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18화
사람들은 돈을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필요로 한다고 해야겠지.
돈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니까.
넉넉하면 더 좋고.
그만큼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삶이 윤택해지니까.
하지만 때론 돈,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들이 있다.
쓰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닌, 수집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다.
그들은 항상 갈구한다.
본인의 금고에 이미 평생을 쓰고도 남을 만큼의 돈을 쌓아 두고도 돈을 더 벌기를.
그것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엄백산이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자신의 무공을 이용하여 이미 수많은 재산을 모았음에도 만족이란 것을 몰랐다.
보통 어릴 적 가난하게 산 사람들이 그렇게 돈에 집착한다는데 엄백산은 그런 경우도 아니다.
비록 작은 시골이긴 하나, 그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단 말이야.’
특히 누런빛의 금자가 좋았다.
산동에서 여기 팔용산까지 냉큼 달려올 만큼.
그런데.
‘저 애송이가 산통을 깨?’
상도덕도 없는 놈.
네놈같이 세상 물정 모르는 놈들이 대협 놀이를 하고 다니니 이 바닥 시세가 점점 떨어지는 거 아니냐?
대가 없이는 절대 움직이는 않는 엄백산에게 있어 서문호는 이해가 불가능한 존재였다.
왜 공짜로 남을 돕는단 말인가.
그래서도 안 되고.
저 봐라.
촌장이 금자를 자기 품속에 넣는 걸.
그러니 엄백산은 얼마나 속이 쓰리겠는가.
‘다 된 밥에 재를 날려도 유분수지.’
엄백산이 아무리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깔고 산다고 해도 한참 어린 후배가 소인배 운운하는데 대놓고 돈 달라고 닦달할 순 없다.
……차후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는 촌장을 두고 서문호가 정학우에게 다가갔다.
“제 소개만 하고 어디서 오신 분들인지 듣지 못했네요.”
“저는 남궁세가의 정학우라고 합니다.”
남궁세가임을 밝히자 서문호가 화들짝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
“남, 남궁세가라면 남궁도 대협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저희 가주님이요? 그럼요.”
정학우가 남궁정혁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분이 가주님 아들입니다.”
비록 얼자지만요.
뒷말을 생략한 정학우의 말에 서문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
남궁정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오지랖 넓은 놈이 왜 저렇게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날 보는 거야?
뭔가 불길한데.
그만 쳐다보라고.
* * *
“한심한 놈, 곡식을 가져오라 했더니 혼자서 도망쳤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팔용산 팔용채의 전 채주, 여욱은 분명 자신의 인생에 마가 끼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요즘 자신에게 연이어 일어난 일들을 설명할 수도 없다.
며칠 전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채주 자리를 뺏어 간 웅귀가 그 시작이었다.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패배자 주제에.’
웅귀가 본인의 신상 내력을 얘기하진 않았지만, 여욱은 이 바닥 짬밥 십 년이 넘는다.
비록 몸은 산속에 있지만, 귀는 항상 세상을 향해 열려 있고.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을 두들겨 패고 채주 자리에 앉은 웅귀와 그의 부하들은 분명,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은 냄새가 난다.
근래에 있었던 반란 때 패배해서 도망쳐 온 놈들이 틀림없다.
무릎 꿇은 그가 웅귀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혹시 대청현에서 사람들을 죽인 적이 있습니까?”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지나가는 길에 밥과 술을 내놓으라 했더니 관에 이르려 하길래 죽인 적은 있다.”
“화전민 마을에 나타난 고수가 그 범인을 쫓아 여기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화풀이도 할 겸, 곡식을 가지러 간 화전민 마을에서 그런 고수를 만날 줄이야.
웅귀에게 두들겨 맞은 턱관절이 아직도 시린데 또 맞을 순 없었다.
쓰러지는 부하들은 방패 삼아 도망친 여욱이 어떻게든 항변했다.
“저는 이 일은 채주님께 보고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도망이 아니라 전술적 후퇴죠.”
“한 놈이라고 했느냐?”
“예, 새파랗게 젊은 놈, 한 명이었습니다.”
휴, 웅귀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놈이라는 걸 보니 자신들을 잡으러 온 추격대는 아니다.
으득.
그가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한때 녹림칠십이채 중 한 곳의 채주로서 어깨에 힘 좀 주고 살던 자신의 처지가 어찌 이리되었단 말인가.
‘이래서 사람은 줄을 잘 서야 하는데.’
전 대채주 편을 들었던 게 뼈아픈 실수다.
단 한 번의 싸움에 져서 이제껏 이룬 모든 걸 잃고 말았다.
‘하지만 나 웅귀, 이대로 죽지 않는다.’
이곳을 발판으로 반드시 재기하리라.
그가 큼지막한 도를 들고 팔용채를 나섰다.
“감히 내 앞마당에서 설치는 놈부터 잡아 족쳐야겠다.”
“…….”
내 앞마당이라는 말에 여욱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내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다니.
‘네놈이 설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람을 보내 놨으니…….’
뱀과 같은 눈으로 쳐다보는 여욱이었다.
* * *
방금 다시금 하나 깨달은 게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쫓아다니는 것만큼 귀찮은 일은 없다는 걸.
“남궁 소협.”
“…….”
“남궁 소혀~업.”
“나는 협이니 정의니 그딴 것에 전혀 관심 없으니 이상하게 부르지 마라.”
“남궁도 대협의 아들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아주 정의로우십니다.”
쟤 좀 이상해.
서문호는 남궁정혁이 남궁도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남궁도가 자기 우상이라나.
이런 남궁정혁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서문호가 파격 제안을 했다.
“남궁소협,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하늘이 정해 준 인연 아닐까요? 저를 수하로 받아 주십시오. 곁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절대 싫어.”
남궁정혁은 단칼에 거절했지만.
뭐가 예쁘다고 저놈을 데리고 다니겠는가?
“왜요? 너무 단호하신 거 아닙니까?”
“너는 나랑 안 맞아. 그냥 안 맞는 것도 아니고 아주 최악이지.”
“무엇이 안 맞는지 말해 주시면 고치겠습니다.”
“너는 남궁도가 왜 좋다고?”
“정마대전을 종식한 이 시대의 무인이니까요. 저희 가문의 복수를 그분이 대신해 준 셈이죠.”
“내가 남궁도를 싫어한다면 너도 남궁도를 싫어할 수 있겠냐?”
“에이, 농담도 잘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왜 싫어합니까?”
“넌 탈락이야.”
단칼에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서문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거머리도 이런 거머리가 없었다.
“왜 탈락했는지 말해 주시면 부족한 점을 고쳐서 한 해가 지나기 전에 남궁세가로 찾아가겠습니다.”
아, 정말 귀찮네.
뭐, 다 좋다 이거야.
남궁도를 좋아하든 말든, 정의에 불타 혼자 대협 놀이를 하든 말든.
하지만 네가 내 수하가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네 가문을 멸문시킨 사람이라고. 이 미친놈아.’
그렇다고 이걸 내 입으로 말할 수도 없고.
아이고, 서문세가 조상님들.
저 미친 후손을 어찌합니까?
남궁정혁이 답답해서 미치고 팔딱 뛰기 일보 직전.
“모두 동작 그만.”
험상궂고 덩치 큰 사내들이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
저들의 등장에 촌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팔용채 산적들이 모두 온 것 같습니다.”
한편 웅귀는 마을 내부를 살피다 무리 맨 뒤에 있는 여욱을 보았다.
“한 사람이라며? 외부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더 많잖아.”
앞으로 나온 여욱이 손가락으로 서문호를 꼭 집었다.
“저놈입니다. 저놈이 채주님을 쫓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웅귀가 대도를 붕붕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네가 나한테 볼일이 있다고?”
“그게 무슨 말이냐?”
“나다, 내가 대청현에서 사람을 죽였다. 불청객도 손님은 손님인데 대접이 부실하면 죽어 마땅하지.”
웅귀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서문호가 검을 꽉 쥐었다.
“……남궁 소협, 나서지 마십시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탁탁탁, 날렵하게 달려간 서문호가 한 마리 제비처럼 날렵하게 공중으로 솟구쳐 검을 뻗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공격.
지독한 살기를 담고 있는 살검이기도 했다.
순하게 생긴 얼굴과는 달리 독기가 있다.
집안이 멸문해서 그렇나?
“건방진 애송이.”
하지만 웅귀도 만만치 않았다.
이미 삶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수많은 실전을 치른 그다.
서문호의 빠른 공격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대응했다.
챙챙!
순식간에 수십여 초가 오갔다.
날렵한 서문호가 공격을 주도하고 육중한 웅귀가 방어하는 형태였다.
남궁정혁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저들의 대결을 구경했다.
‘둘 다 제법 하는군.’
웅귀의 실력은 예상외였다.
한낱 허접스러운 산적일 거라 생각했지만, 이게 웬걸.
저 정도면 녹림에서는 고수로 대접받을 만한 실력 아닌가.
지난 이십 년간 녹림의 수준이 올라갔나?
웅귀가 얼마 전까진 녹림칠십이채의 채주였다는 걸 알 리 없는 남궁정혁은 내심 놀랐다.
더 놀라운 건 서문호의 실력이지만.
‘정학우보다 더 강한데.’
멸문한 가문의 후손이라길래 강해 봤자 얼마나 강할까 했는데 그게 아니다.
기본기가 탄탄하고 몸놀림이 빠른 게, 이제 이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추정되는 나이를 고려하면 놀라운 성취다.
여태껏 입단 제의한 남궁세가의 여느 무인보다 더 강한 것 같단 말이야.
‘수하로 받아?’
잠시 고민한 남궁정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탐나는 인재인 건 맞지만 기질이 맞지 않아.
사람은 비슷한 부류끼리 어울려야지.
“……!”
그때 남궁정혁의 눈이 반짝였다.
저것 좀 보소.
계속된 공격에도 유효타를 먹이지 못한 서문호가 왼손으로 바닥을 훑더니 웅귀에게 뻗었다.
“비겁한 새끼야, 흙을 뿌리냐?”
“목숨이 걸린 대결에 비겁한 게 어디 있냐, 이기면 장땡이지.”
거참, 반박할 수 없이 옮은 말이도다.
정직하고 곧은 줄만 알았더니 얍삽한 면도 있구나.
갑자기 확 마음에 드는데.
휘익!
푹!
“크아악!”
서문호가 앞이 보이지 않는 웅귀의 목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이럴 수가…… 채주님이 지다니.”
“……우린 이제 어떡해야 해?”
예상치 못한 웅귀의 패배에 혼란스러워 하는 산적들에게 서문호가 선언했다.
“악에 자비란 없다. 너희들 모두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한 번 이쁘면 모든 게 다 이뻐 보인다고 저 단호함도 마음에 든다.
남궁정혁이 어깨를 짚자 서문호가 고개를 돌렸다.
“정녕, 나와 함께하고 싶은가?”
“수하로 받아 주시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내 질문에 답해 보아라. 내가 매우 취향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뭐든 물어만 보십시오.”
“당초육을 먹을 때, 양념을 부어 먹냐? 찍어 먹냐?”
“……예?”
남궁세가 입단 시험이라 얼마나 어려울까 했더니 웬 뚱딴지같은 질문?
남궁세가에서 음식점으로 사업 확장하나?
설사 한다 한들 그게 자신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시간은 넉넉하니 신중히 생각해서 답해라.”
하지만 저 남자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하다.
그래서 서문호도 결심했다.
저 남자의 진심엔 나도 진심으로 응해야겠다고.
그것이 뜨거운 열정을 지닌 사내의 도리 아니겠는가.
“……당연히 부어서 먹죠. 전 찍어서 먹는 사람이랑은 겸상도 안 합니다.”
“합격!”
남궁정혁이 서문호를 부둥켜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다음에 당초육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
뭐, 단주님이 사신다면야 저야 고맙긴 한데…… 근데 저 어떻게 합격한 겁니까?
그것이 궁금한 서문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