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9화
팽, 남궁정혁이 코에 풀자 피 묻은 목화솜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싸워서 내가 이기는 거 봤지?”
“…….”
정학우는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떨어진 목화솜을 주워 남궁정혁의 코를 다시 틀어막았다.
“아직도 코피 납니다. 계속 대고 있으세요.”
반곤, 개자식.
가벼운 주둥아리와 달리 제법 실력은 있는 놈이었다.
회심의 뒤통수 공격을 피하다니.
그 한 방으로 놈의 삐뚤어진 정신을 바로잡아 주려 했건만.
아쉽게도 이 몸에 아직은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것 같다.
“아무튼, 내가 이긴 거야.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어. 학우야, 내 말이 맞지?”
“…….”
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보지 않겠다는 듯 막무가내로 덤비는 남궁정혁 때문에 정학우는 정말 놀랐다.
아무리 도련님이 막 나간다고는 하지만, 직장 상사이자 세가의 주요 인물인 반곤을 먼저 공격할 줄이야.
작금의 사태는 가주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쉽게 수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물며 그는 얼자 아닌가.
이번 일을 트집 잡아 무슨 요구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도련님이 반곤과 대등하게 겨루다니.’
그렇다고 반곤이 봐준 것도 아니다.
도련님의 기습에 눈이 돌아간 그도 전력으로 상대했다.
주변에 검이 있었거나 주위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말리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는 지금쯤 저승사자와 만났으리라.
“반곤, 운 좋았어.”
도련님은 그 사람이 당연히 자기가 아닐 거라 여기지만.
자신감 하나만큼은 천하제일이다.
“오늘은 이긴 거로 만족하지. 담에 만나면 죽었어.”
“무승부입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편파 판정을 하는 거야?”
“도련님은 코피가 났고 반곤은 앞니가 빠졌으니 당연히 무승부지요.”
팽.
가소롭다는 듯이 웃은 남궁정혁이 다시금 목화솜을 콧구멍에서 발사했다.
“자, 봐라. 아직도 코피가 나냐?”
“멈췄습니다.”
“반곤의 앞니는? 내가 부러뜨린 앞니는 새로 날 것 같냐?”
“아니요.”
“그럼 누가 이긴 거냐?”
“……도련님이요.”
“그렇지. 이제야 네가 바른말을 하는구나.”
한껏 득의만만한 그에게 정학우가 은근슬쩍 다가갔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남궁정혁이 계속 코피를 흘리고 있었으니.
하지만 지금은 기회.
남궁정혁의 기분이 좋은 것 같으니까.
정학우가 조심히 물었다.
“근데, 그거 어떻게 하신 겁니까?”
“뭘?”
“도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마치 상대가 어딜 어떻게 공격할지 내다보는 것 같습니다.”
“공짜로 알려 달라고?”
분명 그랬다.
도련님과 반곤의 공력 차이는 컸다.
무공뿐만 아니라 힘, 속도, 체격 등 모든 것에서 반곤이 앞섰다.
하지만 도련님은 귀신 들린 듯 신기한 발재간으로 그의 모든 공격을 피했다.
재수 없게 옆으로 피하다가 벽에 부딪히지만 않았어도 코피 흘린 일도 없었겠지.
특히 밉살스러운 반곤의 품 안으로 파고들던 현란한 움직임은 눈으로 직접 봤지만 따라 할 엄두가 안 날 정도다.
아마 도련님의 내공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앞니 하나가 아니라, 얼굴이 불어 터진 찐빵처럼 망가졌으리라.
“에이, 왜 그러십니까. 대장로님에게 반곤이 있다면 도련님에겐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에게도 그 비법 좀 가르쳐 주십시오.”
정학우가 어깨를 토닥이며 아부하자 남궁정혁이 큰 인심 쓴다는 듯 말했다.
“상대의 눈과 발끝을 보면 된다. 그 방향을 알면 어딜 공격할지 쉽게 유추할 수 있지.”
“……그게 답니까?”
귀찮다고 너무 대충 대답하는 거 아니냐고요.
정학우의 말에 남궁정혁은 당연히 그게 다가 아니라는 듯 이어 말했다.
“하지만 초절정 고수를 상대할 땐 조심해야 해. 오히려 이걸 이용해 속임수를 쓸 수 있거든. 어때, 참 쉽지?”
“…….”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한 고향 친구가 있다.
비결이 뭐냐 물으니 서당에서 배운 책을 중심으로 예습, 복습만 철저히 하면 된다고 했던가.
왜 그 재수 없는 놈의 얼굴이 도련님의 얼굴 위로 겹쳐지는 걸까.
저 ‘이걸 왜 모르지?’라는 듯한 얼굴도 똑같아서 한 대 쥐어박을 뻔했다.
“그나저나 범인은 언제 잡습니까?”
“범인? 벌써 찾았어.”
“……?”
언제 어떻게요?
* * *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다.
나쁜 짓을 하면 죄책감 때문에 속이 조마조마하여 겉으로 티를 낸다는 뜻이다.
그럼 여기서 질문.
파검을 횡령하고 가주의 아들을 죽이려 한 자의 지금 심정은 어떨까?
“당연히 목이 바짝바짝 타고 물도 잘 안 넘어가지 않을까요?”
그렇지. 자신이 죽이려 했던 자가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는 해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돌아다니면 얼마나 똥줄이 타겠는가.
아무리 철로 만든 심장이어도 순간의 감정과 표정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호라.”
정학우가 무릎을 탁, 치며 말을 이었다.
“도련님이 대장간 내부를 수차례 왕복한 이유군요.”
“딱 세 명 있었다.”
“뭐가요?”
“내가 지나갈 때마다 매번 놀라며 나의 눈치를 살핀 사람이.”
“그들이 유력 용의자군요.”
“그렇겠지. 첫 번째 용의자는 녹인 쇳물을 주조 틀에 붓는 사람이었다.”
“아! 혹시 머리가 벗겨진 대머리를 말하는 겁니까?”
“맞다.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화들짝 놀라 어쩔 줄 모르더군.”
“그 사람이 도련님을 두려워한 것은 예전의 그 일 때문일 겁니다.”
“그 일?”
뭔가 생각났다는 듯 정학우가 설명했다.
“예전 그 사람이 쇳물을 붙다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도련님 옷에 튀어 구멍을 낸 적이 있습니다. 화난 도련님이 그 사람의 머리를 붙잡고 뜨거운 화로에 집어넣으려고 했죠. 그때 머리에 불이 붙어 머리카락이 홀라당 다 타 버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지 않나?”
“그때의 충격이 컸는지, 아님 화로의 열기에 모근이 상했는지 다시는 안 난다고 하더라고요.”
저런, 안타깝네.
아직 나이도 젊어 보이던데.
“생각해 보면 원한으로 인한 살인 동기는 충분하네요. 평생 머리만 보면 도련님을 죽이고 싶을 거 아닙니까.”
“……하지만 그자는 범인이 아니다.”
“어째서요?”
“자고로 횡령도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법이다. 허드렛일을 하는 일개 잡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음, 그럼 두 번째 사람은요?”
“수레에 실린 검의 수량을 확인하던 자다.”
“아하, 물품을 검수하는 양적 님을 말하는 거군요.”
“내가 지나갈 때마다 내 눈길을 피하며 다른 일을 하는 척을 하더군.”
“그분도 도련님에게 좋지 않을 감정을 품고 있을 겁니다.”
얘는 또 왜?
일전에 내가 없어지면 좋아할 만한 사람을 물었을 때 정리하는 데에 삼 일은 걸린다고 하더니 거짓말이 아니었나 보다.
오히려 삼 일이면 양호한 거지 않을까.
“이번엔 무슨 일로?”
“근무 중에 술을 마셔 도련님께 크게 혼난 적이 있거든요.”
난 또 뭐라고.
혹시 또 뭔가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줄 알았다.
근데 이번엔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근무 시간이면 당연히 일해야지, 본인이 잘못한 일 때문에 원한을 품어?”
“먼저 마시자고 한 사람이 도련님이었으니깐 그렇죠. 혼자 마시기 심심하다고 일하는 사람을 억지로 앉혀서는 술을 먹였습니다. 그러곤 만취한 도련님이 어디 감히 근무 중에 술을 마시느냐고 꾸짖고는 징계까지 내렸습니다.”
왜 이 인간의 과거를 알면 알수록 내가 부끄러워지는 거냐?
왜 내가 책임져야 할 것 같냐고.
휴, 한숨과 함께 남궁정혁이 물었다.
“무슨 징계?”
“감봉 6개월이요.”
어째 내가 지나갈 때마다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하더라.
앞으로라도 잘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정학우가 침까지 튀겨 가며 더욱 열심히 말했다.
“더구나 양적 님은 도박을 좋아해서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범행을 저지를 만한 원한과 금전적인 이유는 충분하군.”
“게다가 횡령할 수 있는 위치에도 있고요.”
“하지만 저자 역시 범인은 아니다.”
“또 왜요?”
“비록 얼자라지만, 가주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을 만큼 대범한 짓을 저지른 자다. 그러나 그자는 소심해. 미간이 좁고 입술이 가는 자들이 보통 그렇지.”
“이제는 관상까지 보십니까?”
“경험이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지.”
전직 천마로서 셀 수도 없이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겪었다.
생긴 게 다는 아니지만 대체로 인물값은 하더라고.
웬만한 관상가보다는 내가 훨씬 낫지.
“그럼 마지막 사람은 누굽니까?”
“아까 반곤 바로 뒤에 서 있던 턱수염.”
“장기호 님 말이군요. 품질관리부 부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부부장이라면…….”
“도련님 바로 아랫사람이자 실질적으로 품질관리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도련님을 견제하기 위해 반곤이 꽂은 자죠.”
정학우가 말하다 말고 뭔가를 깨달았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저도 도련님과 같이 있었지만, 장기호 님은 앞서 말한 자들과 달리 별로 놀라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그거다.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다.”
“……?”
“사고를 당한 내가 별다른 기별도 없이 이곳, 대장간에 갑자기 나타났으니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냈겠느냐?
“범인이 아니라더라도 의외라는 듯 쳐다보겠죠. 조금이라도 놀랄 만하니까요.”
“그게 일반적인 반응이지. 한데 그 사람은 담담하더구나. 그는 대장간에서 날 보고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일부러 표정 관리를 했단 말이군요. 그래도 그것만으로 범인이라고 단정 짓는 건 너무 성급한 거 아닐까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있다.”
“뭡니까?”
남궁정혁은 한껏 무게 잡고 말했다.
“직감. 나의 감이 말하고 있다. 그가 범인이라고.”
“……도련님을 옆에서 오랫동안 보좌한 사람으로서 충고하자면 자기 자신을 너무 믿지 않은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 정도 되면 믿어도 돼.”
마교에서 가장 먼저 죽어 나가는 사람이 누굴까? 무공이 약한 사람?
그럴 것 같지만, 아니다.
가장 먼저 죽는 사람은 눈치 없이 나대는 놈이다.
자꾸 자랑하는 것 같아서 웬만하면 말 안 하려고 하는데 난 그런 마교에서 최정상에 섰던 사람이고.
그것도 맨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내 무공이 탈마의 벽을 두드렸다면 눈치는 이미 생사경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근데 정학우가 여전히 내 말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듯 쳐다보네?
“그렇게 확신이 있다면 진즉에 장기호 님을 잡지 않고요? 도망이라면 갔으면 어찌합니까?”
“쯧쯧, 그래서 네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수긍하지 못하는 정학우를 두고 남궁정혁이 계속 말했다.
“그런 짓을 저지른 대범한 놈이 인제 와서 도망칠 것 같냐? 이럴 때일수록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듯 더욱 평소대로 행동하겠지.”
“그러면 그는 왜 도련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코피도 완전히 멈췄겠다, 남궁정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품질관리부 부장실을 나갔다.
장기호를 만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