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16화
이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남궁정혁은 그리 믿었다.
그가 세상을 살면서 깨우친 진리이기도 하다.
인생을 살다 보니 그렇더라고.
이 세상엔 공짜가 없다고.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무언갈 베풀려고 한다?
그럼 그걸 덥석 받을 게 아니라 의심부터 해라.
그 속에 담긴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말이다.
그 사람이 당신과 평소 사이가 나빴다면 더더욱.
그래서 남궁정혁은 남궁수가 내민 주머니를 받지 않았다.
그저 빤히 내려다볼 뿐.
“뭐 하나? 어서 받지 않고.”
남궁정혁이 재촉하는 남궁수에게 물었다.
“이게 뭡니까?”
“노잣돈이다.”
노잣돈?
……뭔가 찝찝한데.
노잣돈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먼 길 오가는 데 쓰라고 주는 용돈.
두 번째는 죽은 사람 저승길 편히 가라고 주는 돈.
근데 두 번째 의미로 느껴지는 건 내가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봐서일까?
아니면 저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참는 면상을 봐서 그런 걸까?
“……길 편안히 가시게.”
어이 남궁수.
발음 똑바로 해.
방금 맨 앞에 저승이라는 단어를 얼버무린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었나?
“크흠, 안 받고 뭐 하나?”
남궁정혁이 일단 가죽 주머니를 받았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다만 돈은 잘못이 없으니까.
공짜로 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지.
“많이도 주시는군요.”
받아 보니 무게가 묵직한 게 적은 돈은 아닌 듯했다.
하긴, 남궁세가의 돈줄을 남궁수가 쥐고 있다고 했지.
남궁정혁이 가죽 주머니를 품속에 넣자, 남궁수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네 큰아버지 아니냐. 부족하지 않게 넉넉히 넣었다. 하하하.”
기분 좋은 남궁수를 향해 남궁정혁도 미소 지어 주었다.
“그런 거라면 감사히 잘 받지요.”
돈까지 줬는데 이 정도 접대쯤이야 뭐가 어려울까.
“그래, 그래. 잘 가거라.”
“예, 잘 다녀오지요.”
공짜 돈이 생겨서 기분 좋은 남궁정혁.
앓던 이가 빠질 것 같아 기분 좋은 남궁수.
그들은 서로를 향해 가시적인 웃음을 지어 주었다.
“도련님, 어서 마차에 타십시오. 지금 출발합니다.”
짐 정리는 다 끝났나?
정학우가 모는 마차가 남궁세가의 정문을 통과했다.
* * *
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리는 한가한 밤.
가주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툇마루로 나온 남궁도가 하늘에 뜬 보름달을 바라봤다.
“…….”
단순히 야밤의 정취를 즐기는 것이 아니다.
괜히 어수선한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가주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가주님.”
“자네가 이 시간에 웬일인가? 잠에 들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온 모단수가 손에 든 술병을 흔들었다.
“가주님께서 잠을 못 이루실 걸 알고 말동무나 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어허, 내 속을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고 있구먼.”
그동안 함께 지낸 세월이 헛되진 않았나 보다.
고맙기도 하고.
이 밤중에 심란한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먼저 찾아와 주다니.
모단수가 잔에 술을 따라 남궁도에게 건넸다.
“강혁 도련님이 첫 무림 출두할 때도 요즘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셨잖습니까.”
“강혁이와 정혁이가 같나.”
“똑같은 가주님의 아들이지요.”
“강혁이와 달리 정혁이는 더 걱정되는군. 나온 배가 달라서 그런가, 어찌 그리 둘이 다른지…….”
남궁도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아들이자 장남, 남궁강혁.
둘째 아들이자 막내, 남궁정혁.
“화전민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볼 때 그 산적들은 녹림칠십이채에도 들지 못하는 잡스러운 놈들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무림 첫 출두 상대로 권하긴 했네만.”
다 큰 자식 언제까지 품 안에 끼고 살 수는 없는 법.
세상에 나가 제 뜻을 펼칠 기회를 줘야 했다.
그렇다고 너무 강한 상대는 염려스럽다.
아직 정혁이의 경험이 많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런 아들에게 이번 상대는 딱 맞지 않을까.
족보도 없는 잡스러운 산적이니.
“…….”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왜 이리 불안할까.
자신이 그리 걱정이 많은 성격도 아닌데.
“정혁 도련님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잖습니까, 분명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야 할 텐데.”
한편 그 시각.
남궁수와 모단수의 염려도 소용없이 남궁정혁은 이번 생애, 첫 배신을 당했다.
“……이게 정녕 너의 선택이냐?”
남궁정혁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그럴 수 있단 말이냐.
핏발 선 남궁정혁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정학우가 고갤 돌렸다.
“이럴 수밖에 없는 절 용서해 주십시오.”
이래서 사람을 함부로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천마일 때도 안 맞은 뒤통수를 여기서 맞을 줄이야.
* * *
계양현 팔용산으로 가는 길은 무탈하고 순조로웠다.
날씨가 화창하고 도로도 평탄하게 쭉 뻗어 있으니 무탈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좁은 마차에 오랫동안 앉아 있느라 갑갑하고 엉덩이가 좀 배기긴 했지만 뭐…… 애처럼 투정 부릴 나이도 아니고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게다가 이것도 있지 않은가.
“캬, 좋다.”
빈속에 술을 들이켜자 알싸한 주향의 풍미가 더욱 진하게 올라온다.
역시 술은 낮술이야.
천마일 때도 낮술을 즐겼다.
낮에 마시는 술은 부모도 못 알아본다는데, 애초에 알아볼 부모도 없었다.
천애고아라서 좋았던 점은 이거 딱 하나다.
좋은 점은 아닌가?
어쨌든, 천마쯤 되면 낮에 딱히 할 일도 없거든.
유능한 부하들이 다 처리해 주기도 했고.
“술술 넘어간다~”
술은 옥화루주 묘화가 선물한 것이다.
내가 먼 길 떠난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술을 한 상자 보냈더라고.
그것도 내 취향에 맞는 비싼 거로만.
“묘화가 낭만을 아네.”
잔잔히 흔들리는 마차 지붕에 앉아 보드라운 햇살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니 쫙쫙 넘어간다.
혼자 마시기 미안해서 정학우에게도 한 모금 하라니 안 마신다고 한다.
“저는 마차를 모는 중입니다. 음주운행은 안 됩니다.”
고지식한 놈.
엄백산은 마시고 싶지만, 자존심상 차마 달라고는 말하지 못하는 눈치다.
어차피 달라고 해도 안 줄 거지만.
이 좋은 건 나 혼자 다 마셔야지.
그렇게 비몽사몽, 여행의 낭만에 취하길 칠 일째, 술이 다 떨어졌을 때쯤 계양현 근처에 도착했다.
“저기가 팔용산인가.”
저 멀리 우뚝 솟은 산이 보인다.
꼭대기가 높고 골이 깊은 게 생각보다는 크다.
딱 산적이 살기 좋게 생겼네.
“도련님,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내일 팔용산을 오르지요.”
팔용산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는 객잔에 마차를 세웠다.
아까 낮에 잠시 길을 헤매 이곳에 사는 주민에게 물으니 가는 길과 함께 추천해 준 객잔이다.
이 근방에서는 요리로 유명한 맛집이란다.
본격적으로 몸풀기에 앞서 오늘 하루 정도는 제대로 먹고 휴식을 취해 볼까.
남궁정혁은 아무런 의심 없이 객잔 안으로 들어갔고 이때만 해도 몰랐다.
이번 생애, 첫 배신을 당할 줄은.
* * *
주문한 그 요리가 나왔다.
당초육, 이 객잔에서 가장 잘하는 음식이란다.
과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에서 고소한 향이 풍기는 게 벌써 입에 침이 고인다.
빨리 먹고 싶네.
음식은 따뜻할 때 먹어야 더 맛있으니까.
남궁정혁이 전분을 풀어 걸쭉하게 만든 새콤달콤한 양념을 당초육에 부으려고 할 때였다.
“잠깐.”
엄백산이 그런 그를 제지하며 역정을 냈다.
“자네, 내가 웬만하면 이런 말을 안 하는데, 지금 뭐 하는가?”
“보면 모릅니까, 양념을 부어야 당초육을 먹을 것 아닙니까.”
“어허, 이 사람. 이곳에 오는 동안 혼자서 술을 마실 때부터 알아봤지만, 음식에 대한 기본 예의가 없군. 당초육은 양념에 찍어 먹는 음식이야. 그래야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있지.”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누가 누굴 보고 예의가 없대?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자살한 게 아니라 타살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 더 황당하다.
당초육은 당연히 부어 먹어야지.
“튀김 피에 양념이 푹 베어 고기까지 닿아야 당초육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걸 모르는 걸 보니 그동안 나이를 헛먹었나 봅니다.”
“당치도 않은 소리! 양념을 찍어 먹어야 튀김 피의 바싹한 식감을 느낄 수 있어, 자네야말로 아직 나이가 어려 견문이 짧군.”
저 늙다리가…….
저 애송이가…….
남궁정혁과 엄백산, 두 사람 사이에 뜨거운 불꽃이 튀었다.
서로를 노려보는 눈길에선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결의까지 엿보였다.
“부어서 먹죠.”
“찍어서 먹게.”
타협할 수 없음을 깨달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정학우를 쳐다보았다.
“네가 결정해라.”
“일대일이니 선택권을 자네에게 주지.”
남궁정혁은 정학우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가.
그는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남궁세가의 수치니 칠푼이니 불리며 갖은 수모를 당할 때도 곁을 지켜 준 의리의 사내다.
남궁정혁은 그런 충심을 남수단 부단주 직위로 보답했고.
남궁도는 못 믿어도 정학우는 믿을 수 있다, 남궁정혁은 그렇게 생각했고 이번에도 당연히…….
“……도련님, 죄송합니다.”
“……!”
“저는 이제껏 양념을 부어서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충격이다.
잠시 고민하던 정학우가 양념이 담긴 그릇을 당초육과 나란히 놓았다.
“저도 찍어 먹는 게 좋습니다.”
“……이게 정녕 너의 선택이냐?”
남궁정혁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그럴 수 있단 말이냐.
핏발 선 남궁정혁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정학우가 고개를 숙였다.
“이럴 수밖에 없는 절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할 수 없고 겸상할 수도 없다.
혼자 옆 탁자로 자리를 옮긴 남궁정혁이 호기롭게 외쳤다.
“주인장, 여기 당초육 하나 더.”
하지만 더 절망스러운 주인장의 대답.
“죄송합니다, 손님. 재료가 다 떨어져 당초육을 새로 만들 수 없습니다.”
빠각!
남궁정혁이 손에 쥔 젓가락을 부러뜨렸다.
분노에 찬 그는 맨밥만 먹었다.
그것도 찬물에 말아서.
“…….”
여기서 더 괘씸한 건 정학우의 저 태도다.
“어우, 이 집 당초육이 정말 맛있네요.”
그렇게 맛있으면 좀 먹어 보라고 권하든가.
저 혼자만 쩝쩝대면서 먹어?
내가 찬물에 밥 말아 먹는 걸 보면서도.
‘네가 권했다면 못 이기는 척 한두 점 정도는 먹을 수도 있었다고.’
환생 후, 가장 크게 마음의 상처를 받은 남궁정혁은 곧바로 이 층 객실로 올라가 자는 바람에 듣지 못했다.
다른 탁자에 앉은 손님들이 나누는 대화를.
“아까 낮에 춘삼이를 만났는데 그가 그러더군. 녹림의 주인이 바꿨다고.”
“녹림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그게 무슨 소린가?”
“아 글쎄, 반란이 일어나 녹림칠십이채의 대채주 주인 자리가 바뀌었대.”
“못 배우고 무식한 산적 놈들 주인이 바뀌건 말건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자네나 나나 관련도 없고.”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도망친 전 채주의 측근들이 민가에까지 내려와 설치고 다니나 보더라고.”
“그게 정말인가? 우리 같은 양민들에게는 피해가 없어야 할 텐데…….”
고단한 삶 속에서 피어난 불안을 달래느라 그들이 서로의 잔에 가득 술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