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44화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첫눈이 내리는 초겨울.
발목까지 쌓인 눈밭을 좋다고 뛰어다니던 다섯 살, 남궁강혁은 환호했다.
기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동생이 태어났다는.
“사내아이랍니다.”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외동아들로 홀로 자라는 자신에게도 형제가 생기길.
그 소망이 오늘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친동생은 아니라 하나 상관도 없고.
어머니가 다르다지만, 아버지가 같으니 결국 자신의 동생 아닌가.
“너무 귀엽다.”
그를 처음 본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작은 보자기 속에 들어있던 어린 생명체.
볼살을 통통하고 분홍빛 손바닥과 발바닥은 말랑한 것이 어찌나 귀엽던지.
온종일 쳐다봐도 지겹지 않았다.
‘너도 네가 좋으냐.’
이런 그의 진심을 알아챈 걸까.
아직 젖도 못 뗀 동생은 자신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남궁강혁은 더 큰 웃음으로 보답해 주었고.
그때만 해도 생각했지.
‘우리는 친형제보다 더욱 가깝게 지낼 것이다.’
서로를 의지하며,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남궁세가를 이끌어 가자.
어린 그의 소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참히 깨어졌지만.
여느 날처럼 밤늦게까지 남궁정혁과 시간을 보내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 어머니와 마주쳤다.
“동생이 생겨서 기쁘더냐?”
그렇게 묻는 어머니의 표정이 왜 그리 슬퍼 보이던지.
그때는 몰랐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어머니가 슬퍼한 이유를.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나의 기쁨이 어머니에게는 상처가 되었다니.’
아버지의 진짜 사랑은 남궁정혁의 어머니란다.
둘은 어릴 적부터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남궁정혁의 어머니가 세가에서 일하는 하인이라 할아버지의 반대로 헤어져야만 했다고.
반면에 자신의 어머니와는 정략결혼.
아버지는 집안에서 정해 준 여자와 억지로 결혼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강제로 장가를 들었으니 아버지의 마음이 부인에게로 향할 리 있나.
아버지는 어머니를 외면한 채 무공 수련에만 몰두했다.
그것이 어머니에게는 상처가 됐지만.
비록 정략결혼이라 하나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마음을 끝까지 외면했다.
결국, 정마대전이 끝나고 아버지가 남궁세가의 가주가 되는 첫날.
그는 선포했다.
‘두 번째 부인을 맞을 것이오.’
아버지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사랑을 완성했다.
그것이 한이 되었는지 남궁강혁이 열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그는 결심했다.
- 나에게 동생은 없다. 난 아버지의 외동아들이다.
외롭게 돌아가신 어머니가 너무 불쌍했으니까.
조금이나마 어머니에게 위로가 되기 위하여.
분명 그렇게 결심했는데…….
“역시 대주님 동생입니다. 강하군요.”
“내 동생 아니라니까.”
말과 달리 온몸의 신경은 종요와 싸우는 남궁정혁에게 향해 있다.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
이건 형으로서 동생을 걱정하는 게 아니다.
행여 남궁정혁이 져서 가문의 명예에 누가 될까 염려하는 것일 뿐.
아무렴, 분명 그런 걸 거야.
자신이 남궁정혁, 저놈을 왜 걱정한단 말인가.
“…….”
싸우는 걸 보니 걱정할 필요도 없고.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던 저놈이 도대체 언제 저렇게 강해졌지?
‘종요 따위는 가볍게 제압하겠구나.’
처음엔 비등한가 싶더니 이제는 종요를 몰아붙이고 있다.
그것도 남궁세가의 무사라면 누구나 익히는 대연검법으로.
그렇다고 남궁정혁의 내공이 종요보다 우세한 것도 아니다.
그건 맺힌 검에 맺힌 검기의 크기만 봐도 알 수 있다.
분명 종요의 것이 조금 더 크다.
그렇다면 남궁정혁은 어떻게 종요를 압도하고 있는가?
‘대연검법을 완벽히 이해했다.’
언제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설프게 배운 도끼질로 나무를 베느니, 차라리 손에 익은 과도로 나무를 베라고.
속으로 비웃은 말이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동의할 수 없다고.
작은 과도로 어느 세월에 커다란 통나무를 벤단 말인가.
하지만 남궁정혁은 지금 그걸 해내고 있었다.
완벽하게 익힌 대연검법으로 화산의 자랑, 태극검법을 압도하고 있다.
이런 광경을 자신의 두 눈으로 보는 날이 올 줄이야.
남궁세가의 일원으로서 가슴 뿌듯한 일이기도 하다.
‘저런 건 누가 옆에서 가르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남이 밥을 떠먹여 준다 해도 씹어서 소화하는 것은 오롯이 본인 몫.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가리킨다 해도 한 무학을 완벽히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은 익히는 사람의 몫이라는 말이다.
본인의 깨달음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지.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남궁정혁의 모습은 놀랍다.
‘허, 저리 뛰어난 무재를 썩히고 있었단 말이냐.’
무공의 천재가 있다면 그가 아닐까.
재능만 본다면 오히려 자신보다 뛰어날 것 같다.
그렇다고 질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동생이 자신보다 잘났으니 더욱 기쁜…….
‘흠, 흠.’
어쨌든 남궁정혁이 싸우는 모습을 보니 남궁강혁도 깨우친 바가 적지 않다.
“내가 틀렸구나, 강한 무공을 배우는 것만이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거늘.”
그래서 대연검법은 기본 초식만 익히고 남궁세가의 혈족들만 배울 수 있는 창궁무애검법으로 바로 건너뛰었다.
더 나은 무공이 있는데 굳이 하위 무공에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모습을 보니 자신이 완전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젠 다르다.
정천맹으로 돌아가면 남궁세가의 기본 무공부터 다시 익혀 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한 남궁강혁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으로 남궁정혁을 보았다.
‘너도 이제 허물을 벗어 던지고 세상에서…….’
“이런 씨팔, 나 사기당한 거 아냐!?”
‘사기를 당했구나.’
세상이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긴 하지.
……아니, 이게 아니고 방금 저놈이 뭐라고 했지?
‘뭐? 사기?’
잘 싸우고 있다가 갑자기 웬 사기?
누구한테 속았나?
설사 속았다 한들 혈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그게 중요한가?
설마 그 사기꾼의 얼굴이 종요와 닮아서?
남궁강혁이 되지도 않은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 남궁정혁이 쉬지 않고 칼질을 했다.
챙챙챙!
그의 검과 종요의 검이 맞닿았다.
여기서 남궁정혁이 기대한 상황은 그의 검이 종요의 검을 반으로 뚝 부러뜨리는 거였다.
왜? 나의 검은 전설의 검이니까.
비록 악명이라도 할지라도 무림에서 그 명성을 떨친 검이라면 그 정도의 절삭력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많은 걸 바라고 있나?
그런데.
‘기대 이하다…….’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강철을 두부 썰 듯 자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막상 써 보니 일반 검과 차이가 별 차이가 없다.
오십 년 동안 상자 안에만 있어서 날이 무뎌졌나?
아니면 내가 잘못 쓰고 있는 건가?
“기고만장하지 마라.”
종요가 검을 밀자 내가 도리어 뒤로 밀렸다.
내공 하나만은 그가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체 탁월한 검술 응용력과 상황판단력을 지녔기에 망정이지, 무기 하나만 믿고 덤볐으면 큰 낭패를 볼 뻔했다.
……진짜 제갈헌이 사기 친 건 아니겠지?
그런 거면 그의 무덤에 찾아가서 어떻게든 부관참시한다.
다들 알잖아, 나 한번 한다면 진짜 하는 거.
“싸움 중에 무슨 딴생각을 하는 거냐? 내가 우습냐?”
응, 조금.
정천맹도 별거 아니네.
고작 이런 놈을 못 잡아서 뭐? 오대 악인?
쓸데없이 명칭만 거창하기는.
하여튼 그놈들은 예전부터 숫자 붙여서 명칭 짓는 거 참 좋아해.
예전에 천무십존도 그렇고.
이십 년이 흘렀지만 바뀌질 않아.
“내가 지금 기분이 매우 안 좋거든. 그러니 이제부터 좀 과격하게 해도 이해해라.”
“이런 개자식이!”
말을 마친 남궁정혁이 검을 앞으로 쭉 뻗었다.
일견 단순히 보이는 찌르기.
하지만 종요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마치 독사를 앞에 둔 개구리처럼.
‘……또 검 끝이 흔들리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직접 공격당하는 그의 눈에는 보였다.
상대의 검 끝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
슬쩍, 오른쪽으로 피하니 검에 눈이 달린 것처럼 자신을 쫓아왔다.
‘환장하겠네.’
방황 전환을 쉽게 하려고 일부러 손목을 살짝 흔드는 것이다.
아직 나이도 어린 애송이 같은데 저런 응용력을 어찌 터득한 것일까.
저런 건 수많은 결투를 치른 백전노장이 경험으로 터득할 법한 기술인데.
크윽, 종요가 자신의 가슴팍을 찌르는 검을 겨우 피했다.
이어지는 두 번째 공격.
‘아까보다 공격속도가 빨라졌다.’
남궁정혁이 종요를 향해 정직하게 찌르기를 했다.
일체의 변화를 배제하고.
덕분에 그 속도는 이전 공격보다 훨씬 빨랐다.
종요가 피하기 어려울 만큼.
‘하지만 막지 못할쏘냐?’
종요가 검기를 발현시켜 자신의 허벅지를 노리는 남궁정혁의 검을 쳐 냈다.
그래도 그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내공 하나만큼은 더 강하다는 것.
그에 따라 검기도 더 짙고.
그래서 시종일관 뒤로 밀리면서도 결정적인 한 방은 허용하지 않았다.
남궁정혁이 지금 짜증 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방어만 하니 뚫기가 쉽지 않네.’
스승을 죽인 살성 주제에 성격은 무척 신중하다.
종요가 적극적으로 공격해 오면 빈틈을 노려, 단 한 방에 끝낼 텐데 놈은 작정하고 막기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맨 처음에 기습해서 한 방에 죽일걸.
주살검 성능 점검한다고 초반에 막 휘두른 게 실수다.
그때 제 주제를 깨달은 종요가 꼬리 내린 개처럼 저렇게 방어만 할 줄 난들 알았나.
그러니 남궁정혁의 짜증 지수는 점점 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스승을 죽일 때의 대범함은 어디 갔냐? 남자가 그렇게 소심해서 곱게 죽을 수 있겠어? 목만 늘어놓으면 내가 한 방에 죽여 줄게.”
구경하는 관객이 많다.
거기가 내가 해치운다고 자신 있게 나선 무대고.
근데 자꾸 이렇게 시간을 끌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나.
“저 사람이 대주님 동생이래.”
“강하군. 역시 핏줄을 못 속여.”
주위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다.
‘내가 원한 건 악인을 목을 단번에 치는 영웅적인 모습이라고.’
짜증을 넘어 이제는 분노까지 느낀 남궁정혁이 검을 휘둘러 종요의 목을 노렸다.
채앵!
종요는 가까스로 공격을 막았다.
두 사람의 검이 또다시 맞닿았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가면 내가 유리하다. 나의 내공이 더 많으니.’
이런 식으로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상대도 허점을 드러내지 않을까?
종요가 내공을 주입하여 상대의 검을 또다시 밀어내려 하는데…… 응?
이번엔 전과 달랐다.
뒤로 밀려나지 않는다.
오히려 남궁정혁의 검이 종요의 검을 서서히 파고들었다.
“내 검기가 더 강한데 대체 어떻게……?”
푸욱!
“커, 커헉!”
남궁정혁의 검이 종요의 검을 자른 후, 목까지 한꺼번에 날려 버렸다.
허공 높이 치솟은 종요의 얼굴이 묻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냐고.
정작 남궁정혁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
아니,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갑자기 검의 절삭력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