * *
“어떻게 할 생각이야?”
염훈이 은혁에게 물었다.
“나는 받아들이고 싶어.”
“왜?”
은혁에게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지만, 일단 표면적인 이유로 대답했다.
“베리 이지 모드가 솔직히 끌리거든. 천상황제의 난이도가 어떻든, 일단 클리어만 하면 그 뒤가 대폭 쉬워지니까.”
“이름만 베리 이지고 사실은 반대로 막 어려울 가능성은?”
“좋은 지적이군. 그것도 총관리자에게 물어보고 확약을 얻어야지.”
“근데 좀 의외군.”
“뭐가?”
“우리는 지금까지 가장 힘든 코스만 골라서 오지 않았어? 그런데 막판에 쉬운 길을 가기 위해, 가장 힘든 길을 고르게 되다니.”
“그야, 초창기 때는 힘든 길이 가장 보상이 컸으니까.”
은혁이 일부러 어려운 루트만 골라서 진행한 것은, 빨리 강해지기 위해, 더 좋은 보상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90층에 올라갈 권리까지 얻은 상태.
염훈도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바뀐 건 없네. 가장 어려운 천상황제 레이드를 클리어해서 쉽게 가려는 거니까.”
“그렇지. 다만 이전과는 다르게 좀 아쉬운 점이 있는데…….”
“우리가 함께하지 못하고, 너 혼자 미치오와 함께해야 한다는 것 말이지?”
“맞아. 그게 좀 걸리긴 해.”
은혁과 염훈은 함께 힘든 일을 해쳐 나왔다.
물론, 은혁이 훨씬 더 주도적으로 행동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강적을 상대로 염훈 없이 행동해야 한다.
‘뭐, 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리고 염훈에게 시킬 일이 있었다.
“염훈, 카인과 인치와 그들의 부하들을 모두 길드연합국 소속 플레이어로 만들 수 있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필요하다면 다른 길드장들이나 교황제의 힘을 빌려서라도, 세뇌를 해서라도 빠르게 그들을 복속시켜 줘.”
“왜 그렇게 서둘러?”
“내가 천상황제 미션을 클리어한 뒤에 발생할 돌발 상황을 막기 위해서지.”
90층부터는 정말로 성좌, 지고의 위상, 드래곤의 영역이다.
이 세 존재를 묶어서 보통 ‘3대 파벌’이라 부른다.
심심한 칭호지만, 바꿔 말하자면 별다른 추가 칭호가 필요 없는 최강의 집단들.
그들이 어떤 돌발 상황을 일으킬지는 회귀자인 은혁도 모른다.
은혁이 회귀 전 90층~99층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행운에 가까웠다.
‘베리 이지 모드의 경우는 더 쉽겠지만, 그래도 더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은혁은 염훈에게 89층 이하의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장악하길 요구하고 있었다.
“좋아. 그 일은 내게 맡겨.”
“부탁한다.”
결정을 내린 은혁이 다시 총관리자에게 다가갔다.
“호오,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베리 이지 모드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요. 무슨 함정이나 속임수가 있는 건 아니겠죠?”
“하하! 미션 관련 내용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은혁은 미치오를 바라봤다.
“미치오.”
“뭐냐.”
“너와 나, 둘 중 한 사람이 천상황제를 쓰러뜨리는 경우, 그 혜택은 우리 둘 모두에게 적용되는 거겠지?”
“물론이다. 파티를 맺었으니, 그리고 [계약 대결]의 힘으로, 이중으로 보장된다.”
그 말은 들은 은혁은 결론을 내렸다.
‘도박이다. 회귀 지식이나 심연에서 빨아들인 데이터를 이용할 수도 없는 도박.’
“계약 대결을 받아들이면, 언제 시작되지?”
“나로서는 즉시 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우린 넓은 영토를 정복하는 데 성공해서 말이지. 시간은 좀 넉넉히 필요해.”
그러자 미치오는 총관리자를 바라봤다.
“총관리자에게 맡겨야겠군.”
“흠. 저도 너무 질질 끄는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정복지 관리는 성황제 염훈 님이 할 일 아닙니까?”
“나는 녀석을 도와야 하고, 솔직히 나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하거든? 미치오는 패왕이 되었으니 더 업그레이드가 필요 없겠지만.”
“그럼 3일 드리죠.”
“3일이라…….”
은혁은 약간 아쉬웠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좋습니다. 그럼 미치오의 제안을 받아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