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5화
사람의 운명이란 게 참 얄궂다.
왜 세상을 살다 보면 여러 사람과 알게 되잖냐.
그중엔 나랑 맞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설사 나랑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쁜 것 아니다.
잘못한 것도 아니고.
단지 나랑 다를 뿐.
예를 들면 내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를 꼭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럴 의무도 없고.
서로의 인연이 아닌 것이다.
엇갈린 운명인 거지.
이건 누굴 탓할 문제가 아니다.
본인이 속으로 감내해야 할 뿐.
근데 뭐?
뭐라고?
“내 약혼자랑 바람난 놈이 누구라고?”
“도련님의 친구라고요.”
이건 경우가 다르다.
친구의 여자를 뺐다니.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물었다.
“내가 그놈이랑 친했나?”
말만 친구지.
별로 안 친했을 수도 있잖아.
“…….”
대답하지 않고 인상을 쓰는 정학우를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많이 친했나? 설마 죽마고우?”
“그것도 기억 안 나시는 겁니까?”
“전혀. 기억이 안 나니까 물어보지.”
후유, 긴 한숨과 함께 정학우가 말을 이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남들과 다르게 이십 대까지 연장하신 도련님의 유일무이한 친구라고 할 수 있었죠. 두 분이 술을 드시면 항상 어깨동무하고 외쳤습니다. 우리 우정은 영원할 거라고. 죽어서도 나란히 묻히자고.”
이거 알고 보니 더 등신이었구먼.
하필 뒤통수를 맞아도 하나뿐인 친구에게 맞다니.
에라, 못난 놈.
그래서 전생의 제운강은 사람을 쉽사리 믿지 않았다.
뒤통수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가?
믿음, 신뢰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믿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다는 말이다.
설사 발등을 찍으려는 놈이 있어도 피하면 되는 것이고.
어떻게?
애초에 믿지 않으니 피하기도 쉽다.
발만 뒤로 싹 빼면 되지.
‘머저리도 이런 상머저리가 없군.’
쯧쯧, 남 일 대하듯 혀를 차는 남궁정혁을 보며 정학우가 분개했다.
“연화 소저도 너무 합니다. 하필 붙어먹어도 도련님과 가장 친한 친구와 붙어먹다니. 여자가 생긴 게 다는 아닌가 봅니다.”
그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 여자가 그렇게 이쁘냐?”
“도련님은 그저 바라보기만 하셨습니다.”
“……?”
“매사 까칠한 도련님이 그분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숨긴다고 숨겼지만, 주변 사람은 다 알고 있었죠. 도련님이 연화 소저를 사모하신다고요. 그래서 그 마음을 알아챈 가주님이 신성상단에 매파를 보냈습니다.”
배신은 하는 놈의 잘못보다 당한 놈의 멍청함이 더 문제라는 게 전직 천마, 남궁정혁의 기본 이념이긴 하다.
아무래도 그래도 최소한의 상도가 있지.
세상의 수많은 여자를 두고 친구의 정혼녀를 뺐어?
남궁정혁이 이 대목에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풍상호를 어떻게 잡아 족쳐야 할지에 대해서.
하물을 잘라 그 여자에게 파혼 선물로 주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쯤, 저 멀리 맞은 편 쪽문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젊은 청년과 노인이었다.
청년은 세상 불만 많은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고, 하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그런 청년의 팔뚝을 잡고 말렸지만, 힘이 달려 거의 질질 끌려 오다시피 하고 있었다.
“공자님, 남의 집에 와서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남궁세가 무사가 아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저히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내 가서 단단히 따질 것이야,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공자님, 아버님께서 사과하고 오라고 단단히 이르지 않았습니까? 남궁세가와 척을 져 봐야 저희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아옹다옹하는 그들은 본 정학우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었다.
그도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던가.
하도 헬레레, 헤픈 웃음만 짓길래 마냥 순한 줄 만 알았더니.
특히 하얀색 옷을 입은 청년을 보는 눈빛이 매섭다.
정황상 저자가 아마도…….
“풍상호?”
“차라리 도련님이 기억을 잃어버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자와 함께했던 추억도 생각나지 않을 테니깐요. 그만큼 배신감도 들지 않고요.”
차라리 정신건강에는 이롭죠.
정학우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명만 내려 주십시오. 풍상호의 팔이든 다리든 당장 잘라 오겠습니다. ”
“내가 어제 말했잖냐,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사람이 아냐. 그리고 자르고 싶은 건 따로 있고.”
“풍상호 저자는 무공을 익혔습니다. 도련님께서 상대하기 버거울 것입니다.”
“남궁세가의 무공 중 가장 기본적인 게 뭐냐? 당장 시연해 봐라.”
“갑자기 왜요?”
“보고 배우게.”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닙니다.”
장난?
얘가 아직 나에 대해 파악이 덜 됐다.
나는 최소한 무공에 관해서 만큼은 농담한 적이 없다.
전생은 물론 현생에서도 그럴 것이고.
“농담하면서도 배울 수 있을 만큼 무공이 하찮은 것이냐?”
여느 때와 다른 진중한 표정과 말투.
그런 남궁정혁의 마음이 전달되었을까.
정학우가 검을 들고 무공 시연을 했다.
“고혼일검이란 초식으로 남궁세가 무공의 근본을 이루는 무공입니다. 이곳에서 검을 들고 있는 자라면 누구든 익히고 있죠.”
남궁정혁은 정학우의 움직임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유심히 관찰했다.
그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저장하기 위해.
“다시 해 보아라.”
명을 따른 정학우의 재시연이 끝내자마자 남궁정혁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초식을 복기한 후, 그 움직임을 분해, 재조립, 습득하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 그가 눈을 뜨자 정학우가 제 주인을 지키려는 듯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기특한 놈, 환생 후부터 느꼈지만, 충성심 하나만큼은 진국이라니까.
내가 남궁세가 가주가 되면 너부터 한 자리 챙겨주마.
“너 잘 만났다.”
정학우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째려보느라 접근하지 못하고 주변에서 서성이던 풍상호가 남궁정혁에게 대뜸 삿대질했다.
“왜 자살 따위는 시도해서 우리를 곤란하게 하냐? 너 때문에 우리가 가문에서 얼마나 곤혼스런 처지가 됐는지 아냐?”
“우리?”
“나와 연화 말이다. 사랑이 잘못이냐? 사랑이 잘못이냐고? 왜 자살 따위를 시도해서 우리를 궁지에 모냔 말이다.”
저런 후안무치한 새끼.
결손가정이 많아 가정교육 독학으로 하는 마교에서도 저렇게 뻔뻔한 놈은 없었다.
발정 난 개만도 못한 놈이 어디서 감히 큰 소리야.
딱히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남궁정혁이 풍상호의 하체를 향해 검을 쭉 뻗자, 그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비겁한 새끼야, 공격한단 말도 없이 기습이냐?”
“너는 말하고 바람피웠냐?”
남궁정혁은 전생에서 주로 권을 썼다.
남자가 싸우는 데 쩨쩨하게 어찌 무기를 들랴.
두 주먹 불끈 쥐고 당당하게 싸워야지,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타격감이 좋았다.
특히 마음에 안 드는 놈을 흠씬 두들겨 패 줄 때는 짜릿한 쾌감마저 느꼈다.
그가 권에 중독된 이유였다.
하지만 검의 명가, 남궁세가에서 태어났으면 싫든, 좋든 검을 써야겠지.
원래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법이기도 하지 않은가.
챙, 챙!
다만 생각과 다르게 시간은 좀 걸리겠다.
아직은 손가락 끝에 걸리는 검의 감각이 낯설었다.
그러니 아직도 저 풍상호란 놈을 제압하지 못했지.
하지만 그건 천하제일이라는 지고한 목표에 한 발자국이나 찍어 본 그의 기준이었고, 옆에서 저들의 대결을 지켜보는 정학우는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련님이 정말 무공을 펼친다니.’
만용이라 생각했다.
여자는 뺏긴 남자의 찌질한 자존심.
그것을 지키기 위해 되지도 않는 떼를 쓰는 거라 여겼는데 진짜로 무공을 익혔을 줄이야.
그것도 체 일각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내가 보는 게 현실인가?’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단 두 번만 보고 무공을 익힐 수 있지?
그렇다고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부정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가장 괴이한 것은.
‘남궁의 검이지만 남궁의 검이 아니다…….’
본디 공작새가 날개를 펼친 듯 화려한 것이 남궁세가 무공의 특징이다.
무공의 강함을 떠나 그 특유의 멋스러움에 매료되어 남궁세가 무사가 되길 희망하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
“…….”
근데 뭐냐?
도련님의 저 요사스러운 검술은.
저것이 정녕 남궁세가의 무공이란 말인가?
저것은 남궁세가의 검술이 아니다…… 라고 단정 짓기에는 초식의 기본 틀은 분명 고혼일검이 맞다.
똑같은 무공을 저렇게도 다른 느낌으로 변형시킬 수 있을 줄이야.
굳이 비유하자면 명문가의 단정하고 잘생긴 도련님이 뒷골목에서 침 뱉는 한량이 된 느낌?
“…….”
한 가지 확실한 건 도련님의 검이 날카롭고 위협적이란 거다.
옆에서 보는 사람도 그렇게 느끼는데 직접 당하는 사람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저 풍상호의 당황해 놀란 표정을 좀 보라.
‘정혁이가 언제 무공을 익혔지?’
챙챙챙!
남궁정혁의 검이 쉬지 않고, 풍상호를 노렸다.
특히 하체를 집중적으로.
부위가 부위인 만큼 단 한 방으로도 치명적일 수 있다.
자칫하단 사내구실을 못 할 수도 있단 말이다.
그러니 사력을 다해 피할 수밖에
“네 놈의 눈에 거기밖에 안 보이냐?”
왜 여기만 공격하냐고!
풍사호가 항의했지만 남궁정혁이 그런 걸 신경 쓸 성격인가?
설사 상대가 부모 욕을 해도 흥분하지 않고 침착할 것이다.
애초에 부모가 없으니.
지금은 오히려 더 좋아할걸.
남궁도를 욕한다고.
“네놈도 한번 당해 봐라.”
이렇게 공격 한번 못 해 보고 질 수 없다.
풍상호도 반격에 나섰다.
그도 남궁정혁의 하체를 공략했다.
풍상호가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요즘 검술 좀 배웠나 본데, 무공이 하루 이틀 만에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잘 아네, 그래 맞아.
무공은 하루 이틀 만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지.
네 어설픈 무공이 하루 이틀 만에 느는 게 아닌 것처럼.
챙!
남궁정혁이 손목을 가볍게 흔드는 것만으로 풍상호의 검을 쳐 냈다.
이어지는 그의 공격.
남궁정혁의 검은 이번에도 풍상호의 하체를 노렸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다.’
풍상호는 낭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뒷걸음질 쳤다.
예상외로 날카로운 남궁정혁의 집요한 공격을 감당하기 힘겨웠기 때문이다.
“크흑.”
결국, 허벅지에 검을 찔린 풍상호가 무릎 꿇었다.
아마 마지막 순간에 필사적으로 허리를 비틀지 않으면 거길 찔렀을지도.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자, 이제 심판의 시간이다.”
풍상호 앞에 선 남궁정혁이 오만한 표정으로 검을 위, 아래로 까닥이며 말을 이었다.
“머리냐? 그거냐?”
“……뭐?”
“네게 선택권을 주는 거다. 원래는 둘 다 자르려고 했는데 하나만 잘라 줄게. 어떤 걸 선택할래.”
“그게 곧 혼인할 사람한테 할 소리냐! 이, 이 극악무도한……!”
남궁정혁이 풍상호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순간.
“그만해요!”
갑자기 나타난 여인이 풍상호를 보호하듯 품에 안았다.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