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화 : 93층 클리어
기아치오는 경악해서 굳어 버렸고, 염훈도 당황했다.
“야, 이거 나 빌려줘도 돼?”
“응. 네 세븐 칼리버 사용권은 예전에 브라이언하고 싸울 때 이미 등록해 뒀으니까.”
“아, 아니, 그보다 너 이거 안 쓴다고 약속하지 않았어?”
“응, 그랬지.”
은혁은 씨익 웃으며 기아치오를 바라봤다.
“세븐 칼리버 제7형태를 ‘나’는 안 쓴다고 했지. 하지만 너에게 빌려 주는 거니까 넌 맘껏 써도 되는 거다.”
“그, 그게 돼?”
염훈이 기아치오의 눈치를 살폈고, 기아치오는 화를 냈다.
“그런 꼼수를 쓴단 말인가!”
“안 될 건 없잖습니까. 약속을 어긴 건 아니고.”
은혁은 시간과 체력 낭비를 피하기 위해 은근히 협박했다.
3판을 대결하기로 한 상황에서 이미 2 대 0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이니, 은혁 측이 사실상 이미 이긴 상황.
굳이 더 싸우자고 기아치오가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니, 은혁도 협박하듯 나가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내가 졌다.”
기아치오는 바로 패배를 인정했다.
-염훈 플레이어가 승리하였습니다!
-93층의 모든 대전 상대로부터 승리하였습니다!
-93층 메인 미션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좋았어! 우리가 이겼다! 염훈!”
“……그, 그래.”
막판의 승리가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이긴 건 이긴 거였다.
파앗!
블릿츠 데바, 아브러스 플레임, 기아치오는 화신 형태로 나타나 은혁과 염훈 앞에 도열했다.
“우리의 패배를 인정한다.”
기아치오가 얼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를 죽일 수 있었으면서도 죽이지 않았으니, 그대는 성좌의 생사여탈권을 지닐 정도로 강해졌구나.”
기아치오는 탄식하듯 말했지만, 이내 평소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 층으로 갈수록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집단의 명예가 걸려 있으므로.”
“충고 감사합니다. 세 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행운을 빌겠다.”
파앗!
세 성좌들이 떠났다.
그 순간.
투웅……!
갑자기 모든 조명이 꺼지고 캄캄해졌다.
은혁과 염훈이 경계 자세를 취하는 순간.
파앗!
아이리스가 나타났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강은혁 플레이어.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표정은 무척 다급했다.
“현재 층 전체의 차원 에너지 흐름을 끊었습니다. 100층에서도 이곳을 감시하진 못할 겁니다. 1분 정도지만.”
“네. 무슨 일이죠?”
“실은.”
아이리스는 방금 100층탑에서 있었던 총관리자와의 대화를 빠르게 요약해서 설명했다.
염훈이 화를 냈다.
“리셋 키라니!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가 마음에 안 들고 자기가 위험해지니까 싹 리셋시키자는 건가!”
“진정하세요. 그 리셋 키는 제가 갖고 있으니까.”
“음, 그럼 총관리자가 막 뺏으려고 할 텐데요?”
“그렇게 하진 못해요. 리셋 키는 초월자가 제작한 것이고, 소유권은 공정하게 추첨을 통해 뽑은 것이기에 제게 귀속되어 있습니다.”
그 말에 은혁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런데 그런 중대한 사실을 왜 우리에게 말해 주는 건가요?”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 일부러 왔어요.”
아이리스가 결의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총관리자는 변했어요. 제멋대로인 경우도 많았지만, 그래도 냉철하게 100층탑을 관리해 왔죠. 그리고 클리어하는 플레이어가 빨리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 3군주 세력을 지원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당신들, 특히 강은혁 플레이어의 등장이 모든 걸 바꿨죠.”
은혁은 정말로 100층을 정복할 것이며, 공공연히 관리국에게 책임마저 묻기로 각오해 뒀다.
“당신만큼 언행일치를 보인 자도 드물죠. 그래서인지 총관리자가 냉철함을 잃었습니다.”
“그건 묘하게 인간적이군요.”
은혁이 웃으며 추임새를 넣었다.
자신과 관계없는 일은 매우 냉철하게 처리하는 사람도 막상 자신이 당하면 크게 당혹스러워하게 된다.
보아하니 총관리자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듯했다.
“총관리자가 어떤 일을 또 저지를지 몰라요. 절대 포기하지 말고 100층을 정복하세요.”
“괜찮겠습니까? 제가 관리국에 책임을 물으면, 꼭대기인 총관리자뿐만 아니라 당신 같은 고위직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는데.”
“……그것이 관리국의 숙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요.”
“잘 알겠습니다.”
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용기 내서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훗날에 대해 딱 잘라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너무 걱정하진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훗. 그래요. 다차원 은행 결전 때, 제가 아주 살짝 도움 줬던 것 잊지 말아요.”
“하하하!”
은혁은 웃었고, 아이리스는 떠날 준비를 했다.
지금 관리국으로 떠나면, 아마 총관리자가 부하들을 시켜 체포할 가능성이 컸기에, 40층~42층 구간의 다차원 교차로 쪽으로 피하기로 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것인지도 몰랐기에, 아이리스는 조금 머뭇거렸다.
“강은혁 플레이어?”
“네.”
“사실…….”
아이리스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힘내세요.”
파앗!
아이리스는 떠났다.
염훈은 약간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은혁아.”
“왜.”
“저 여자, 너 좋아했나 봐.”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
“되게 냉정하네.”
어느새 차원 에너지 흐름이 다시 돌아오고, 게이트가 작동했다.
‘아이리스가 용기를 내어 와 준 만큼, 반드시 이긴다. 그뿐이다.’
* * *
-94층 : 굶주림의 늪 (지고의 위상)
“오랜만이군.”
어린아이의 체형에, 노인의 얼굴을 한 존재가 있었다.
“오랜만……?”
은혁과 염훈이 의아해하자, 상대가 웃었다.
“그대들의 길드와 나는 오랜 세월 거래를 해오지 않았나?”
“아!”
30층 버섯 숲의 하플링 마을.
그곳에서 카레를 만들고 히든 미션을 얻었다.
그 버섯 숲의 금지된 늪에는 몰락한 지고의 위상이 살고 있었다.
“그래. 몰락한 지고의 위상, 부패한 버섯 마물이다.”
불패불굴 길드를 한창 키우던 시절, 길드 차원에서 함께 거래를 했다.
‘황금을 줄 테니 연금술용 버섯 포자들을 달라고 했었지.’
그리고 그 거래는 현재까지도 쭈욱 이어져 왔다.
“이렇게 보니 새롭군.”
“후후. 내가 인간 형태로 나온 것은,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그 말에 은혁은 조금 경계를 풀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이곳에는 내 친구들, 나와 처지가 비슷했던 몰락한 지고의 위상들이 숨어 있다네. 자네는 이들을 찾아서 전부 처리해야 하네.”
“처리?”
은혁이 사납게 웃자, 상대가 기겁하며 말했다.
“죽이는 게 아니야. 일종의 술래잡기라네.”
“미션창부터 보여줘.”
“괜찮겠나? 미션창을 보여주면 그때부터 제한 시간이 줄어드는데.”
“후후. 배려 고맙군.”
은혁은 염훈을 돌아봤고, 염훈은 은혁과 부패한 버섯 마물 양쪽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94층 메인 미션 : 늪 속의 몰락한 지고의 위상들>
-목표 : 굶주림의 늪 곳곳에는 몰락한 지고의 위상 셋이 숨어 있다. 이들을 전부 찾아서 죽이지 않고 무력화시켜야 한다.
-성공 시 보너스 : 없음.
-실패 시 페널티 : 지고의 위상들에게 잡아먹혀 죽음.
-제한 시간 : 3분.
“시작!”
파앗!
부패한 버섯 마물은 사라졌다.
“쉬운 미션이네. 안 그래?”
염훈이 은혁에게 물었다.
“으음. 글쎄.”
은혁은 고민했다.
‘다 죽이는 건 쉬운데, 안 죽이고 찾는 건 약간 골치 아프네.’
약간 퍼즐성 미션이었다.
즉, 지고의 성좌들은 은혁이 강하다는 것, 뭐든지 다 때려 부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죽이지 않고 ‘무력화’만 시키라고 요구한 것.
‘소환수와 분신을 잔뜩 뿌리는 전략을 쓰는 게 확실하긴 하지만, 늪 속 환경이 어떤지 모른다.’
지고의 위상들이 만든 늪이니, 소환수나 분신을 무력화시키거나 힘을 뺏을 가능성도 있었다.
“확실한 방법은 하나뿐이네.”
은혁은 차원의 낚싯대를 들고, 낚싯바늘을 자신의 몸에 걸었다.
“받아라, 염훈.”
휙.
그리고 염훈에게 던져 줬다.
“어?”
“내가 직접 늪 속을 탐사할 거야. 넌 내 생명줄을 쥐고 여기 남아 있어.”
“직접 들어가게?”
“그게 더 빠르니까.”
은혁은 더 말하지 않고 바로 늪 속에 몸을 던졌다.
풍덩!
겉보기보다 매우 묽은 늪이었다.
쿠르륵…….
주르르륵…….
은혁은 점점 더 아래로 가라앉으며, 각종 탐지 스킬을 발동했다.
‘[사이오닉 레이더].’
파앗!
순수한 탐지 스킬은 이전에는 많지 않았으나, ‘나 혼자만 모든 직업’을 얻은 뒤로는 정신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몸 전체를 [사이오닉 레이더]처럼 쓸 수 있었다.
우우우우우웅…….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몰락한 지고의 위상은 늪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이상하네. [사이오닉 레이더]는 [은신] 스킬은 물론, 차원 계면 틈새에 몸을 숨긴 것도 감지가 가능한데.’
그때, 뭔가를 감지했다.
‘일종의 포탈 같은데?’
은혁의 몸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이동했다.
슈르르륵…….
파앗!
포탈 너머는 다차원성계의 텅 빈 우주 공간이었다.
“하하! 약았네.”
은혁은 이제야 깨달았다.
늪 관련 미션인 척해 놓고, 실제로는 다차원성계의 진공 공간을 배경으로 한, 최소 수십만 km 단위의 술래잡기 미션이었다.
‘이걸 3분 안에 찾으라고?’
-제한 시간 : 2분 33초…….
-제한 시간 : 2분 32초…….
-제한 시간 : 2분 31초…….
‘좋아! 해보자!’
은혁은 [그림자 분신 9.0]을 마구 소환했다.
몇 초 만에 수십 체의 분신들이 생성되었다.
“[그림자 분신 9.0] 연속 발동.”
“[그림자 분신 9.0] 연속 발동.”
“[그림자 분신 9.0] 연속 발동.”
분신들이 분신을 만들어 내게 했다.
이전에는 마력의 한계로 해내지 못했던 기하급수적인 분신 생성.
‘3만.’
본체 포함 3만의 분신들.
“다른 활동은 말고 탐지에만 집중할 것! 가라!!”
타앗!
사방으로 비행했다.
분신들은 [사이오닉 레이더]를 발동하고 있었기에, 너무나 거대해 보이는 넓이도 샅샅이 수색할 수 있었다.
쐐애애애액……!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몰락한 지고의 위상, 진공의 태풍이 나타났습니다!
-몰락한 지고의 위상, 팽창하는 살점이 나타났습니다!
-몰락한 지고의 위상, 초차원의 실이 나타났습니다!
몰락한 지고의 위상 세 개체는 서로 가장 먼 곳에 있었다.
은혁의 분신들에게 위치를 들키자마자 즉시 도망치는 데에만 전념했다.
“끝인데? [그림자 도약] + [심연의 심장] 융합.”
-히든 이펙트 발동!
“퓨전 스킬 [심연의 도약].”
파앗!
다차원성계의 공간을 무시하고, 심연을 거쳐서 원하는 지점에 나타났다.
“키에에엑!”
팽창하는 살점 곁에 은혁이 나타났다.
몰락한 지고의 위상, 팽창하는 살점은 이름 그대로 끝없이 팽창하는 살점들로 이뤄져 있었다.
푸화악!!
은혁의 공격에 대비해서 더욱 크게 살점을 불리고 사방으로 살점을 퍼뜨렸다.
“[강타].”
퍼억!!
팽창하는 살점을 향해 [강타]를 딱 한 방 갈겼다.
투콰콰콰콰쾅!!!
충격파는 팽창하는 살점이 팽창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몰락한 지고의 위상, 팽창하는 살점이 무력화되었습니다!
“무력화시켰으니, 다음!”
파앗!
[심연 도약]으로 이번에는 진공의 태풍 곁으로 갔다.
상당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몰락한 지고의 위상이었기에, 분신 몇은 이미 쓸려나가 죽고 말았다.
‘흠. 탐지만 시켰더니, 분신들이 자동 대응을 안 하네.’
은혁은 파괴된 분신들을 해제한 뒤 더 가까이 접근했다.
퀴오오오오오……!
진공 상태에서는 오히려 태풍이 존재할 수가 없는데, 진공의 태풍은 인위적으로 모순적인 현상을 일으켰다.
몰락한 지고의 위상 중에서도 최상급에 달하는 강력하고도 모순된 힘.
“제법, 이라기보다는 쓸모없군.”
물론, 지금의 은혁은 그런 모순보다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