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 100층으로
“모두가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경우를 상상합니다. 각종 상상, 온갖 도리에 어긋나는 공상을 하기도 하죠.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건, 소원을 이룰 기회가 실제로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은혁은 고개를 내려 광장의 모두를 바라봤다.
“여러분은 저와 염훈을 믿기에, 터무니없는 소원을 빌지 않을 거라고 이미 확신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렇기에 환호성을 보내 주시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소원이 최선일지.”
그러자 염훈이 헛기침을 하더니 마이크를 슬쩍 이어받았다.
“야, 은혁아. ‘소원 100개 이루게 해주세요.’가 있잖아, 소원 100개.”
천진한 그 목소리에 은혁은 물론 관중들 사이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지금 제 동료 염훈이 좋은 힌트를 줬습니다. 소원의 가짓수를 늘리는 소원.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죠. 100개는 예시일 뿐, 1억 개나, 무한정 소원을 이룰 권리를 달라는 식의 소원을 빌 수도 있을 겁니다.”
은혁의 말에 많은 이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은혁과 염훈이 그런 ‘무한 소원’의 권리를 얻고 그 힘의 0.0000001%만 인류에게 나눠준다고 해도, 인류가 얻을 혜택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물론, 은혁이 사악한 용도로 그 힘을 쓴다면 그 재앙 또한 끝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은, 어쩌면 보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보상의 탈을 쓴, 그 자체로 플레이어를 최종적으로 시험하는 미션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혁은 보기 드물게 고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소원을 빌게 될지, 저는 아직도 완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늘 그렇듯, 위기와 직접 부딪혀 보고, 싸워 보고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물론, 염훈의 조언도 귀담아들을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은혁은 연설을 마쳤다.
광장에 모인 이들 중 절반 정도는 혼란스러워했다.
무한한 희망과 환희의 기자 회견일 것 같았는데, 오히려 은혁의 기존 기자 회견보다 더욱 무거운 분위기였으니까.
그리고 이곳에 모인 나머지 절반은, 이제 눈앞에 펼쳐지게 될 미래가 완전한 미지의 영역임을 깨닫고 진중한 마음으로 대비했다.
* * *
-100층 : 100층탑 최종 영역.
“어서 오십시오.”
100층에 도달하자마자 총관리자가 나와서 인사했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관리국의 모든 요원과 관리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관리자들이 모두 모여 축하를 외쳤다.
염훈은 긴장했고, 은혁은 빙긋 웃으며 총관리자를 향해 [텔레파시]를 발동했다.
‘아주 호의적이시군요.’
‘관리국의 힘까지 이용한 상태의 천상황제를 그렇게 쓰러뜨리신 분이니, 호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요.’
관리국과의 마찰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듯했다.
은혁은 관리자 모두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은혁은 예의 바르게 답한 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총관리자님? 100층의 메인 미션은 뭡니까?”
“후후…….”
총관리자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여러분은 이미 클리어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미션은 다음과 같습니다.”
<100층탑 메인 미션 : 정상에 도달하다>
-목표 : 모든 플레이어 중 최초로 100층에 도달할 것.
-성공 시 보너스 : 다음의 선택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A. 초월자를 만날 권리.
B. 소원을 이룰 권리.
-실패 시 페널티 : 없음.
-제한 시간 : 없음.
이어서 시스템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축하합니다! 100층탑의 정상에 도착하셨습니다!
-100층탑 메인 미션을 클리어하셨습니다!
100층탑의 미션은 100층에 도달하는 것 그 자체였다.
은혁과 염훈은 동시에 도달했기에 둘 다 미션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휴. 둘이 같이 와서 다행이다.’
만약 은혁 혼자만 왔다면 클리어 보상 두 개 중 하나만 골라야 했을 것이다.
“와아아아! 은혁아!! 진짜였어!!!”
“응? 뭐가 진짜야?”
“소원 말이야! 소원!!”
염훈은 어느 때보다 흥분한 것 같았다.
“100층을 정복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 라는 건 사실 소문일 뿐, 100% 입증된 건 아니었잖아? 그런데 봐! 클리어 보상으로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해준다잖아!”
“흠, 그렇군.”
은혁은 어째선지 심드렁했다.
총관리자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자, 고르시지요.”
“몇 가지 의문 사항이 있는데요.”
“오, 뭐든 물어보십시오.”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럼 더 이상 100층의 메인 미션을 클리어하지 못하는 겁니까?”
“후후. 그렇습니다. 최초로 올라온 두 분만이 클리어 가능합니다. 100층탑은 원래 단 한 명의 최초 정복자를 위해 만들어졌지요. 단, 두 분은 동시에 올라오셨기에 두 분 모두에게 100층 메인 미션 보상이 제공된 것입니다.”
“음, 염훈과 논의를 좀 해봐도 되겠지요?”
“그러십시오. 하지만 미리 말씀드리는데.”
총관리자는 가면 안쪽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소원의 개수 총량을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그 말에 은혁은 예상대로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염훈은 펄쩍 뛰었다.
“아니, 왜요!”
“저희는 100층탑의 힘을 관리할 뿐입니다. 그것을 늘리거나 하진 못합니다. 애초에 초월자께서 소원을 1개로 제한하셨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으음. 어떡하냐, 은혁아. 소원 100개 꼼수가 막혔네.”
그 말에 은혁은 피식 웃었다.
“솔직히 아쉽긴 하네. 무한 소원은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클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솔직히 좀 끌렸는데.”
“야, 조금 아쉬운 정도냐? 으으.”
염훈은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듯했다.
“일단 우리 소원 겹치지 않게 해야 할 텐데.”
“아, 난 소원 안 빌 거야.”
“어?”
“난 초월자를 만나 볼 생각이야. 즉, A를 고른다.”
“아니, 초월자가 뭔데? 만나서 뭘 하게?”
“나도 몰라. 하지만 100층탑을 만들고 소원의 권능까지 생성한 걸 보면, 성좌보다 더 높은 무언가라고 봐야겠지.”
“만났다가 널 죽이면?”
“초월자가 날 죽일 거였다면, 이미 날 죽였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본 바로는, 관리국을 시켜서 100층탑을 만들게 하고, 인류를 굳이 플레이어로 만들어서 키우는 게 목적이었던 것 같아.”
은혁은 평소처럼 천장을 바라봤다.
이곳은 100층이므로 더 높은 곳이 없는데도, 은혁은 습관처럼 위를 봤다.
“이 위에 초월자가 있다면, 나는 100층에서 소원을 빌 권한을 얻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올라가겠어.”
“으음…….”
염훈은 더는 은혁을 말리지 못했다.
“나는 네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살리고 모두 해방시킬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안하다, 염훈.”
“아니, 미안해할 건 없지. 그 소원은 내가 빌면 되니까.”
“당연한 소리지만, 그 소원은 100층탑 내부에 한정지어야 한다. 절대 바깥 사람들을 살리는 소원은 빌면 안 돼.”
“어? 왜? 100층탑 바깥에도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무척 많을 텐데.”
“그러면 지구상에 죽은 모든 인간의 99%를 부활시켜야 할 거다. 그러다 지구 폭발한다.”
“아니, 그럼…….”
“맞아. ‘딱 한 번의 소원’은, 우리 생각만큼 통쾌하지가 않아. 무척 제한적으로 써야 할 거야.”
“으음…….”
염훈은 잠시 앓는 소리를 내다가 총관리자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후후. 자동 해방은 없습니다. 당신이 ‘모든 플레이어의 해방’에 관한 소원을 빌지 않는 한, 그들은 영원히 100층탑에 남게 되겠지요.”
“으으윽.”
염훈은 고뇌했다.
“은혁아. 너라면 무슨 소원을 빌 거냐.”
“그게, 딱히 바라는 게 없군.”
“말도 안 돼! 정말로?”
“돈이야 뭐, 돌을 황금으로 변환시킬 정도이니 의미가 없고. 난 이미 성좌보다 강하니까 더 강하게 해달라 소원을 빌고 싶진 않군. 어차피 나는 스스로 노력해서 강해지는 걸 선호해서.”
“그, 그럼, 너희 부모님은?”
“음? 이미 돌아가셨는데.”
“그러니까 그분들 부활시키고 싶지 않아?”
“그분들을 다시 보고 싶긴 하지.”
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그분들을 부활시키는 게 옳은 건지는 모르겠어. 나는, 초자연적인 힘이 아닌, 일반적인 사건이나 사고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은, 인위적으로 부활시키는 일에 찬성하지 않거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희 부모님인데…….”
“끄응. 이 문제는 내가 강하게 말하기가 좀 어렵네.”
회귀자로서 다시 살아온 은혁이었기에, 오히려 말하기가 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한번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건 옳지 않다.’라고,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당장 내가 회귀해서 두 번째 기회를 얻었는데, 남한테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으니까.’
물론, 은혁이 회귀자라는 걸 아는 자는 극소수이지만, 그래도 양심상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미안하다, 염훈. 자세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나는 부활에 반대야.”
“허참, 그럼 어떤 소원을 빌지? 모두의 해방?”
“그게 일반적이겠지.”
“하, 하지만 그래서는 그냥 본전 아니야?”
“아니지. 플레이어들이 지구로 풀려나는 거니까. 아마 지구에는 엄청난 혼란이 찾아오겠지.”
해방과 자유를 원하는 플레이어들은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은 순수한 지구인과는 이미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좀 속 시원하게 소원을 빌려고 했더니만, 원! 더 스트레스만 쌓이네! 확! 모두의 행복이나 빌어 버릴까?!”
“행복은 매우 추상적이야.”
“아니, 구체적이지 않아? 불만이 없는 상태에서 만족감과 기쁨이 충족되면 그게 행복일 텐데?”
“100층탑이 악의적으로 소원을 해석해서, 모두의 두뇌 수준을 낮추어 행복을 쉽게 느끼도록 만들지도 모르지.”
“아악! 짜증 나!!”
염훈은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소리를 질러 버렸다.
“하하하하!”
은혁은 왠지 웃음이 났다.
100층탑 전체, 어쩌면 그 너머의 인류 전체의 미래가 걸린 소원의 문제인데도, 은혁은 마음의 부담이 크지 않았다.
“염훈. 난 널 믿는다.”
회귀자인 은혁은 염훈이 고뇌하는 모습을 보고, 소원의 권리를 오롯이 염훈에게 맡기는 게 답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시대는 염훈을 비롯한 이 세상 사람들 것이지. 엄밀히 따지면 나는 이전 시간대의 연장자랄까.’
은혁은 생각할수록, 자신이 초월자와 만나는 것이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
“그럼, 나 먼저 간다. 혼자서 잘 선택해 봐.”
“자, 잠깐!”
은혁은 지체 없이 A 보상을 수령하기로 했다.
-초월자의 영역으로 전송됩니다!
* * *
‘여긴 아무것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심연과 비슷한 공간.
하지만 심연이 빛이 전혀 없는 검은색이라면, 이곳은 새하얀 공간.
“마치 백지 같군.”
은혁이 소리 내어 중얼거리자, 어디선가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누구 있습니까?”
-글쎄, 네 생각은 어떻지?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특정 방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닌, 공간 전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저 말고는 없는 것 같군요.”
-내가 있지 않나?
“메시지가 있다고 해서, 꼭 메신저가 있는 것은 아니더군요. 그 반대도 아니고.”
-하하하! 내 존재를 어떻게 증명하길 바라나?
“가령, 직접 모습을 드러낸다거나?”
-그럴 순 없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대는 초월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초월자가 아닌 사람이 초월자의 모습을 보면 죽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