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 93층의 대결 (1)
예상치 못한 요구를 들은 은혁이 어이없어했다.
“네?”
“이 둘, 블릿츠 데바와 아브러스 플레임은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 만약 네가 이 둘에게 사죄한다면, 이 둘은 너를 죽이려 들지 않을 것이다.”
“……엄청 신기한 요구군요.”
은혁은 어이가 없었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인간의 군주도 모욕을 준 상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데, 이는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군주로서의 명예와 권위를 지키는 문제다.
여러 성직자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아야 할 성좌로서는 더욱 명예에 민감할 터.
그래서 공개적으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다.
“차라리 날 죽여 없애는 게 화풀이로는 더 낫지 않겠습니까?”
은혁이 도발하듯 묻자, 기아치오가 차갑게 웃었다.
“강은혁. 이것이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님을 알 것이다. 게다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 터.”
“그 말씀은 힘의 격차가 이미 제 쪽이 훨씬 위라는 것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그래, 강은혁. 이 둘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너는 최상급 성좌보다 더 강하지.”
화르르륵!!
빠지지직!!
기아치오의 냉소적으로 인정하는 말에, 아브러스 플레임과 블릿츠 데바가 항의하듯 신력을 내뿜었다.
“웃…….”
염훈은 침음성을 흘렸다.
화염, 번개, 냉기의 성좌는 다른 성좌들보다 플레이어와 밀접한 성좌들이었고, 본체로 현현할 경우 무척 강할 게 뻔했다.
하지만 은혁은 피식 웃을 뿐.
“마저 말씀해 보시죠.”
“하지만 내가 가세하면, 너는 최상급 성좌보다 훨씬 강한 적을 상대해야 할 거다.”
“훨씬 강한 적?”
“원소의 성좌.”
원소의 성좌는 최상급의 격을 넘어서는 존재로, 관리국이 100층탑 안에 잡아두지 못했을 정도의 존재.
우주가 태초에 생겨났을 때의 존재에 가까워서, 진명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상위급 성좌 이상부터만이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과연. 화염, 번개, 냉기의 성좌들이 힘을 합쳐야만 강림시킬 수 있는, 규격 외의 성좌라. 대단하군요.”
은혁이 감탄했다.
하드 난이도에 걸맞은 시련이다.
기아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셋을 따로 상대한다면 네가 이기겠지. 그러나 너라고 해도 원소의 성좌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이긴다 해도 너는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터.”
“하지만 그 원소의 성좌를 불러내는 게 말처럼 또 쉬운 일은 아니죠?”
“그렇긴 하다. 원소의 성좌를 잠시 소환한 것만으로, 우리 셋 또한 자아를 잃게 될 가능성이 크지.”
“후후. 그렇다면 역제안이 있습니다.”
“뭐지?”
“선공을 양보해드릴 테니, 차례대로 한 명씩 덤비십시오.”
“오만하군. 성좌를 상대로 선공을 양보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사실상 그냥 맞아주겠다는 것 아닌가?”
“흠. 꼭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선공을 양보해도 막을 자신은 있어서.”
“…….”
기아치오는 가만히 은혁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훗.”
“훗?”
“너, 원소의 성좌를 두려워하는군.”
“이런, 티 많이 났습니까?”
은혁은 최대한 오만한 척 역제안을 했지만, 사실은 원소의 성좌와 싸우는 걸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와 싸우는 건 기왕이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는 없을 겁니다.”
“왜지?”
“말은 당신 혼자 하지만, 결정은 셋이 다수결로 결정하는 거죠?”
은혁은 싱긋 웃으며, 기아치오 뒤에 있는 성좌 둘을 가리켜 보였다.
화르르르르……!!
빠지직! 빠지지지직……!!
아브러스 플레임과 블릿츠 데바는 당장이라도 은혁의 제안을 받아들일 기세였다.
기아치오 또한 쓴웃음을 지었다.
“결정되었군.”
“순서는 어떻게 할까요?”
“그건 우리들이 알아서 정하겠다.”
“좋습니다. 단, 제한 시간은 제가 정하죠. 한 분당 1분으로.”
“조금 짧군.”
“어차피 저는 [시스템 해킹 2.0]으로 제한 시간을 쉽게 조작 가능합니다. 1분. 싫으면 관두시죠.”
“후후. 좋다. 그럼 한 가지 더. 아니, 두 가지 조건이 더 있다.”
“들어보죠.”
“당연하지만 네 동료는 이 싸움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싫음.”
염훈이 끼어들며 말했다.
은혁이 얼른 다시 끼어들었다.
“아,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블릿츠 데바와 아브러스 플레임을 상대하고, 마지막에 염훈과 당신이 싸우는 건 어떻습니까?”
“좋다. 단, 3판 2선승제가 아니라, 반드시 싸우는 규칙이다.”
“흠, 그러시죠. 마지막 조건은?”
“네 무기의 최종 형태를 쓰지 않는 거다.”
“아, 세븐 칼리버 제7형태요?”
은혁이 묻는 순간.
정적.
일순간이지만, 분노를 참으려 애쓰던 아브러스 플레임과 블릿츠 데바마저 흠칫했다.
“……그렇다. 그 무기를 쓰지 말라는 거다.”
기아치오는 세븐 칼리버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듯했다.
“왜요? 인공 항성 창조 때문에 놀랐습니까? 하핫!”
“그것 때문에 놀랐다기보다는, 그걸 너무 쉽게 해낸 것 때문이지.”
“후후. 역시 성좌 분들은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반면에 너는 너무 강력한 것을 만들어 냈다…….”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은혁과 기아치오는 알고 있었다.
‘세븐 칼리버 제7형태인 블랙 스타는, 성좌도 우습게 죽일 수 있다.’
성좌는 말 그대로 ‘별’에 거하는 좌.
은혁의 항성 흡수와 재생성은 무기 업그레이드 과정에서 생긴 퍼포먼스가 아니라, 압도적인 위력 과시다.
“좋습니다. 세븐 칼리버 제7형태는 안 쓰겠습니다.”
“……조심하라. 그 무기는 너무 강력하다. 성좌나 지고의 위상, 드래곤보다 더욱.”
“명심하죠.”
“그럼 미션창을 띄우겠다.”
<93층 메인 미션 : 성좌와의 연속 대결>
-목표 : 강은혁 혼자서 기아치오, 블릿츠 데바, 아브러스 플레임을 상대로 싸워서 이길 것.
단, 강은혁은 싸움이 시작할 때 선공을 양보해야 한다.
-성공 시 보너스 : 없음.
-실패 시 페널티 : 죽음.
-제한 시간 : 각 대결당 1분.
“어떤가?”
“다 좋은데, 무승부가 되면 어떻게 하죠?”
“흠……? 무승부라.”
기아치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간해서는 무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한 시간이 1분인 경우, 오히려 블릿츠 데바와 아브러스 플레임이 전력을 다할 게 뻔했으므로.
“무승부일 가능성은 작지만, 양보하지. 그 경우에는 네가 이긴 걸로 하겠다.”
“저야 좋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물러나도록 하지.”
파앗!
염훈과 두 성좌가 사라지고, 블릿츠 데바만이 은혁의 앞에 나타났다.
“내가 먼저 하도록 하지.”
“오랜만입니다, 블릿츠 데바.”
“우리가 인사할 사이는 아닐 것이다. 강은혁.”
“설마요. 브라이언은 제 교육 덕분에 사람이 되었으니, 제가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하지 않나요?”
“도발을 유언으로 삼는 건가? 더는 못 들어주겠다!”
빠지지직!
블릿츠 데바가 화신의 형태를 벗어 던지고 본래 형상으로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제한 시간 1분이 카운트되기 시작했다.
-죽어라!!
빠지직!!
단순하고 강력한 뇌격이 은혁의 미간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사이오닉 필드].”
파악!
정전기가 고무 막에 닿았을 때처럼 쉽게 막혔다.
은혁은 빈정거렸다.
“모처럼 선공권을 양보했는데 이렇게 대충 날려도 됩니까? 이제부턴 저도 제대로 합니다?”
-오만한 놈!
화악!!!
빠지지지지직!!!
뇌전의 광구가 생성되고, 그것이 방 전체를 튀기기까지는 0.0001초 남짓의 시간만 걸렸다.
하지만 은혁은 그 초고속의 전격이 무색하게, 전부 피했다.
-뭣……! 어디냐!
대답은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낚싯바늘이 차원의 문을 열고 날아왔다.
쉬익!
타악!
블릿츠 데바의 몸에 걸리더니, 통째로 끌어당겼다.
작았던 차원의 문은 넓어지고, 블릿츠 데바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금속의 차원에 잘 오셨습니다!”
그 어딘가는 금속의 차원이었다.
금속의 도시 한복판에 떨어진 블릿츠 데바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랬군.
미션창에, 꼭 93층에서 싸워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다.
은혁은 자신에게 유리한 곳으로 도망친 뒤, 블릿츠 데바를 끌고 온 것이다.
“요격하라!”
어느새 금속의 신이 된 메탈 서전트가 외쳤다.
투투투투투투……!
가속된 금속 포탄이 사방에서 블릿츠 데바를 향해 쏟아졌다.
-까불지 마라!!
콰쾅!!!
뇌전을 사방에 뿜어대자, 금속이 광전자를 튀기며 순식간에 녹았다.
-강은혁은 어디 있느냐!!
“계속 쏴라! 쏴!”
-이깟 것에 당할까 보냐!!
콰쾅!!
빠지지지지지직……!!
-뇌전의 힘에 비하면 금속의 힘은 상성상 약하다! 그것도 모르고 날 이곳으로 유인했느냐!!
“모를 리가 없죠. 다 이유가 있어서 유인한 겁니다.”
블릿츠 데바에게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위력 감소율 : 1%…….
-위력 감소율 : 2%…….
-위력 감소율 : 3%…….
“뇌전 집열판을 깔아뒀습니다!”
메탈 서전트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당신의 힘! 금속 차원의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그랬다.
은혁은 블릿츠 데바와 싸우기도 전에 금속의 성좌가 된 메탈 서전트에게 명령을 내려뒀다.
‘나와 블릿츠 데바는 곧 싸울 거다. 싸우면서 튀는 전기 에너지와 신성력만 모아도 금속 차원의 발전에 도움이 될 터. 미리 준비해 둬라.’
그래서 메탈 서전트가 준비해 둔 것이다.
바닥 곳곳에 깔린 뇌전 집열판은 단순히 블릿츠 데바의 에너지만 빨아들이는 게 아니라, 블릿츠 데바의 공격력을 조금씩 낮추는 효과도 있었다.
-이놈!!
빠지직!!
블릿츠 데바가 메탈 서전트를 향해 번개를 뿜었지만, 메탈 서전트는 비상 출입구를 통해 안전한 곳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하하하! 약한 친구 괴롭히지 말고 이쪽으로 오시죠.”
멀리 떨어진 평탄한 장소에 은혁이 서 있었다.
은혁은 [광역 돌 만들기] 스킬을 바닥에 깔아두어, 전기 방전 피해를 입지 않도록 준비해 뒀다.
“남은 제한 시간이 한 25초 남았는데, 서둘러야 할 겁니다.”
-네놈이 도망치지만 않으면 1초 안에 죽일 수 있다!!
빠지지지직……!
블릿츠 데바의 손에, 그 유명한 필중의 뇌창이 쥐어졌다.
회귀 초창기 부길드장 브라이언은 저 뇌창을 대여하여 은혁에게 공격을 날린 적 있었다.
‘그때는 미디엄 링의 [매질 요격], 전사의 [패링], 마법사의 [화염 방패]를 모두 융합한 퓨전 스킬 [플라즈마 뉴트럴라이저]로 겨우 버텼었지.’
지금의 은혁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단, 지금 블릿츠 데바가 던지려는 뇌창은 블릿츠 데바의 본체가 직접 던지는 것이므로 그 위력 또한 비교할 수 없이 강할 것이다.
‘지금의 내가 저걸 튕겨 낼 수 있을까?’
은혁은 진지한 얼굴로, 금속판 바닥 위에 침착하게 섰다.
“오십쇼!”
-죽어라!
번쩍!!
블릿츠 데바가 뇌창을 던졌다.
그야말로 광속.
하지만.
‘보인다!!!’
은혁은 순수한 신체 스탯만으로도 광속의 뇌창이 날아오는 것을 똑똑히 봤다.
그리고 청염백광단검을 꺼내며 외쳤다.
“[패링]!!!”
은혁은 회귀 전, 후를 가리지 않고 함께해 온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절기를 발동했다.
터텅!!!
뇌창을 튕겨 낼 때의 소리는, 검으로 묵직한 금속 표창 하나를 튕겨 낼 때의 소리와 비슷했다.
-뭣……!!
블릿츠 데바는 경악했다.
자신의 뇌창은 지고의 위상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드래곤들조차 날개를 접게 했다.
그걸 그냥 단검으로 튕겨 낸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방금 그 뇌창, 전력으로 던진 거였습니까?”
은혁이 도발하자 블릿츠 데바는 확신했다.
은혁의 강함은 자신을 압도한다는 것을.
여기서는 오히려 저 작아 보이는 인간 플레이어가 포식자고, 자신이 작은 곤충인 것임을.
-네놈이 오만하게 구는 이유를 안다, 강은혁!
“하하. 성좌들은 눈치가 빠르군요. 예. 솔직히 그 뇌창은 무섭습니다.”
비유하자면 사람과 말벌의 관계였다.
사람은 말벌보다 강하지만, 말벌의 독침은 솔직히 무서워한다.
그리고 말벌의 독침은 때때로 단 한 방에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보여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