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화 : 100층탑 최종 미션 (3)
57층인 무공을 연마하는 사당을 지나칠 때는 경고만 날렸다.
“잠시 뒤 총관리자가 이 계단으로 내려올 거다! 절대 싸우지 말도록!”
“존명!”
그곳에 있는 모든 무공 연마자들은 플레이어건 NPC건 지존에게 절대 경의를 보이는 이들이었기에, 은혁의 경고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지존이시여! 떠나시기 전에 우리들이 올리는 차 한 잔 받으소서!”
찻집의 동자가 외쳤다.
은혁이 중앙 계단을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57층의 모든 이들의 마음이 담긴 차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바쁘니 다음에 마신다고 하겠지만 은혁은 달랐다.
“좋다! 어서 다오!”
은혁은 선 채로 뜨거운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체력과 마력이 완전 회복되었습니다!
-이동 속도가 15% 증가합니다!
은혁은 씨익 웃었다.
“잘 마셨다, 동자야. 무의 지존을 향한 모두의 마음 잘 맛보았소! 다들 정말 고맙소!”
은혁은 바로 56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56층은 서부의 현상금 사무소였다.
은혁은 보안관 사무실 한복판에 금화 자루를 하나 던진 뒤 한마디만 했다.
“잠시 뒤 총관리자가 이 계단을 타고 내려올 것이오! 그럼 절대 싸우지 말고, 권총을 허공에 쏴서 신호해 주시오.”
스륵.
은혁은 보안관의 권총에 자신의 그림자를 심어 뒀다.
보안관이 방아쇠를 당기면 소리가 나는 대신, 은혁에게 정보만 전달될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은혁은 바로 55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55층은 묘하게 현실적인 천국.
은혁의 미래를 보여 준 극장이 있는 곳이다.
‘흠. 되게 오랜만에 오는 것 같네.’
“오랜만입니다, 최강자 강은혁.”
저승사자 차림의 관리자 루핑이 있었다.
“방해할 겁니까?”
“설마요. 총관리자님은 현재 제 직상 상사이지만, 당신은 5분 뒤 제 직장 상사가 될 것 같군요.”
“잘 아는군요.”
“뭐 부탁할 거라도?”
“고맙다고 말하려고 들렀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염훈에게 유언장 잘 전해 준 거 말입니다.”
“그거야 부탁받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 무시해도 될 일을, 제가 죽은 뒤에도 잊지 않고 해줬기에 염훈이 제 계획대로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흠흠,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수 없군요.”
“그럼 다음에 또!”
“행운을 빕니다.”
* * *
50층~54층은 해안 도시와 무한한 바다로 구성된 통합층이었다.
“와아아아아!!”
“강!! 은!! 혁!! 강!! 은!! 혁!!”
바다와 해변에는 은혁을 응원하는 수많은 이들이 나와 있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은혁이, 피스메이커의 스테이지 멸망 시도를 막아낸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위험하니까 너무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은혁은 평소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미 심후한 마력과 그 이상의 힘을 지녔기에 모두에게 목소리가 전달됐다.
“블랙 스타.”
우우우우웅…….
블랙 스타를 쥔 채, 힘을 아주 조금 발동하자, 막대한 양의 바닷물이 끌어 올려졌다.
안전한 곳에 있던 이들은 1초 남짓 몸이 붕 뜨는 기분을 느꼈다.
“[사이오닉 필드].”
막대한 양의 얼음물을, 자신이 지나쳐 온 계단의 통로에 가득 채우더니.
“[빙천신공].”
쩌저저저적!!
통째로 얼려 버렸다.
은혁의 마력이 깃든 얼음 장벽이라, 은혁이 떠나고도 최소한 수백 년은 녹지 않으리라.
“자, 그럼 다음 층으로 가볼까!”
* * *
-쿠와아아아악!!
콰콰콰콰콰쾅!!!
총관리자는 마침내 기가 스틸로 만들어진 장애물을 박살 냈다.
관리국이 만든 가장 단단한 금속인 기가 스틸.
그 기가 스틸로 계단 통로를 틀어막았으니, 뚫기가 여간 힘들었던 게 아니다.
가면을 벗어 던지고 본체를 드러낸 총관리자 알파레몬은, 강력한 정보 생명체였기에, 관리국이 만든 기가 스틸을 뚫기 어려웠다.
스스로 만든 주장을 스스로 논파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스스로 만든 금속이기에 뚫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57층을 내려가자, 많은 이들이 경악하며 올려다봤다.
“오오.”
“저것이 총관리자의 진짜 모습.”
“멋있으면서도 기괴하군요.”
무공을 연마한 이들이라 그런지 놀라서 기절하거나 하는 이는 없었다.
-강은혁은 지나갔습니까?
총관리자는 기괴하게도 존댓말로 질문했다.
“예! 지나간 지 꽤 됐습니다.”
찻집의 동자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군요.
57층의 계단 위에 있는 총관리자는 실망하지 않고 서둘렀다.
가장 어려웠던 기가 스틸을 뚫었으니,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점차 쉬워질 것이라 판단했다.
만약, 은혁이 이미 45층을 돌파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리고 중간중간에 이미 함정을 깔아 뒀다는 것을 알았다면 크게 화를 냈을 것이다.
* * *
“휴, 바쁘다, 바빠!”
은혁은 방금 46층~49층의 재난의 왕국을 지나쳐 왔다.
재난의 왕국은 이제 재난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재난의 성좌가 저지른 일들이 많아서 재건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느라 헐떡이고 있었다.
“[재난 흡수].”
은혁은 칼라미티 해머를 허공에 들고, 잔여 재난을 싹 다 흡수해 버렸다.
‘최대한 간섭하지 않는다는 게 원칙이었지만, 이미 나는 100층을 다 클리어한 몸이니 상관없겠지.’
모두가 놀라기도 전에, 은혁은 흡수한 재난의 힘을 자신이 지나온 계단에 발동했다.
“[미로의 재난].”
츠츠츠츠츠츠…….
이것으로, 46층~49층 구간의 계단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오지 않는 미로처럼 변했다.
“[그림자 은신].”
은혁은 그 어떤 [투명화] 주문보다 더 효과가 뛰어난 은신을 발동한 채 45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45층의 토론가들은 손꼽아 은혁의 출현을 기다렸다.
“으음, 강은혁 플레이어가 왜 이리 안 나오지?”
“운명에 관해 토론할 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거늘.”
“자자, 조금 더 기다려봅시다.”
“일단 나타나기만 하면 몸으로 막아서라도 토론을 이끌어 냅시다.”
토론가들답게, 은혁이 진행 중인 승부에는 관심도 없고 당장의 토론에만 목말라 있는 상태.
“토론을 위한 토론은 사양합니다.”
은혁은 45층을 돌파하며 한마디만 남겼다.
“앗?! 어디지!”
“목소리만 들리는데!”
“아차, 당했구나! 투명화 스킬인가 보다!”
토론가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였다.
“이쪽입니다.”
은혁과 똑같이 생긴 [그림자 분신 9.0]이 한쪽에 서 있었다.
본체는 이미 45층 아래로 내려갔고, 은혁은 이 토론가들을 이용해 총관리자의 하강을 늦출 계획이었다.
“저와 토론을 하고 싶으신 분은, 가장 어려운 논리적 함정을 만들어보십시오. 가장 좋은 논리적 함정을 만들어 낸 한 분과 토론을 하겠습니다.”
“오옷!”
“정말입니까!”
“좋은 제안인데? 어디 보자, 논리적 함정이라…….”
토론가들은 삽시간에 수십 개가 넘는 어려운 논리적 함정을 만들어 냈다.
은혁의 분신은 사이오닉 능력인 [염상 구현]으로, 토론가들이 띄워대는 논리적 함정을 실제 [데이터 마인]으로 변환시켰다.
총관리자는 가면을 벗고 정보 생명체로 변했기에, 이런 논리 함정은 끈끈이주걱처럼 총관리자를 막아 낼 터였다.
* * *
은혁은 자신의 분신이 45층에서 일하는 동안, 44층과 43층은 빠르게 계단만 뛰어 건너뛰었다.
44층은 흡혈귀 남작의 영지였는데, 완전히 황폐화되어 있었고, 43층의 몬스터 웨어하우스도 텅 비어 있었다.
40층~42층은 통합층으로, 다차원 은행, 다차원 광장, 다차원 교차로로 구성되어 있었다.
“흠, 혹시 있으려나?”
혹시나 해서 아이리스의 대사관으로 향했다.
100층에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혹시나 해서 들러봤다.
“강은혁 플레이어?!”
아이리스가 깜짝 놀라서 불렀다.
“네. 제가 100층을 클리어했다는 소식 들었습니까?”
“당연하죠! 지금 대결 중인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그런데 여긴 왜 들렀어요?!”
“그냥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은혁이 손을 내밀었다.
아이리스는 이러지 말고 빨리 계단으로 뛰어가라고 소리쳤지만.
“그냥 무시하고 가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서요.”
은혁은 고집스럽게 악수를 청했다.
아이리스는 얼른 악수를 해줬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건, 나름의 의미가 있는 행동이겠죠?”
“전혀.”
은혁은 씨익 웃으며 손을 놓고는 작은 대나무 상자를 꺼냈다.
“선물입니다.”
그러고는 다시 계단으로 달려갔다.
“선물……?”
아이리스는 묘한 설렘을 느끼며 상자를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57층, 무공을 연마하는 사당 곳곳에 굴러다니는 흔한 대나무 상자 같았다.
아이리스는 상자를 열어 봤다.
작은 쪽지와 무전기가 들어 있었다.
“이 무전기는……?”
관리국의 궤도 폭격용 무전기다.
원래는 일회용이고, 한 번 사용한 적 있으나, 은혁은 스킬의 힘으로 남은 사용 가능 횟수를 2회로 늘려 놓았다.
아이리스는 쪽지를 읽었다.
‘아이리스 님은 모든 관리자 중에서 가장 공정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대결에서 승리하여 총관리자가 되었을 때, 만약 제가 무자비한 폭군이 되어 세계를 멸망시키려 들거나 하는 경우, 이걸 작동해서 저를 공격하십시오. 위력을 최대로 설정해 뒀으니, 아마 제게도 타격이 클 겁니다.’
“……바보 같은 사람.”
은혁은 자신이 질 경우를 대비해서 부탁하는 게 아니라, 이기고 나서 과도한 폭군이 되는 경우를 대비할 안전장치를 넘긴 것이었다.
친구를 제외하면, 가장 냉철하고 공정한 관리자가 아이리스라고 믿었기 때문에.
“기왕 선물할 거면 좀 좋은 걸로 주지.”
* * *
은혁은 39층 어둠의 동굴에 도착했다.
“스으읍!”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둠이 폐부를 가득 채우자, 이것만으로도 체력과 마력이 완전 회복되고, 속력이 더 빨라졌다.
“38층으로!”
38층은 포격 지대.
피난민, 패망한 도망자들이 도망치는 땅 위에, 포격의 지고의 위상이 군림하던 곳.
지금은 스테이지가 많이 개변되어 산책로처럼 변해 있었다.
“듀얼 체인 소드로 막 업그레이드했던 시기에 왔었지.”
그때는 언제 100층까지 가나 까마득했었는데, 어느새 100층을 찍고 다시 내려오는 길이었다.
은혁은 씨익 웃고는 36층~37층 지역으로 갔다.
“오오!”
“어서 오시오!”
“위대한 용사여!”
폴링스트 왕국.
엘프들의 땅인 이곳에서, 은혁과 염훈은 정식으로 용사로서 활약했었다.
“다시 돌아온 걸 환영하오.”
국왕이 나서서 반겼다.
“아, 시간 없으니 환영사는 다음에 받죠.”
“어, 음, 그러시오. 그럼…….”
“대신 좀 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사고 싶은 것?”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
“가장 오래된 물건이라.”
국왕이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가장 긴 역사가 담긴 물건이라면, 왕궁의 앞을 밝히는 금속 화로인데.”
“완벽하군요. 그걸 사겠습니다.”
촤르르르륵!!
은혁은 막대한 양의 금화와 보석을 쏟아 냈다.
“그, 꼭 가져가셔야겠소?”
“네. 지금 제가 레이스 중인 거 아시죠?”
“그렇소. 총관리자와 달리기 시합 중이라고…….”
“이기려면 그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걸 막아야 합니다. 틀어막으려면 그냥 금이나 돌보다, 역사가 필요합니다.”
정보 생명체화 되었으니, 일반 금속으로 틀어막는 것보다, 엘프 기준에서도 매우 긴 역사가 담긴 물건으로 막는 게 더 효율적이다.
“으음, 그럼 가져가시오.”
“네, 그럼 사양 않고!”
은혁은 계단참 위에 선 채로 [사이오닉 필드]를 펼쳐, 멀리 있는 왕궁의 금속 화로를 떼어 왔다.
“[화염 지배].”
화르르륵!
허공에 띄운 금속 화로를 단숨에 녹여 버리더니.
“[금속 증식].”
스르르륵.
녹은 금속을 증식시켜 계단의 구멍을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