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17화
“이게 다냐?”
험상궂게 생긴 산적이 검을 들었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녹슬고 날도 제대로 서지 않은 불량품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히익, 저, 정말 그것밖에 없습니다.”
힘없는 화전민 마을 주민들을 위협하기에는 말이다.
그들은 몸을 벌벌 떨며 자신들을 위협하는 산적들을 두려워했다.
어찌 그러지 않을까.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떨어지는 어린아이에게는 동네 똥개가 호랑이만큼 두려운 법.
무력한 화전민 마을 주민들에게는 비록 녹슨 검일지라도 그것을 들이대며 눈알을 부라리는 산적들이 주는 위압감과 공포가 천하제일 고수가 주는 그것과 크게 다름없었다.
아침부터 쳐들어온 산적들의 횡포 앞에 화전민 마을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손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할 때였다.
“보름 전에도 와서 곡식을 털어 가지 않았습니까?”
허리가 굽은 노인이 용기 내어 앞으로 나섰다.
그래도 그가 이 마을을 대표하는 촌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또 와서 곡식을 내놓으라면 우린 뭘 먹고 삽니까?”
“그거야 니네 사정이고.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굶을 수는 없잖아. 우리도 갑자기 식구가 늘어서 먹을 게 더 필요해. 그러니까 마을 안에 있는 곡식 다 가져와.”
촌장이 바닥에 놓인 쌀, 옥수수, 감자 등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산적들의 닦달에 주민들이 내놓은 저것들이 마을에 남은 마지막 곡식이다.
저것마저 없다면 화전민 마을 주민들, 약 오십 명은 보리를 수확할 초여름까지 쫄쫄 굶어야 한다.
그런데도 부족하다고 더 내어놓으라니.
‘우리보고 굶어 죽으라는 소리지.’
촌장이라고 산적의 무자비한 수탈 앞에 어찌 자구책을 강구해 보지 않았겠는가.
관에도 사람을 보내 관병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돈만 밝히는 탐관오리는 가난한 이들의 고난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래도 이들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우리가 모신 그분만 오시면…….’
그건 산적 퇴치 의뢰였다.
산적들의 지속된 수탈에 시달리던 마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결단을 내렸다.
앞으로 계속 야금야금 뜯기며 시달리느니 큰 거 한 방으로 해결하자고.
그래서 온 마을 주민들이 숨겨 두었던 쌈짓돈까지 탈탈 털어 금자 서른 개를 모았다.
가진 사람이 보기엔 하찮은 금액일 수도 있지만, 그 돈이 마을의 전 재산이자 구명줄이었다.
그 돈으로 초빙한 고수만 오시면 저 흉포한 산적들을 물리쳐 줄 것이리라.
‘곧 오실 때가 됐는데…….’
그야말로 마을의 존폐가 달린 의뢰였다.
그저 마을이 금자 서른 개와 같은 가치라는 게 속상할 뿐이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아무 죄 없는 촌장이 산적들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일주일, 단 일주일만 버틸 수 있는 곡식은 남겨 주십시오.”
“일주일? 왜 하필 일주일이야? 그때가 되면 먹을 게 새로 생기나?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야?”
한 젊은 산적이 손가락으로 촌장의 이마를 꾹꾹 찌르며 추궁할 때, 다른 산적이 촌장 집에서 손에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나왔다.
“허허, 집 안을 뒤져 보니 이런 게 나오네.”
“……!”
그걸 본 촌장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저걸 어찌 찾았단 말인가?
방바닥을 뜯고 그 안에 숨겨 두었던 것인데!
“그, 그건 안 된다!”
이 마을 최후의 희망, 금자를 들고나오는 산적에게 촌장이 달려들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비켜!”
“크헉!”
오히려 그의 발길질에 촌장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돈을 이렇게 숨겨 두고 있었으면서 우릴 속여?”
퍽퍽!
산적은 거짓말이 괘씸했는지 거친 발길질로 촌장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겁에 질린 마을 사람 그 누구도 그걸 말리지 못했다.
그 참담함에 촌장은 절망했다.
‘우리가 죄인이다. 스스로 지킬 힘을 갖추지 못한 우리가 죄인이야.’
저 돈마저 없다면 이 마을의 미래는 어찌 될 것인가?
마을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끅끅,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촌장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놈들아! 차라리 죽여라. 그 돈을 가져가려거든 나를 죽이고 가져가라.”
“그럼 그럴까? 곧 죽을 노인네 목숨값치곤 꽤 많은 돈이군.”
한바탕 웃어 재낀 산적이 망설이지 않고 검을 내리치려고 할 때였다.
“이놈들, 멈춰라.”
한 남자가 화전민 마을로 뛰어들었다.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다니 내가 용서할 수 없다.”
“……?”
누구지?
지금 검을 들고 산적과 당당히 맞서는 저 젊은 청년은.
자신들이 초빙한 고수는 분명 나이 지긋한 중년 사내로 알고 있는데.
* * *
“도련님.”
“…….”
“도련니~임.”
“자꾸 그렇게 친한 척 부르지 마라. 지금 너랑 얘기할 기분 아니니까.”
“고작 그런 일로 아직도 삐쳐 있으면 어떡합니까?”
고작 그런 일? 고작 그런 일이라고?
네가 상처 입은 사내의 마음을 아냐.
“인제 그만 화 푸십시오. 계속 그러면 남자가 쪼잔해 보입니다.”
게다가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저 태도가 더 괘씸하다.
그래서 남궁정혁은 팔용산을 오르는 동안 정학우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한가하게 잡담 나눌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
‘생각보다 산이 더 험하구나.’
새벽에 출발하여 산에 오른 지 두 시진은 거뜬히 지난 것 같다.
그럼에도 아직 화전민 마을에 도착하지 못했다.
구불구불한 산길이 험하여 마차를 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말에 필요한 짐만 실어 이동했다.
이것 때문에 시간이 더 지체되긴 하지만.
말이 경사가 급한 산길을 두려워하여 통제를 잘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불과 수저, 요강을 버리고 갈 수도 없고.
그것들은 꼭 필요한 생활필수품이다.
“도착했습니다. 저곳이 화전민 마을인가 봅니다.”
반 시진쯤 더 갔을까.
정학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당장이라도 폭삭 주저앉을 것 같은 허름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 보인다.
“……응? 저건 뭐냐?”
한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딱 봐도 불법적인 일에 종사할 것 같은 비호감 외모의 사내들 대여섯 명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다.
그 앞에는 검을 가진 청년이 서 있었고.
다툼이 있었던 걸까?
그들이 마을로 들어서자 주민들이 경계심을 드러냈다.
“의뢰를 받고 산적을 퇴치하러 왔습니다.”
정학우의 말에 얼굴이 밝아진 촌장이 대표로 나와 인사했다.
“이곳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학우가 눈짓으로 바닥에 누워있는 사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들은 누구이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촌장은 자신들을 괴롭힌 산적들을 일망타진한 청년의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산적들이 썩은 통나무처럼 픽픽 쓰러졌다고 한다.
촌장이 설명이 끝날 때쯤 청년이 먼저 인사했다.
“저는 서문호라고 합니다.”
“문호 소협도 의뢰를 받고 이곳에 온 겁니까?”
“……서문이 성이고 이름은 호입니다.”
“아, 서문이라면?”
“맞습니다. 제가 서문세가의 마지막 후손입니다.”
아,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정학우가 남궁정혁에게 귀띔했다.
“서문세가는 한때 오대세가를 위협할 정도로 저력이 있는 문파였지만, 이십 년 전 있었던 정마대전 때 멸문했습니다.”
나도 알아.
내 손으로 멸문시킨 문파를 모를까 봐.
끈질기게 저항하는 서문세가의 현판은 내가 직접 부쉈다.
근데 그는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을까?
촌장의 말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우리처럼 의뢰를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연히 지나가기에 이곳은 너무나 깊은 숲속이다.
남궁정혁이 가진 의문을 정학우도 똑같이 느꼈나 보다.
정학우가 서문호에게 물었다.
“한데 어찌 이곳까지 온 겁니까?”
“놈들은 쫓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뭔 놈들?
“극악무도한 살인마들이죠.”
* * *
남궁정혁은 깨달았다.
서문호와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지만, 그는 자신과 맞지 않는 부류의 인간임을.
왜냐고? 관상이 안 좋아서?
천만에.
넓은 이마는 반듯하고 쭉 뻗은 코는 시원하다.
게다가 눈 밑 살이 도톰한 것이 남을 돕고 콩 반쪽이라도 베풀 상이다.
의리가 있고 정의도 있는 것이다.
한데 그것도 정도가 있지.
‘너무 지나치단 말이야.’
예전 공자라는 머리가 대단히 똑똑한 양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과유불급이라고.
과유불급(過猶不及).
그러니까 정도가 지나침은 모자란 것과 같다는 말이다.
술잔에 술을 따르는데 절반만 따르는 사람이 있고, 넘치도록 따르는 사람이 있다.
누가 더 예의 없는 놈인가?
둘 다 예의 없는 놈이다.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난 거랑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가 난 거랑 어떻게 더 나쁜 상황인가?
둘 다 나쁜 상황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서문호가 딱 이런 유형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건 지금 그가 정학우와 나누는 대화만 들어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저는 전국을 떠돌면서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아까 말한 살인마는 뭡니까? 팔용산에 살인마가 있다는 겁니까?”
“이곳으로부터 사흘 거리에 있는 대청현에 작은 장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던 어떤 악독한 무리가 장원에 살고 있던 일족들을 모조리 살해했습니다. 그놈들을 추격해 보니 흔적이 여기로 이어지더군요.”
“죽은 사람들과 인연이 있습니까? 친분이 있다든지, 아니면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든지요?”
“아니요, 일면식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을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겁니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놈들에게 복수해야 죽은 이들이 편안히 저승으로 갈 것 아닙니까, 게다가 그놈들이 살아 있으면 어떤 악행을 더 저지를지 모릅니다.”
서문호가 검을 고쳐 쥐며 말했다.
“구원, 그것이 무공의 궁극적인 목표 아니겠습니다.”
아주 대단한 성인 나셨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복수를 지가 왜 해?
하다못해 죽은 사람이 꿈속에 나타난 부탁한 것도 아니고.
저렇게 낭만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살면 안 되지.
자고로 무인이 검을 뽑았으면 철전 한 잎이라도 얻는다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그것이 남궁정혁의 지론이다.
그러니 괜한 정의감에 불타는 서문호와는 상극일 수밖에.
‘단명할 팔자다.’
괜한 악담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 보니 그렇더라고.
눈치 없는 놈 다음으로 빨리 죽는 게 저렇게 부질없는 정의감에 불타는 놈들이다.
오지랖도 적당히 부려야지.
그때 기절한 산적들이 서서히 깨어났다.
“크윽,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산채에 동료들이 스무 명은 더 있다. 그들이 내려와 너희들을 도륙할 것이다!”
처맞고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산적들이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그 구태의연한 위협에 남궁정혁은 귓구멍을 후볐지만, 겁에 질린 사람들이 있었다.
“어떡해?”
“차라리 곡식을 내주는 게 나았나?”
촌장과 마을 주민들이었다.
그동안 산적들이 새긴 공포가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저들이 고함칠 때마다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너흴 도와주기 위해 내가 왔으니.”
자신이 나설 때가 됐다고 여겼는지 앞으로 나선 엄백산이 한 산적의 목을 단번에 베었다.
그러자 남은 산적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목을 쏙 집어넣었다.
그 모습에 묘한 쾌감을 느끼는 촌장에게 엄백산이 다가갔다.
“흠, 흠. 그전에 계산부터 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선불로 안 받으면 일을 안 해서.”
“암요! 당연히 드려야죠!”
촌장이 땅바닥에 떨어진 금자를 엄백산에 주려 할 때였다.
“네놈들은 갱생의 여지가 없구나. 잘못을 반성하지는 못할망정 약자를 위협하다니!”
촤악! 촤악!
서문호가 남은 산적들의 목을 모조리 날렸다.
그러곤 촌장에게 당당히 외쳤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런 산적 놈들. 스무 명이든, 서른 명이든 제가 다 물리칠 때니까요.”
“그래 주면 저는 고맙긴 한데…….”
촌장은 엄백산과 서문호를 번갈아 보았다.
이거 어떡해야 하지?
당장 돈을 내어놓으라는 듯 눈알 부라리는 엄백산을 모른 척한 그는 서문호에게 물었다.
“서문 대협은 얼마입니까?”
“뭘 말입니까?”
“산적을 해치우는 데 드는 비용 말입니다.”
돈을 주겠다는 촌장의 말에 서문호가 손사래 쳤다.
“정의를 위한 일인데 돈을 받다니요. 저는 그런 소인배가 아닙니다.”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돈도 못 벌 팔자이기도 하고.
오지랖도 넓고 물욕도 없으니 그 인생 참 고달프겠구먼.
서문호에 대한 남궁정혁의 첫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