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 뮤비즈와의 대화와 97층 클리어
“내 외모는 신경 쓸 것 없다. 이곳의 메인 미션은 널 만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니까.”
“역시 그랬군.”
뮤비즈는 누구도 모르게 은혁과 단둘이 대화하길 원했다.
그래서 뮤비즈는 자신의 과거가 담긴 책 속 공간으로 은혁이 들어오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곳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장소. 내 옛 기억의 장소이며, 현재의 자아이고, 어쩌면 미래의 순환이기도 한 곳이다.”
우우웅…….
은혁과 뮤비즈 사이에 작은 공명이 일어났다.
은혁은 이 공명이, 자신이 완전히 흡수한 ‘뮤비즈의 마정석’과 지금 뮤비즈가 지니고 있는 ‘뮤비즈의 마정석’ 간에 일어나는 공명임을 느낄 수 있었다.
“불러들여 놓고 거창하게 설명하는 걸 보니 싸움을 거는 분위기는 아니군.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나는 네가 회귀자인 것을 알고 있으며, 너의 존재 때문에 내가 약해져 있다.”
은혁은 뮤비즈의 말에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뮤비즈와의 대화가 생각보다 매우 늦어져서 놀라울 뿐.
‘회귀에 관한 대화는 조금 미루자.’
“내 존재 때문에 네가 약해졌다는 건 무슨 소리지?”
“……내 마정석을 돌려다오.”
뮤비즈가 불쑥 요구했다.
은혁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싫은데. 이미 내 몸속에 완전히 흡수되어서 줄 수도 없어.”
“역시 그렇군.”
뮤비즈는 낙담한 듯 촉수만 꿈틀거리며 말이 없었다.
“그 말 하려고 날 여기까지 불러들인 건가?”
“오히려 네가 궁금한 점이 많을 거라고 본다만.”
“그렇군. 그럼 내가 먼저 질문하지, 뮤비즈. 너 또한 회귀자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회귀자를 감지할 수 있다. 네가 이전 회차에서 흡수한 그 마정석에는 내가 남긴 표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음? 회귀한 상태인데, 이전 회차의 것까지 감지 가능하다고?”
“이전 회차를 다 안다는 건 아니다. 그저, 회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감지하는 것에 가깝다.”
우우우웅…….
대화하면서 공명이 이따금 일어났고, 은혁의 회귀자로서의 옛 기억들이 뮤비즈에게 일부 전달되었다.
덕분에 지금의 뮤비즈는 이전 회차의 뮤비즈로서의 기억을 많이 회복했다.
은혁은 질문했다.
“정말 보통 마정석이 아니군. 그 ‘뮤비즈의 마정석’은 정체가 뭐지?”
“이름 그대로 내 모든 것이다. 너희들의 영웅 중에 교황제라는 존재가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교황제의 검을 만들었다지?”
“네 마정석, 뮤비즈의 마정석도 그런 거였나?”
“그렇다. 내가 지닌 고유의 힘은 다른 플레이어를 잡아먹을 때마다 새로운 힘을 흡수하는 것이었지. 그렇게 힘을 비축한 나는 단 한 번, 회귀가 가능하도록 회귀의 힘까지 마정석에 담은 것이다. 죽는 순간에 발동되도록.”
파앗!
보라색 방이 마치 연극 무대처럼 변했다.
연극 무대 저편에는 뮤비즈가 보였다.
지금보다 20분의 1 정도로 작은 뮤비즈의 모습.
스스로를 일부러 작게 ‘몰락’시킨 뒤, 약한 플레이어들을 잡아먹었다.
그런 뒤 다시 높은 층으로 안전하게 복귀했다.
이런 일을 반복할 때마다 플레이어가 지니고 있던 직업의 힘을 흡수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중첩된 가능성 중에는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직업을 택할 수 있는 가능성.
즉, 1회 한정 회귀의 힘 또한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최강자가 될 수 있었지. 회귀에 대한 대비까지 몸속에 마정석 형태로 품고 있었기에 거침이 없었다.”
“내가 네 배를 가르고 마정석을 뺏어서 회귀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생각할수록 얄궂은 일이다.
회귀 전, 염훈이 뮤비즈의 배 속에 들어가 자폭했기에, 은혁은 울면서 뮤비즈의 배를 갈랐다.
그리고 전혀 기대치도 않은 뮤비즈의 마정석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 이번 회차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는 혼란스러웠지. 마정석은 지금도 내 안에 존재하지만, 무언가에 의해 무결성이 훼손된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내 안의 마정석을 조사한 끝에, 믿기 어려운 결론을 도출해 냈다.”
“이번 회차는 사실 2회차이고, 이전 회차의 플레이어가 이전 회차의 널 죽이고 마정석을 흡수했다는 결론이겠지.”
“그렇다. 내가 품은 마정석이 오히려 가짜 마정석이 된 것이다. 너의 존재 때문에.”
은혁은 이제 이해가 갔다.
“내 존재 때문에 네가 약해졌다는 건 이제 이해했다. 말 그대로였군. 한데, 그렇다면 이번 2회차 때 날 바로 죽이지 않은 이유는? 내가 회귀한 직후 날 죽였다면, 네가 품은 마정석은 다시 진짜가 되는 거 아닌가?”
“방금 내가 도출한 결론은 하루아침에 내린 결론이 아니다. 긴 혼란 끝에 겨우 찾아낸 답이지. 그리고 너를 찾았어도 관리국의 방해로 널 죽이고 흡수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너를 찾기도 힘들었다.”
“하긴 이 높은 곳에서 5층을 내려다보는 건 관리국의 고유 권한이지. 성좌들도 계약하지 않으면 특정 플레이어를 찾아내긴 힘들고.”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의 너는 ‘나 혼자만 모든 직업’을 각성했지만, 초창기의 네가 지녔던 것은 ‘모든 직업의 가능성’이었지. 나는 네가 흡수한 내 본래 마정석을 그제야 감지할 수 있었지만, 그때는 시간이 지난 뒤였고, 나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과연……. 이해했다.”
은혁은 의문이 많이 풀린 것을 느끼며,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내 손에 죽고 싶나?”
“그렇다.”
뮤비즈는 의외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를 외부와 차단된 이곳으로 유인한 것도, 남들이 모르게 네 손에 죽음으로서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네게 넘기기 위해서다.”
“네 힘을 내게 준다고? 왜지?”
“그러면 너는 더욱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나는 강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더 강해지고 있는데.”
직업의 개수는 지금도 서서히 증가하고 있었다.
더 이상 강해질 필요가 없을 정도.
그럼에도 뮤비즈는 굳이 은혁에게 죽고 흡수되고 싶은 기색이었다.
“더 약한 존재가 더 강한 존재에게 흡수당하는 것은 필연이다. 날 죽이고 흡수해다오. 그리하여 최강의 존재가 되어다오.”
“…….”
이런 경우는 예상치 못했기에 은혁은 잠시 침묵했다.
‘기분이 묘하군.’
사실, 은혁은 뮤비즈를 보면 이성을 잃을 줄 알았다.
‘회귀 전 함께했던 여러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염훈의 원수다.’
보자마자 피가 끓어올라 죽이고 싶을 줄 알았는데,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 건 왜일까?
“그건 네가 잃은 게 없기 때문이다.”
뮤비즈가 은혁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너는 과거로 되돌아왔고, 네 동료는 되살아났지. 오히려 회귀 전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렇지 않나?”
“아니, 그렇다고 해서 딱히 널 용서할 생각은 없었는데…….”
“후후. 용서라…….”
뮤비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냉정히 말하자면 네가 내게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나?”
“음? 어째서지?”
“과거의 내가 99층을 지배하고 있었다. 거기에 너와 네 동료들이 도전한 거였다.”
“음, 그건 그렇지. 하지만.”
“플레이어들을 죽이고 잡아먹어서 힘을 키웠지만, 플레이어 또한 강력한 이들은 지고의 위상들을 사냥하고 죽이고 그 마정석을 꺼내 갔다. 우린 상호 사냥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군.”
“음, 그렇게 보면 그것도 그런데.”
“결정적으로, 나는 네 동료 염훈을 틀림없이 죽일 계획이었지만, 딱히 모욕하거나 한 적은 없다. 오히려 강자였기에 빠르게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어쨌거나 죽인 거 아닌가?”
“너를 화나게 할 생각은 없지만, 놈은 널 구하기 위해 직접 내 입안으로 돌진했다. 스스로 잡아먹힌 뒤 자폭했다.”
“아……!”
“그 결과 나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지. 그렇지 않은가?”
“으음,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긴 한데.”
“후후. 그런 거다. 이 100층탑에서 일방적인 은원 관계란 없는 것이다.”
“허참.”
은혁은 생소한 기분을 연속으로 느꼈다.
‘나를 죽인 최악의 숙적을 만났는데, 그리고 그 숙적이 내 손에 죽고 싶다는데, 왠지 죽이고 싶지가 않다니.’
“뮤비즈.”
“후후. 이렇게 대놓고 이름으로 불리는 건 처음이군. 뭔가, 강은혁.”
“난 널 죽이지 않겠다.”
“왜지? 이게 함정 같나?”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다. 네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다.”
은혁은 결론을 내렸다.
“나는 너에게 은혜도 원한도 없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건 이전 회차의 것이겠지.”
은혁은 회귀자만의 윤리를 각성한 듯했다.
“누구나 세상을 평가하지만, 회귀자로서 이전 회차의 감정과 기억을 기준으로 지금 세상을 평가하는 행위는, 너무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이전 회차와 얽힌 평가를 전혀 내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려면 절대적 객관성을 획득하거나, 아예 이전 회차의 기억을 지워야 할 터.
둘 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객관화는 필요하겠지. 회귀자가 회귀 지식으로 남들보다 몇 배 더 강해질 수 있다면, 그에 걸맞게 더 엄격한 회귀자용 윤리를 지녀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연장선에서, 네가 날 선제공격하지 않는 한, 난 널 죽이지 않겠다.”
“그렇군……. 회귀자의 윤리라. 참으로 놀랍군.”
뮤비즈는 빈정거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놀란 듯했다.
“강은혁. 네 정신 구조는 이미 필멸자의 수준을 넘어선 듯하다. 힘을 추구하는 경지를 넘어, 세속의 도덕 준칙을 넘어, 오직 너만을 속박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를 창조하려 하는구나.”
“속박? 뭐, 그렇게 표현하고 싶진 않지만, 그런 형태일지도 모르지. 사실, 아직 정리된 생각은 아니라서 나도 이 회귀자의 윤리라는 게 어떤 모양일지 잘 몰라.”
“후후후. 내 마정석을 뺏어간 놈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지만, 참으로 자랑스럽다, 강은혁.”
“음? 그 정도인가?”
“그렇다. 성좌들조차도 현세에만 집중하고, 드래곤들조차 100층탑의 끝에 허무감을 느끼고 있다. 기존의 규칙과 운명치 법칙에 회의마저 느끼고 있지. 그런데 너는 다르다. 마지막 순간에 다다른 지금 새로운 윤리를 추구하다니! 그들에 대한 통렬한 야유 아닌가. 하하하!”
뮤비즈는 기분 좋은 듯이 웃었다.
“아아, 유쾌하구나. 지고의 위상들이 널 미워해도, 난 널 응원하도록 하지. 행운을 빌겠다, 강은혁.”
은혁은 한참 망설이다 겨우 말했다.
“고맙다, 뮤비즈.”
진정으로 큰 굴레 속에서는 인연과 악연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르겠다고, 은혁은 생각했다.
‘물론, 일반인의 눈에는 이거야말로, 기준점을 없애는 광기로 비칠지 모르지.’
-97층 메인 미션을 클리어하셨습니다!
파앗!
은혁은 다시 원래 있던 도서관으로 되돌아왔다.
“꽤 걸렸네? 어려웠냐?”
염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염훈.”
“응?”
“늘 고맙고, 미안하다.”
“어? 갑자기 왜? 너 저 안에서 또 무슨 사고 쳤냐?”
“하하하!”
“네가 이렇게 웃으면 꼭 나중에 사고가 터지더만.”
“염훈.”
“또 왜?”
“만약 네가 이미 죽었고, 이 세상이 두 번째 세상이라면 너는 이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허참. 또 이상한 질문이네.”
염훈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 경우, 나는 이전 세상을 전혀 기억 못 하는 건가? 상호 작용도 불가능하고?”
“응. 그렇지.”
“그럼 별 상관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