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20화
철구가 시체를 확인하는 한편.
‘이거 큰일 났구나.’
엄백산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필 산공독을 먹어 무공을 쓰지 못할 때 저렇게 흉악한 놈들이 들이닥치다니.
방문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의 살기등등한 기세로 보아 절대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지킬 힘을 상실한 그는 마음이 조마조마할 수밖에.
이제야 화전민 마을 주민들의 심정을 알겠다.
내키진 않지만 남궁정혁과 그의 부하들을 믿는 수밖에 없다.
“누구냐? 어느 놈이 내 먹이에 손에 댔느냐?”
툭…….
“……어? 어어?”
철구가 자신의 몸통만큼 커다란 도끼를 들고 으르렁거릴 때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엄백산이었다.
절대 본의로 나선 것은 아니었다.
뒤에서 누가 밀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철구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엄백산을 째려봤다.
“네놈이 웅귀를 죽였느냐?”
“그, 그게 아니라…….”
뒤를 돌아보니 언제 저곳으로 이동한 걸까?
남궁정혁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웃는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너 때문에 이곳까지 헛걸음하게 되었잖아, 웅귀는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고 했건만. 그놈이 내 부하들을 몇 명이나 죽인 줄 아냐?”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그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그때 남궁정혁이 큰소리로 외쳤다.
“아까 낮에 여욱이 죽을 때 엄 대협이 그랬잖아요. 산적들은 중원을 좀먹는 오물이라고. 내 눈에 띄면 모두 다 죽여 버리겠다고 한 거 기억 안 나세요? 마침 그 오물들이 제 발로 찾아왔네요!”
“아, 아니 그건…….”
저런 소리를 하긴 했다.
자신이 처치할 산적들이 없어서 아쉬운 마음에 그랬던 것이다.
지금은 그런 소릴 한 자신의 혓바닥을 저주하지만.
“진짜 그랬나?”
“……하하,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근데 왜 그렇게 입술이 떨릴까?”
팔뚝에 핏줄이 불끈 솟아오르도록 도끼를 꽉 쥔 철구가 성큼성큼 다가왔지만, 엄백산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살기에 얼어붙은 것이다.
마치 지금 벌거벗고 서 있는 것 같다.
‘감당하지 못할 상대가 아니건만.’
기세로 추정컨대, 저 빡빡머리 철구의 실력이 절정 초입쯤 될까?
분명 자신의 아래다.
물론 내공이 온전하다는 가정하에서.
내공이 없다는 게 사람을 이리 초라하게 만든다.
“난 네놈처럼 뒤에서 입만 떠벌리는 놈이 제일 싫다.”
달빛을 반사할 만큼 날카로운 철구의 도끼가 엄백산의 목을 노렸다.
“아.”
엄백산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단전에 힘을 줬지만, 파도에 휩쓸려 가는 모래 마냥 내공이 산산이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남궁수의 호언장담대로 산공독의 성능 하나는 참 좋았다.
내공이 없는 그의 신체 능력은 힘 좀 쓰는 일반인과 크게 다른 바 없는 수준.
‘산공독을 내 손으로 마시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을…….’
툭, 원통한 듯 두 눈을 부릅뜬 엄백산의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남궁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구나. 산공독이었어.’
어째 당당히 술을 마시는 게 그런 것 같더라.
* * *
“허억.”
“고수님이 죽었어.”
엄백산의 덧없는 죽음에 많은 사람이 경악했다.
초식동물 같은 화전민 마을 주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학우, 서문호도 놀라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특히 정학우는 얼마나 놀랐는지 턱이 빠져라. 입까지 크게 벌렸다.
‘산동일검이 단 한 수만에 당하다니, 저자는 대체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엄백산이 스스로의 꾀에 빠져 죽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그는 조금 전의 상황을 오해할 수밖에.
이 와중에 남궁정혁은 홀로 딴생각을 하는 중이다.
‘남궁수도 이 일과 관련이 있을까?’
엄백산의 범행 동기는 분명하다.
자신의 제자를 해한 것.
그들의 팔다리를 부러뜨렸으니 충분히 앙심을 품을 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날 죽이려 해? 괘씸한 놈.’
하여튼 관상은 과학이야.
틀린 적이 없어.
“도련님, 이제 어떡해야 합니까?”
정학우가 향후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다가왔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남궁정혁은 짝다리까지 짚어 가며 계속 딴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심증은 간단 말이야.’
닭, 개 쳐다보듯 자신을 외면하던 사람이 갑자기 친한 척한 거며, 노잣돈이라고 거금을 선뜻 준 거며 뭔가 수상쩍긴 했단 말이야.
근데 증거가 없네?
남궁정혁이 바닥에 떨어진 엄백산의 목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괜히 죽게 했나?’
살려 놓고 주리라도 잡아 틀 걸 그랬나?
아는 걸 모두 불 때까지.
“도련님!”
아, 깜짝이야.
귀청 떨어질 뻔했네.
“갑자기 그렇게 큰소리를 지르면 어떡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안 하셨잖아요.”
남궁정혁이 귀찮다는 듯 답했다.
“왜, 무슨 일인데?”
“저자가 매우 강한 듯합니다. 이제 어떡합니까?”
뭘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당연히 싸워야지.
“내 검 가져와.”
정학우에게 명한 남궁정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냥 갈 거 아니지?”
그의 뜬금없는 말에 철구가 반문했다.
“뭐라고?”
“웅귀인지 뭔지 죽었다고 그냥 갈 건 아니잖아. 척 보니 우리가 가진 것 모두 내놓으라고 협박해야지.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죽일 거라고 윽박도 지르고.”
딱 보니 그렇게 생겼어.
“아니다, 그렇게 안 할 거다.”
어? 틀릴 리가 없는데.
“네놈들을 모두 죽이고 가져갈 건 우리가 알아서 가져갈게.”
그럼 그렇지.
“여기 있습니다.”
정학우에게서 자신의 독문병기, 철검을 받은 남궁정혁이 철구를 보고 씨익 웃었다.
“고마워.”
“……?”
“아까 낮에 놈들은 너무 약해서 손맛을 제대로 못 봤거든. 그런데 넌 덩치가 커서 패는 맛이 있을 것 같아.”
더 고마운 건 행여 너를 때려죽여도 전혀 미안하지 않을 것 같다는 거고.
“너희는 주민들을 지켜라.”
자신만만하게 나서는 남궁정혁의 등 뒤에서 서문호가 정학우에게 물었다.
“단주님의 실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창궁검제의 아들이라길래 무턱대고 수하로 받아 달라고는 했지만, 아직 그의 정확한 실력은 모른다.
그래도 남궁도 대협의 아들이니만큼 기본 이상은 하지 않을까?
“경이로울 정도로 무공이 빠르게 느신 분이다. 가주님이 주신 영약까지 먹었으니 벌써 절정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않았을까 싶다.”
현재 중원에서 남궁정혁의 실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정학우일 것이다.
지난 삼 개월, 옆에서 직접 지켜봤고 틈틈이 대련도 했으니.
덕분에 본인 실력도 많이 늘긴 했지만.
“저 빡빡이를 이길 수 있을까요?”
“이길 수 있다고 믿어야지.”
혹여 도련님이 진다면…… 그다음은 상상하기도 싫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싸우고 싶지만, 철구의 부하들도 견제해야 한다.
“크크큭, 네 아비 무기라도 몰래 들고 나왔냐?”
커다란 철검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오는 남궁정혁의 모습에 철구가 실소했다.
제법 탄탄한 몸매를 지니고 있긴 했지만, 그의 체격에 비해 무기가 너무 크다.
저래선 저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을까?
남자라면 자신처럼 팔뚝이 우람해야지.
그래야.
“저승에서 염라대왕을 만나거든, 부왕, 철구님이 보냈다고 해라.”
이렇게 커다랗고 무거운 무기도 잘 다루지.
본인 몸통만 한 철구의 도끼가 대기를 갈랐다.
단순히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속도도 상당했다.
휭.
도끼의 뒤에서 따라오는 매서운 파공성이 그 증거다.
남궁정혁이 보기엔 아닌 것 같지만.
“무기를 좀 더 작은 거로 바꾸는 게 좋겠어. 힘이 부족해서 너무 느리잖아.”
그가 검을 들었다.
탕!
두 무기가 부딪치자 작은 불꽃이 파편처럼 튀었다.
탕탕탕!
철구가 연이어 도끼를 휘둘렀지만 남궁정혁은 담담했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손목만 까닥이며 자신의 전신의 사혈을 노리고 쐐도 하는 공격을 방어할 뿐이다.
‘…….’
철구는 당황했다.
공격을 막을 수는 있다.
그런데 어찌 저렇게 흔들림 하나 없단 말인가?
이 육중한 공격을 온전히 받아 내고 있으니 그 충격으로 최소 한 걸음 정도는 뒤로 물러서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최선을 다해 공격하는 상대에 대한 예의 아닌가?
하지만 놈은 동네 애들 칼놀이 하듯 그 자리에 서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심지어 몸의 반동조차 없다.
그러니 겨드랑이에 땀이 차도록 도끼를 휘두르는 철구는 그 모습이 얼마나 못마땅하고 얄밉겠는가.
“이것도 막아 보아라.”
그가 공격 방법을 바꿨다.
타격을 포기한 대신 상대의 검에 본인의 도끼를 갖다 댔다.
이대로 쭉 밀어 저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놈을 압사시켜 버리리라.
그럼 그 여유로운 표정도 곧 일그러지겠지…….
‘……어?’
하지만 철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내가 뒤로 밀려나지?’
순수 근력만 따진다면 녹림의 칠십 두 명 채주들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하던 그다.
그런 그가 상대의 힘에 짓눌려 질질 뒤로 밀려났다.
버티기 위해서 하체에 힘을 집중시켰지만 아무 소용 없다.
발바닥이 애꿎은 흙만 파고들어 밭 갈 듯 길게 패인 두 줄이 자신이 졌다는 걸 증명할 뿐이다.
기생오라비같이 늘씬한 놈이 어찌 이리 힘이 강한 것일까?
믿을 수 없어 부릅뜬 철구의 두 눈을 남궁정혁이 바라보았다.
“이게 다냐?”
힘에 자신 있어 하는 것 같길래 좀 놀아 줬더니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저렇게 허풍선처럼 큰 근육으로 근력만 세면 뭐 하나.
진정한 무인이라면 탄탄한 내공을 바탕으로 한 기력이 세야지.
촤악!
남궁정혁이 손을 비틀어 철구의 도끼를 날려 버렸다.
순간 허망한 눈으로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던 철구가 품속에서 단도를 꺼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단도로 공격했지만, 아무 소용 없다.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을 땐 위협적으로 보이기라도 했지.
커다란 몸집으로 과도 같은 작은 칼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글쎄.
덩치 큰 어른이 저러면 좀 추하다.
그러다 처맞으면 안 아프겠니?
고개를 옆으로 뉘여 단도를 피한 남궁정혁이 철구의 손가락을 잡고 꺾었다.
딱 자신이 고개 숙인 각도만큼만.
“으아아악.”
손가락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철구가 무릎 꿇고 절규하자, 남궁정혁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내려다봤다.
이제야 딱 패기 좋은 자세네.
퍽퍽퍽!
남궁정혁의 철검이 춤을 추었다.
강건하고 파괴적인 검무이기도 했다.
그의 검이 몸에 닿을 때마다 입에 거품 문 철구가 갓 잡힌 생선처럼 온몸을 펄떡였다.
반응이 좋으면 때리는 사람도 보람이 있는 법.
남궁정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골고루 패 주었다.
그 무자비한 구타에 같은 편, 정학우와 서문호마저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외의 낙승은 다행이지만, 저렇게 좋을까?’
남궁정혁 눈알이 희번덕거리는 게 완전히 맛이 갔다.
그만큼 타격감이 좋은가 보다.
하긴 몸집이 큰 만큼 패는 맛은 있겠지.
낚시꾼들이 괜히 대물에 환장하는 게 아니다.
“끄어어어억.”
야밤 깊은 산속, 산돼지 멱따는 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다.
그 처절한 비명에 철구의 부하, 열 명은 온몸을 달달 떨 뿐이다.
“도련님, 남은 놈들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이미 기세에서 진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 정학우, 서문호가 나섰지만 남궁정혁이 막았다.
“너희들은 가만히 있어, 내 먹이에 손대는 놈은 용서 안 한다!”
왠지 모르게 신나 보이는 남궁정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