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화 : 90층으로.
* * *
-90층 : 중앙 항성 관측소.
파앗!
은혁과 염훈은 게이트를 통해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방이었다.
우우웅…….
무언가가 걷히는 듯하더니, 무수히 많은 별이 드러났다.
검은 방은 사실 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입방체였다.
가리고 있던 막이 걷히고, 다차원성계의 드넓은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아……!”
꽤 가까운 곳에 ‘중앙 항성’이 있었다.
이론상 무한하다고 알려진 다차원성계의 상징적인 기준점이다.
지고의 위상, 드래곤 컬트, 성좌 연합은 중앙 항성계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여 왔고, 비교적 최근 중립 영역화 하는 일에 동의했다.
대신, 멀리 떨어진 다른 영역에서 더욱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우우우웅……!
번쩍……!
파바바박……!
km 단위로는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머나먼 곳에서, 신적 존재들과 그 수하들이 격돌하는 것이 보였다.
지구보다 거대한 행성을 두고 다투는 모습.
무의미한 돌조각처럼 보이는 비석을 두고 외교전을 벌이는 모습.
차원 간 충돌로 인해 한 종족이 멸종할 때의 빛무리 등등…….
“60층~69층을 돌파할 때 보긴 했지만, 이렇게 보니 다차원성계가 매우 거대하구나.”
염훈이 중얼거린 순간.
-노멀 모드에 진입하셨습니다!
-설명을 원하십니까?
-YES/NO
“물론 YES다.”
은혁이 대답했다.
-90층부터 99층까지는 일반적으로, 이지, 노멀, 하드의 난이도로 구성된 층입니다.
-군주 메인 미션을 클리어하고 오신 두 플레이어께는 노멀 난이도로 미션이 진행됩니다.
<노멀 난이도 90층 메인 미션 : 파벌 고르기>
-목표 : 성좌 연합, 지고의 위상, 드래곤 컬트의 3대 파벌 중, 원하는 파벌을 선택할 것. 나머지 두 파벌은 적대적 관계로 전환이 되며, 레이드, 전면전, 대결 등으로 승부를 벌여야 한다.
-성공 시 보너스 : 선택한 파벌의 도움을 1회에 한해 요청 권리 획득.
-실패 시 페널티 : 없음.
-제한 시간 : 60분.
“파벌을 고르라고?”
염훈이 중얼거린 순간.
-드래곤 컬트의 전권 대리인이 나타났습니다!
-지고의 위상, 108회의 전권 대리인이 나타났습니다!
-성좌 연합의 전권 대리인이 나타났습니다!
일렁이는 영체 형태의 존재 셋이 은혁과 염훈 곁에 나타났다.
본래 모습으로 나타나기에는 이 공간이 좁았기에, 그리고 너무 위압적이기에 일렁이는 영체 형태로 나타난 듯했다.
스르륵.
두 사람 곁에 다가오려 했으나, 세 존재는 무언가에 막힌 듯 더 다가오지 못했다.
-이제부터 60분 이내에, 이들과 대화를 나눈 뒤 어떤 파벌을 택할 것인지 선택하셔야 합니다.
-각 파벌의 제안을 들어 보실 수 있습니다.
-어떤 파벌의 제안부터 들어 보시겠습니까?
은혁은 과거를 떠올렸다.
‘확실히 노멀 모드가 이지 모드보단 빡빡하군.’
이지 모드에서는 원하는 파벌을 둘 고르고, 원치 않는 파벌을 하나 고르는 방식이었다.
덕분에 은혁은 회귀 전, 성좌 연합과 드래곤 컬트를 고르고, 나머지 지고의 위상을 적대시하면 됐었다.
하지만 노멀 모드에서는 원하는 파벌을 하나만 고를 수 있었으므로, 다른 둘을 적대적 관계로 돌리게 된다.
은혁은 염훈을 바라봤다.
“염훈.”
“어?”
“어떤 파벌이 마음에 드냐?”
“일단 지고의 위상 쪽은 좀 거부감이 들고…… 드래곤 컬트랑 성좌 연합은 좀 모르겠는데?”
“뭐, 그게 보통이겠지. 하지만 아직 세 집단의 입장을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지?”
“음…… 듣고 보니 그러네.”
“이번 기회에 한번 제대로 들어 보고 결정하자. 어때?”
“그래. 그게 좋겠네.”
염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스템에 선언했다.
“그럼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지고의 위상들의 의견부터 들어보겠다.”
마음에 안 드는 집단의 의견부터 우선 들어 주겠다는, 염훈 나름의 공정함이었다.
스르륵.
다른 두 영체가 물러나고, 하나만 다가왔다.
-지고의 위상측 대리인이 나타났습니다!
“반갑소, 두 분. 나는 지고의 위상을 대표하기 위해 나온 지고의 위상, ‘대화하는 자’ 코루민트라고 하오.”
은혁과 염훈은 더 말해 보라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코루민트는 웃었다.
“그동안 우리 지고의 위상들과 많이 싸워 오신 걸로 아오.”
“그전에 질문 있는데요.”
염훈이 손을 들었다.
“오, 하시오. 뭐든지.”
“도대체 왜 ‘지고의 위상’이라고 불리는 겁니까? 여태 궁금했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아, 그거 말이군. 그야 그 용어만큼 우리들의 역사와 위치를 잘 나타내는 표현이 없기 때문이오.”
“역사와 위치?”
“우리는 차원의 태곳적 혼돈과 함께 살아온 존재로서, 말하자면 다차원성계의 원래 주인이지.”
“헐, 생긴 건 막 외계에서 온 괴물 종족처럼 생겼는데…….”
“그거야 미의식의 차이요. 우리들의 눈에는 이족 보행 하는 1.8미터 내외의 여러분이 도리어…… 후후.”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역사는 그렇다 치고, 위치는?”
“아, 그런 우리들이었으나, 초월자의 등장과 함께 모든 게 바뀌었소. 이 초월자라는 존재의 정체는 우리도 감히 짐작하지 못하오. 하여간, 이 초월자는 자신의 대리인인 ‘관리국’을 이용해 100층탑이라는 시험의 장소를 만들고, 우리를 이곳에…… 흐음…… ‘초대’하였소.”
지고의 위상 코루민트가 음험하게 웃었다.
“이 부분에서 귀하께서는 우릴 비웃어도 좋소. 당연히 우리가 시험의 대상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소. 진짜 시험의 대상은 여러분, 인류라고 하는 종족이었지.”
코루민트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문제는, 당시 100층탑 내부는 아직 완공조차 아니었고, 인류라는 존재는 아직 100층탑 내부에 존재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는 거요. 더욱 큰 문제는, 우리만큼이나 강력한 성좌들, 드래곤들의 존재였지.”
“설마, 패를 나누고 싸운 겁니까?”
“어쩔 수 없었소. 운명치라는 개념이 우리를 복속했으니까. 설명을 하려면 100층탑의 ‘층’이라는 것을 설명해야겠군. 층은, 100층탑 관리국이 임의로 나눈 상징적인 구간으로서, 차원 준위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강력한 존재일수록 높은 곳에 머무르도록 강요하오.”
그러자 은혁이 말을 받았다.
“정말 강력한 존재는 90층 이상에 머물러야겠군요.”
“그렇소. 예외가 있다면 주변부 차원이지. 그 주변부 차원들 또한 사실은 90층~99층의 힘을 일부 끌어다 쓰는 거요.”
해피나 다른 랭커들은, 90층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드래곤 컬트의 녹룡파나 흑룡파의 차원, 또는 성좌가 만든 미션용 차원에 도전하러 가곤 했다.
40층~42층 구간이나, 다른 히든 루트를 통해 주변부 차원으로 쳐들어가는 편법 덕분이다.
“하여간, 90층~99층은 성좌 연합, 드래곤 컬트, 그리고 우리들, 지고의 위상들이 세력을 겨루는 전쟁터가 되었소. 물리적인 공간은 무한에 가깝다고 하나, 영향력, 운명치, 피지배 종족, 기타 희귀 자원 등은 한정되어 있으니 패권을 겨룰 수밖에.”
“누가 이겼나요?”
“가장 높은 층을 장악한 이들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우리요. 지고의 위상들이지.”
코루민트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들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우리들끼리 싸움이 일어났다는 것도 말해야겠군.”
“폭식의 시대.”
은혁이 끼어들어 말했다.
“음. 그것도 알고 계셨군. 맞소. 한마디로, 우리끼리 잡아먹은 시대지. 폭식의 시대가 끝났을 때는 많은 지고의 위상이 죽고, 108체의 아주 강력한 지고의 위상만 남았소. 나머지 대다수는 ‘몰락한 지고의 위상’이 되어, 진정한 힘의 절반 이하를 지닌 채 낮은 곳으로 사라졌소.”
모든 몰락한 지고의 위상이 폭식의 시대 때문에 낮은 곳으로 떠난 것은 아니다.
일부는 허무함이나 권태 때문에 스스로를 반쯤 봉인시키기 위해 떠났고, 일부는 반대로 인간에 대한 관심 때문에 스스로를 몰락한 지고의 위상으로 만들었다.
“하여간, 90층~99층에 남은 이들 중 가장 높은 층을 차지하고 있는 쪽이 바로 우리들, 지고의 위상이라는 점만은 강조하고 싶구려.”
“아하, 말 그대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높은 층을 지배하고 있어서 지고의 위상이라 불리는 거군요?”
“그런 거요.”
긴 설명 끝에, 왜 지고의 위상이라 불리는 것인지와 90층~99층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설명 들었다.
“궁금한 게 더 있는데요.”
“뭐든지 물어보시오.”
코루민트로서는 질문이 많을수록 좋았다.
그만큼 대화가 통할 가능성, 설득될 가능성이 커지니까.
하지만 염훈도 호락호락하진 않아서, 쉽게 마음을 열진 않았다.
“왜 지고의 위상들 중에는 사악한 존재가 많은 겁니까?”
“사악이라. 그럼 묻겠는데, 식사는 사악한 행위요?”
“엥?”
“인류도 다양한 동식물을 먹잖소. 지고의 위상들도 뭔가를 섭취할 뿐.”
“아니, 막 기괴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잡아먹지 않습니까?”
“인간도 닭을 닭장에 가두어 강제로 살찌운 뒤 잡아먹지 않소? 의약품의 효과를 분석하기 위해 작은 설치류 동물에 대고 실험하지 않소? 지고의 위상들 중에도 피를 얻기 위해 인간을 사육하거나, 마법적인 실험을 하는 존재들이 있긴 하오. 단, 내가 볼 때는 비슷하게 여겨지오만.”
코루민트의 지적에 염훈은 말문이 막혔다.
코루민트는 덧붙였다.
“지고의 위상이 딱히 인간만 잡아먹거나 실험하는 건 아니오. 인류가 닭만 먹는 게 아니라, 돼지, 소, 곡물, 과일 등을 골고루 먹는 것처럼. 아마 그대가 인간이기에, 지고의 위상이 인류를 잡아먹거나 괴롭히는 일에 민감한 모양이군.”
“…….”
“인류의 관점에서 보면 지고의 위상이 기괴하고 잔혹한 괴물들일 수 있소. 하지만 돼지나 실험용 쥐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인류가 괴물이고, 우리 지고의 위상은 선량한 관찰자일지도 모르지. 답변이 되었소?”
“으음…….”
염훈은 조금 당황해 버렸다.
선악의 기준이 살짝 흐려진 것 같았다.
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신념이 흔들리는 것 같냐, 염훈?”
“조금……?”
“도덕이라는 게 원래 그래. 자신이 속한 집단에 따라 확 바뀌기도 하지. 뭐,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냐.”
은혁은 이미 운명까지 조작하는 게 가능했고, 무엇보다 회귀자인지라 도덕에 그리 얽매이는 일이 없었다.
‘다만 입장 차이라는 건 분명히 있지.’
은혁은 염훈을 위해, 코루민트에게 조금만 따져 주기로 했다.
“도덕에 관한 입장이 다르다면, 대화를 통해 도덕을 조율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고의 위상 측은 그런 적이 없지요.”
“음…….”
“설마 또 돼지나 닭의 비유를 쓰신다면, 돼지나 닭은 도덕에 관한 대화라는 상호 작용을 나눌 수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인간이 돼지 도축하듯, 지고의 위상도 인간을 도축한 거임~이라고 자꾸 주장하신다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대화는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
“후후. 도덕과 입장에 대한 대화는 이쯤 하고, 실리적인 부분으로 들어가 보죠. 당신네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이득은?”
“음, 그게 좋겠군.”
코루민트는 줄 수 있는 보상 목록을 허공에 띄웠다.
-최고급 힐링 포션 5만 개.
-최고급 마나 포션 5만 개.
-9성급 무기 초차원 진공포 1개.
…….
…….
-끝없는 탐식의 저주 주문서 1개.
-대지와 투쟁하는 자, 올브린쿠스 소환권 3개.
-즉시 부활의 룬 2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