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35화
남궁정혁이 분개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곳이 어딘지 안내나 해.”
“지금 당장 흑두문으로 가시게요?”
“내가 할 일을 미뤄 두면 밤에 잠을 잘못 자는 유형이라.”
사실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런 식으로 사람을 납치한 놈들이 인질을 제대로 대접할 리 없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가혹한 고문을 받고 있을 게 분명하다.
‘혹시나 그 고문을 이기지 못한 백합투괴가 장물을 숨긴 곳을 벌써 불었다면?’
가장 큰 문제는 백합투괴가 고문을 버티고 버티다 죽어 버리는 것이고.
‘안 된다. 안 돼.’
그러면 위패의 행방은 영영 알 수 없게 된다.
내 집 마련의 꿈이 무너지는 거지.
지금 당장 흑두문에 쳐들어가 우리 백합투괴를 구해야 하는 이유였다.
그렇기에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가자, 흑두문으로.”
“예, 도련님.”
남궁정혁이 검을 움켜쥐고 일어서자 정학우, 서문호도 그 뒤를 따랐다.
* * *
“저기가 흑두문입니다.”
나무 사이 수풀 속에서 안진석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동안 나쁜 짓을 열심히 해서 재물을 꽤 많이 모았는지, 양아치들 사는 곳 치고는 꽤 좋다.
부지도 꽤 넓고.
최소한 내가 지금 곳보다는 좋은 것 같다.
“여기서 기다려라.”
남궁정혁이 자신의 부하들만 데리고 조용히 흑두문의 담벼락에 붙었다.
‘……’
그가 정학우와 서문호를 차례로 보자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한 것이다.
사전에 합의한 우리의 계획을.
‘우선은 조용히 잠입해서 백합투괴를 구한다.’
그러다 행여나 흑두문도한테 들키면?
바로 두 번째 계획으로 전환이다.
‘다 깡그리 쓸어버리고 정문으로 당당히 나오는 거지.’
남궁정혁을 시작으로 해서 그들이 흑두문의 담장을 막 넘었을 때였다.
삐익!
날카로운 호각소리와 함께 흑두문 곳곳에 횃불이 켜졌다.
뭐지? 벌써 들켰나?
생각 외로 꽤 하는 놈들인데.
정학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진석의 정보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우리를 벌써 찾은 걸 보니 평소에 잘 훈련된 조직입니다.”
“…….”
아니야,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다.
저들이 부산히 움직이는 건 우리 때문이 아니야.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저들은 아직 우릴 발견하지 못했으니.”
“예?”
“저길 봐라.”
남궁정혁이 손가락을 들어 앞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흑도문의 졸개들이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제 합비에서 잡아 온 놈 중 하나가 지하감옥에서 탈출했다!”
“부상당한 몸이라 멀리는 못 갔을 거다. 빨리 찾아라.”
왕소단, 양민, 홍인걸, 이 사람 중 한 사람이 도망친 모양이다.
그래서 이 난리가 난 거고.
“어쨌든 저들이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니니 우리가 잠입한 걸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 아닐까요?”
“쉿! 조용히 해.”
그때, 남궁정혁과 부하들이 몸을 웅크린 담벼락 근처, 바위 쪽으로 한 사내가 횃불을 비추며 다가왔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정학우가 몸을 날려 그 사내를 기절시키려고 할 때였다.
“찾았다! 놈이 여기 숨어 있다.”
“경공이 매우 빠른 자니 조심해야 한다.”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흑두문 무인들이 한 곳으로 몰려갔다.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보니 제법 먼 거리에 있는 석탑이었다.
남궁정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집중시켰다.
‘……?’
저기 어디에 숨어 있다는 거야, 멀어서 잘 보이는 건가?
집중해서 봐도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내 눈이 해태 눈깔인가 싶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가 보다.
“놈이 어디 있다는 거야?”
“저긴 몸을 숨길 데가 없잖아.”
다른 사람도 못 찾는 걸 보니 말이다.
“잘 봐, 석탑 3번째 단에 있는 작은 구멍.”
억울하다는 듯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
거참 재주도 좋다.
저 좁은 데에 몸을 어떻게 욱여넣었지?
석탑의 중간에 동그랗게 파인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
저렇게 하려면 온몸의 관절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저자가 백합투괴인 것 같습니다.”
“그래. 확실해.”
정학우의 말대로다.
저런 특수능력을 지녔으니 그동안 남의 집을 자유자재로 드나들었겠지.
“놈이 도망간다.”
팟, 석탑 주위를 흑무문 무인들이 포위하자 백합투괴가 날아올라 순식간에 그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날렵한 몸놀림, 한데 착지가 불안하네?
척 봐도 몸이 정상이 아닌 것 같다.
백합투괴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그가 옆으로 넘어졌다.
“발목이 안 좋아 보입니다.”
“발목뿐이냐, 내 눈엔 다 안 좋아 보이는데.”
몸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모진 고문을 당한 모양이다.
‘자, 보자.’
세 명 중 저자는 누구일까, 과연 누가 백합투괴일까?
남궁정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모으는데…….
‘……고자?’
분명 그다.
천금전장의 젊은 장주. 왕소단
모든 걸 가졌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없는 그자가 맞다.
예전 옥화루에서 그가 그려진 초상화를 보지 않았던가.
사각 턱의 후덕한 외모, 분명 그다.
“저놈을 잡아라.”
흑두문도들의 추격에 왕소단이 필사적으로 달렸다.
다리를 쩔뚝이며.
발목이 기형적으로 뒤틀어진 것으로 보아 부러진 건가?
그런 것 치곤 매우 빠른 속도다.
“그 몸으로 도망칠 수 있을 듯 싶더냐?”
“이런 젠장.”
왕소단이 필사적으로 도주했는데, 그 방향이 하필 남궁정혁이 있는 곳이었다.
“왕소단, 고개 숙여.”
“……!”
자신의 이름을 아는 탓일까,
왕소단은 반사적으로 고갤 숙였고.
“대영참영.”
남궁정혁의 검이 대기를 갈랐다.
쭉 뻗은 그의 검기가 왕소단을 뒤에서 쫓고 있는 사람들을 덮쳤다.
“크아아악.”
졸지에 습격당한 흑두문 무인들의 목이 날아갔다.
되도록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고 했는데 이제
벼락처럼 나타나 일검에 자신을 구한 그 모습에 왕소단이 희망찬 눈으로 물어봤다.
“나, 날 구하러 온 것이오?”
아니, 나도 너 잡으러 왔어.
남궁정혁이 왕소단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만나서 반갑다. 백합투괴.”
* * *
방심했던 게 실수였다.
“네놈이 왕소단이렸다?”
좁은 골목길, 굳이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게 생긴 사내놈들이 앞뒤를 포위했다.
저들의 신속한 동작으로 보건대 자신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싶다.
“무슨 일이냐?”
사실 전에도 이런 일들이 종종 있었다.
아무래도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전장 일을 하다 보니 꼬이는 날파리들이 많았다.
그래도 돈 많이 버는 자신이 참아야지 어쩌겠어.
“잠자코 우리를 따라와라.”
저런 놈들의 목적이야 뻔하지.
자신을 인질로 잡아가서 천금전장에 몸값을 요구할 생각이겠지.
그 순간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설마……?’
자신의 진정한 정체는 따로 있지만…… 아니야.
남궁세가에서도 잡지 못한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미 생활을 한낱 무뢰배로 보이는 저들이 어찌 알랴.
우두커니 선 왕소단이 같잖다는 듯 여유를 부리자 저들이 행동개시에 나섰다.
“얘들아, 저놈 붙잡아라.”
왕소단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게 딱 경공 펼치기 좋은 날씨네.
“네놈들은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억!!”
비록 무력은 약하지만 날랜 몸놀림과 빠른 경공은 자신이었다.
아마 무림 전체를 뒤져도 열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과신했던 게 실수였다.
“낄낄, 네놈이 그럴 줄 알았다.”
앞뒤를 막아놓고 일부러 유도한 거였다.
자신이 하늘로 솟구치길.
왕소단이 경공을 사용하여 땅을 박차는 순간, 커다란 그물이 덮쳤다.
“…….”
자신의 행동을 예상하고 이런 도구까지 준비한 것으로 보아 정체를 들킨 걸까?
한데 자신이 백합투괴인 걸 어떻게 알고?
“……망했다.”
왕소단은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자신이 사회에서 쌓아 온 부와 명예가 순식간에 와장창,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천금전장도 당연히 문을 닫아야겠지.
“네놈이 백합투괴 맞지? 흑두문의 비밀금고에서 훔친 막대기는 어디에 두었느냐?”
근데 의심만 하고 있을 뿐, 단정 짓진 못했다.
무턱대고 잡아 온 모양이다.
무식한 놈들.
“억울하오. 나는 백합투괴가 아니오.”
그러니 무조건 발뺌하는 수밖에.
놈들의 고문이 시작되었다.
우선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부터 부러뜨리더니 손톱을 뽑고, 콧속에 고춧가루 탄 물을 부었다.
“크아아아악.”
“대체 나한테 왜 이러시오, 나는 정말 백합투괴가 아니라니깐.”
다른 방에서도 비명이 들려오는 거로 보아 자신 말고도 고문당하는 사람이 또 있는 듯했다.
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밝힐 순 없다.
그걸 내뱉는 순간, 장물과 함께 목숨도 빼앗길 테니.
저들의 행동 양식으로 보면 그리할 것이 분명하다.
‘찰나의 틈이면 된다.’
모진 고문을 감내하면서도 탈출의 기회만을 노렸다.
자신의 무공이라면 고양이가 지나갈 만한 작은 틈이라도 충분히 몸을 비집고 빠져나갈 수 있다.
“물, 물 좀…….”
“인질 따위가 바라는 것도 많구나.”
“이러다 내가 죽으면 당신들도 손해 아니오?”
“배 터지게 먹여주마.”
이제껏 자신의 몸에 못을 박던 악마 같은 놈이 입에 콸콸 물을 붓는 순간.
“개자식아, 앞으로 음식 씹을 일을 없을 거다.”
손가락 관절을 틀어 족쇄에서 벗어난 손으로 놈의 턱주가리를 날려 버렸다.
이어진 필사의 도주.
원래라면 뜀박질 몇 번도 하기 전에 이곳을 벗어났으련만.
달릴 때마다 부러진 발목에서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래서 석탑 속에 숨어 부러진 발목뼈라도 맞추고 도망치려 했는데.
“여기 숨어 있다.”
나쁜 놈들이라 평소에 사람 찾는 일을 많이 해 봐서 그렇나.
허를 찔러 잘 숨었다 생각했는데 결국 들켰다.
또다시 잡히는 건가?
이젠 고문을 버틸 여력이 없는데.
그때 나타난 한 사람.
“왕소단, 고개 숙여.”
하늘에서 내려온 명왕장군이 그보다 더 듬직할까.
그의 검, 한방에 흑두문 놈들이 우수수 쓸려나갔다.
“천금전장에서 보낸 사람이오?”
아무렴, 장주인 자신이 실종되었는데 천금전장에서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을 리 없지.
돈을 펑펑 써서 능력 있는 무인을 제대로 고용했구나.
그런데.
“만나서 반갑다. 백합투괴.”
“……!”
이자도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이었나?
아니 그보다…….
‘방금 뭐라고 했지? 날 보고 백합투괴?’
긴박한 상황과 맞지 않게 혼자 생글생글 웃는 모습을 보니 뭔가 불길하다.
늑대를 피해 도망가다 호랑이 아가리에 스스로 머리를 들이민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다, 당신 누구요?”
“통성명은 나중에 하자고. 안락하고 편안한 상황에서 서로에 대해 알아볼 시간을 가지는 거야.”
흑두문 무인들이 동료들의 시체 앞에서 주춤주춤할 때 수염이 듬성듬성 난 중년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어디서 온 잡놈들이냐?”
흑두문의 두목, 관천악이었다.
“왜 우리를 공격한 것이냐?”
“네놈들이 먼저 내 먹이에 손을 댔잖아.”
“먹이?”
남궁정혁이 왕소단의 뒷덜미를 잡은 손을 덜렁덜렁 흔들었다.
“난 내가 침 발라 놓은 먹이에 손댄 놈을 용서해 본 적이 없거든.”
말과 달리 남궁정혁은 왕소단을 질질 끊며 뒤로 물러섰다.
“학우야, 네가 대신 싸워라.”
“예에? 제가요?”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아까 찻집에서 온성 분타주가 그러지 않았는가.
관천악은 절정급 고수라고.
근데 자신은 고작 일류급 고수이다.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하지만 남궁정혁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아무래도 너희들은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 이 자리에서 나를 존경할 기회를 만들어 주마.”
“갑자기 무슨 헛소립니까?”
“수련할 때 너희들이 불만이 많잖아, 그래서 왜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고.”
“저는 일류고수인데요? 상대는 저보다 한 단계 위고요.”
“그게 중요하냐?”
“가장 중요하죠.”
얘가 아직 무학에 대학 깨달음이 부족하다.
내가 지금 그걸 일깨워 주려는 거고.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그러면 이길 수 있다.”
“혹시 다른 사람 손을 빌려 차도살인을 하려고 하시는 건 아니고요?”
“뭐?”
“수련할 때 투정 좀 부렸다고 이렇게 복수하려는 거 아니냐고요.”
이놈도 은근히 말이 많단 말야.
“나가서 싸울래? 아니면 내 손에 뒤질래?”
남궁정혁의 강권에 못이긴 정학우가 울상 지으며 앞으로 나서자 서문호가 뒤에서 응원했다.
“부단주님, 힘내십쇼.”
“……”
왠지 저놈은 자기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 같은데.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겠다.
……배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