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26화
쏴아아아-
분타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째 아침부터 날씨가 안 좋더라니.
굵은 빗줄기를 보니 쉬이 그칠 기세가 아니다.
그래도 걱정 없다.
분타에서 얻은 죽립을 썼으니.
덕분에 비에 젖지 않고 뽀송뽀송하게 송화문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개방이 요즘 꽤 돈벌이가 좋은가 보다.
거지 놈들이 쓰는 물건 치곤 꽤 방수가 잘됐다.
“도련님, 붉은 오이는 어떻게 찾죠?”
붉은 오이.
이게 복면인을 찾을 단서다.
그렇다고 생태계 변종 같은 진짜 오이를 말하는 건 아니고.
어느 생존자가 힐끔 봤단다.
죽어 가는 동료가 한 복면인의 바지춤을 잡고 늘어질 때 허리 뒤에 오이처럼 생긴 길쭉한 화상 자국이 있는걸.
“글쎄다. 사람들 옷을 일일이 다 벗겨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 생각해 봐야지.”
그렇게 세 사람이 송하문에 도착했을 때였다.
맨 앞에서 가던 남궁정혁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 탓에 뒤에서 따라가던 정학우가 그의 등에 얼굴을 부딪쳤고.
그가 항의했다.
“도련님, 갑자기 왜 서시는 겁니까?”
“하늘이 도와주려나. 갈 필요 없겠는데?”
“…네?”
“찾았다, 붉은 오이.”
“어디요?”
“저기…….”
남궁정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그곳에는 송화문도들이 축국을 하고 있었다.
돼지 오줌보에 공기를 채운 공을 차고 있단 말이다.
그런데 다들 혈기왕성한 나이라 그런지, 아니면 비가 와서 그런지 윗옷을 벗고 있네?
그중 한 명의 등 뒤에 붉은 화상 자국이 있었다.
길고 매끈한 것이 진짜 오이처럼 생겼다.
이렇게 쉽게 찾을 줄은 몰랐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혹시 도주할지도 모르니까 들키지 말고.”
“걱정마십쇼, 제가 누굽니까.”
서문호가 축국하는 걸 구경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넙죽 인사하더니 친한 척을 했다.
그리고 뭔갈 속삭이더니 곧 돌아왔다.
“알아 왔습니다. 저자의 이름은 강민. 송화문주의 총애를 받는 측근 한 명이라고 합니다.”
송화문주?
설마 송화문주까지 연관되었나?
이거 어째 판이 점점 더 커지는데
“지금 당장 잡아서 족칠까요?”
“아니다. 보는 눈이 많아. 나중에 조용히 작업하자.”
* * *
강문, 이 개자식이 해시(21시∽23시 사이)가 넘도록 송화문에서 동료들과 어울리는 통에 그를 납치했을 땐 보름달이 밤하늘 중간에 걸려 있었다.
체력도 좋다. 하루 온종일 축국을 하는 걸 보면.
오히려 기다리는 동안 줘 패고 싶은 기분이 더 늘어났으니 좋은 게 좋은 거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만큼 더 댓가를 치러야겠지만.
정학우와 나는 집으로 귀가하는 그를 기절시켜 근처 야산으로 끌고 왔다.
“야야, 정신 차려.”
짝!
남궁정혁이 뺨을 후려치자 뒤통수를 얻어맞고 한 방에 뻗었던 그가 눈을 떴다.
“으으, 여긴……?”
갓 정신을 차린 그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혼란스러워하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다, 당신은 남궁세가의 얼자…….”
퍽.
얼자는 맞지만 내 눈앞에서 얼자라고 하는 건 또 다르지.
주먹에 코를 얻어맞고 코피를 주르륵 흘린 놈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것이오?”
“그러는 넌 왜 그랬냐?”
“뭐, 뭘 말이오?”
“왜 마교를 사칭했냐고?”
“……!”
눈 끝이 파르르 떨린 그가 이내 시치미를 뚝 떼었다.
저 반응 보니까 붉은 오이가 이놈이 확실해졌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내가 왜 마교를 사칭한단 말이오?”
“독단적으로 그런 짓을 벌였을 리는 없고 광근이가 시키디?”
“나는 절대 모르는 일이오, 억울한 누명 씌우지 마시오.”
“끝까지 모른 척하시겠다?”
그래, 어차피 나도 쉽게 입 열거라 생각 안 했다.
너무 쉽게 말해도 재미없지.
그럼 또 나만의 비밀 무기를 꺼내야지.
입 여는 데 이거만큼 좋은 게 없더라고.
“이제부터 마교와 넌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야. 그 태도 끝까지 유지해라.”
“그러지 말래도 그럴 거요, 그러니 날 보내 주시오…… 응?”
반색하며 일어나려는 강문의 얼굴 위로 뭉툭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퍼-억!
남궁정혁의 주먹이었다.
“큭! 갑자기 왜, 왜 날 때리는 거요?”
“네가 마교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까.”
“……그런 억지가 어디 있소? 내 오늘 일을 문주님께 말하겠소!”
“그래, 말해라, 말해.”
누가 그러면 쫄 줄 아나 본데.
안 그래도 너네 문주도 마음에 안 들었거든.
여차하면 싹 다 쓸어버리는 거야.
‘송화문 간판 내리는 거라고.’
남궁정혁의 주먹이 본격적으로 춤을 추었다.
오른손, 왼쪽, 양 주먹을 이용해서 타악기 두들기듯 열심히 때렸다.
퍽, 퍽퍽, 퍼억, 퍽!!
맑고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끄아아아아악!!”
강문의 비명도 울려 퍼졌다.
타격음과 신음, 서로 다른 두 소리가 이리 절묘하게 잘 어울릴 줄이야.
아까, 분타주를 때릴 때 덜 때려서 그렇나?
이제야 좀 몸이 풀리는 느낌이다.
흥이 난 남궁정혁은 강문을 더욱 열심히 두들겨 팼다.
퍼억, 퍽, 퍼억 퍽퍽!!
이가 부러지고 갈비뼈까지 바스러진 악기는 몸체가 상하면 상할수록 더욱 훌륭한 소리를 냈다.
이렇게.
“꺼어어어어억.”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덜 고통스럽겠다고 느낀 강문이 나오는 신음을 겨우 참고 말했다.
“꾸…… 꾸엑, 말하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걸 모두 말하겠습니다.”
“아니야, 넌 의리가 있는 놈이잖아. 이 정도로 동료를 배신할 리 없어.”
“말하겠다고요…… 제발 말하게 해 주세요.”
강민이 사정했지만 남궁정혁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퍽, 퍽, 퍽!!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사, 사실만을 말하겠습니다. 저 진실된 놈입니다. 제발 믿어 주세요!”
“아니야. 넌 분명 거짓말을 할 거야. 생긴 게 그래.”
요즘 사람 팰 일이 너무 많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정말이다.
* * *
“뭐라고? 똑바로 말 안 해?”
“저는…… 무, 무주님의 명녕을 따라쓸 뿐 아무 자못이 업습니다.”
“너 말하기 싫구나, 그래서 일부러 발음을 흐리는 거야, 그렇지?”
남궁정혁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자 강문은 덥썩 무릎부터 꿇었다.
“아니니다. 입안이 다 터져서 바름이 새는 거라고요.”
입을 쫙 벌려서 필사적으로 항변하는 그는 직감했다.
여기서 더 맞으면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명문 정파의 아들이라는 자가 어찌 이리 손속이 잔혹하단 말인가.
자신도 차라리 사람을 죽였으면 죽였지, 이렇게 팬 적은 없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처음 맞아 보는 강문은 아려 오는 온몸을 잡으며 사정했다.
“말하기가 어려우면 바닥에 써.”
“지피묵이 업는데요…….”
지들이 아무것도 없는 이곳으로 끌고 와 놓고서는 어찌 글을 쓴단 말인가.
필기구가 없는데.
“없긴 왜 없어? 그게 있잖아.”
“……!”
남궁정혁이 가리킨 곳은 강문의 코.
정확히는 그의 코에서 줄줄 흐르는 피였다.
“이미 흘린 핀데 버리면 아깝잖아. 재활용해야지. 혹시나 모자라면 더 나게 해 줄 테니깐 써. 빨리 안 쓰면 코피 멎는다.”
이런 개새끼가…….
정녕 이게 사람이란 말인가.
네가 왜 남궁세가의 수치로 불리는지 알겠다.
강문은 속으로 욕하면서도 손가락에 코피를 찍어 바닥에 글을 썼다.
행여 모자라면 안 되니까 글씨를 작게 해서.
저놈이라면 분명히 피를 만들어 준답시고 또 팰 게 분명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남궁정혁이 말했다.
“그러니까 넌 광근이가 시켜서 한 것뿐이고 왜 시킨지는 모른다? 흡정괴마도 누군지 모르고?”
바닥에 삐뚤삐뚤 작게 쓰인 글씨를 용케도 알아본 남궁정혁을 향해 강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마씁니다.”
“흐음…….”
사색이 되어 벌벌 떠는 저놈의 더 어루만져 준다고 딱히 새로운 게 나올 것 같지는 않고.
그럼 노광근은 왜 그런 짓을 벌였을까?
본인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고?
“…….”
맹렬히 머리를 굴려 보니 짐작되는 바가 아예 없진 않다.
‘노광근 그놈은 진량현을 먹고 싶었던 건가?’
분타주의 말에 따르면 이곳 진량현은 고만고만한 문파가 여럿 난립하여 경쟁한다고 한다.
야심이 큰 노광근은 이런 상황이 갑갑했겠지.
송화문을 대문파로 성장시키고 싶은데 다른 문파들이 견제하고 발목을 잡고 있으니.
그래서…….
‘이이제이? 흡정괴마를 이용해서 다른 문파를 제거한다?’
흐음, 내가 생각하고도 아주 그럴듯한 추론이로다.
이러면 굳이 마교를 사칭하여 누명을 씌운 것도 이해가 되고.
자기 손을 안 쓰고 주어진 상황에서 일을 해결하면 그거만큼 좋은 게 없겠지.
가장 확실한 건 그를 만나 직접 확인하는 거지만.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바로 가 봐야겠다.
“저놈 챙겨. 광근이한테 간다.”
그러자 서문호가 강문의 머리채를 질끈 잡았다.
“그렇게 끌고 가려고?”
“무고한 사람을 죽인 악인인데 살려 주는 것만으로 감사해야죠.”
극단적인 놈.
예전부터 느꼈는데 나쁜 놈들한테만큼은 참 무자비하다.
저런 단호함은 마음에 들지만.
머리채가 잡힌 강문은 다급히 소리쳤다.
“자, 잠까만요.”
졸지에 머리털이 다 뽑히게 생긴 놈은 혓바닥에 힘을 주고 최대한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 일과 관련이 있는 줄 모르겠는데 문주님이 이상한 명령을 하나 더 내리긴 했습니다.”
“……?”
“얼마 전부터 노윤 부부의 동태를 감시하라고 했습니다.”
“노윤이라면 무공이 약해 차별받는다는 그 아들? 걔를 왜?”
“마, 맞습니다! 그들 부부가 어디에 가는지, 누굴 만나는지 감시해서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저도 이유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에요!”
“……!”
* * *
송화문으로 돌아온 남궁정혁은 곧장 노윤의 거처로 향했다.
그가 가문 내에서 얼마나 차별받는지는 그가 머무는 곳의 위치로도 알 수 있었다.
송화문 내 가장 안쪽, 구석진 곳에 그의 거처가 있었으니까.
뒤로는 강이 흐르고 앞으로는 숲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곳이다.
낮에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을 것 같다.
참고로 남궁정혁의 방도 이렇게 외진 곳에 있진 않다.
한마디로 노윤은 적자이면서도 얼자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
광근이가 애비로서도 꽝이군.
“도련님, 노윤이 정말 흡정괴마일까요?”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크다.”
흡정괴마는 힘을 위해 최소한의 인륜마저 내던진 괴물.
그런 의미에서 노윤은 동기가 확실하다.
더구나 강문이 그러지 않았는가.
노광근이 마교를 사칭해 살인을 저지를 것과 노윤의 동태를 감시하라고 명을 내린 시기가 비슷하다고.
이 정도면 거의 구할 이상의 확률로 노윤이 범인이다.
“이건 왜 준비한 겁니까? 어디에 쓰려고요?”
정학우가 양손에 든 물건을 들어 올리며 의문을 표했다.
송화문으로 돌아오기 전 장사를 마감한 약재상의 문까지 두드려 가며 급하게 산 물건이다.
“나머지 일 할의 확률을 채우기 위함이다.”
“닭 피와 지네 가루, 녹각이 흡정괴마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요?”
남궁정혁은 씨익 웃었다.
“물고기를 낚는 데 무엇이 필요하냐?”
“……지렁이요?”
그렇지.
한낱 물고기를 낚는데도 미끼가 필요하다.
그럼 흡정괴마를 낚는 데는 무엇이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