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45화
검은 무생물이다.
살아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생명체가 아니니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성능도 항상 일정하다.
분명 그래야 하건만.
‘……검날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남궁정혁이 자신의 쥔 주살검을 내려다보았다.
평범해 보이는 외관.
너무 흔해 보여, 길에 버리면 아무도 주워 가지 않을 것 같다.
최소한 전설 속의 명검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도 방금까지 믿지 않았고.
‘……사기당한 줄 알았는데.’
남궁정혁이 손가락으로 살살, 검날을 매만졌다.
‘…….’
아무렇지도 않다.
지금은 원래의 뭉툭한 날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남궁정혁은 손이 베여 피가 흘렀으리.
‘……내가 잘못 느낀 것일까?’
자신에게 물어봐도, 아니다.
찰나의 순간이긴 했지만, 분명 검날은 바뀌었다.
그것도 매우 날카롭게
그렇지 않으면 자신보다 내공이 앞서는 종요의 검을 자를 수 없었을 것이다.
수십 년을 살아온 남궁정혁도 이런 상황은 처음 겪는다.
이게 말이 될까?
‘당연히 안 되지.’
검날이 오락가락하는 날씨도 아니고 어떻게 변한단 말인가.
‘진짜 죽은 장인의 영혼이라도 들러붙었나.’
용한 무당 불러서 굿이라도 한 판 해?
퇴마는 예전 마교 원혼당의 석주명이 으뜸이었는데 그놈도 아직 살아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도련님! 전 도련님이 해내실 거라 믿었습니다.”
저쪽에서 정학우가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데 그 중간에 불쑥 끼어든 사내가 있었다.
“오늘의 승부에서 이겼다고 자만하지 마라. 천방지축 날뛰던 망나니가 겨우 사람 구실을 하게 된 것뿐이니.”
나와 닮은 거로 보아 이자가 남궁강혁인가.
이복형제인데도 외모가 무척 비슷하다.
남들이 보면 친형제인 줄 알겠네.
“그나저나 어디서 사기를 당한 것이냐? 하긴 네놈이 멍청한 짓을 하고 다닌 게 하루 이틀은 아니지.”
설교하듯 말하는 남궁강혁의 말투가 매우 딱딱하다.
나한테 불만 있냐?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가문의 명예에 누가 되는 행동은 삼가라. 다시 그런 짓을 한다면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시비 거는 거 아닌가.
그냥 말해.
나랑 싸우고 싶다고.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남궁정혁이 다시 주살검을 들어 올릴 때였다.
“다친 곳은 없느냐?”
“……?”
남궁강혁이 남궁정혁의 몸을 이곳저곳 살폈다.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지.
“다친 곳은 없구나. 그런데 옷은 왜 이리 얇게 입고 다니는 것이냐? 날씨가 이리 추운데.”
추워? 지금 초여름인데?
거기다 방금까지 격하게 움직이느라 온몸에서 땀이 나는구먼.
내 몸 축축한 거 안 보이냐고.
“멍청한 놈, 섬은 바닷바람이 심해 옷을 따듯하게 입어야 한다, 그런 것도 모르느냐?”
이놈은 이중인격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것 같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지 당최 모르겠다.
“더구나 너는 겨울에 태어나 추위에 약하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고뿔에 자주 걸렸었지.”
남궁강혁이 본인이 입고 있는 겉옷까지 벗어 남궁정혁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놈이라니까.”
누가 옷 달라고 했나?
나 지금 더워.
안 입는다고.
남궁정혁이 겉옷을 벗어 다시 돌려주려 했지만 늦었다.
남궁강혁은 이미 제 부하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종요의 시체를 챙겨라. 정천맹으로 돌아간다.”
그의 뒷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본 남궁정혁이 정학우에게 물었다.
“저놈은 날 좋아하는 거야? 싫어하는 거야?”
“그냥 본인의 속마음에 솔직하지 못한 분이죠.”
예전부터 알았지만 지금 더 확실히 알았다.
하여튼 남궁세가 놈들은 나랑 안 맞아.
남궁도부터 시작해서 전부다.
* * *
“남궁세가 소속이었습니까?”
정천의용단이 돌아간 후 서당 안에서 나온 황균이 처음으로 건넨 말이다.
하긴 그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조금 전 자신의 집 앞마당에서 벌어진 일을 봤겠지.
그래서 내가 남궁세가 소속임을 알아챘을 거고.
웬만하면 몰랐으면 했는데.
“이분은 남궁도 가주님의 막내아들, 남궁정혁 님이십니다.”
눈치 없이 서문호가 나섰다.
어쩐지 아까부터 날 보는 눈빛이 평소보다 더 심상찮더라니.
종요의 목을 친 걸 보고 나에 대한 존경심이 막 샘솟는가 보다.
“거기가 제가 소속된 남수단의…… 읍읍.”
남궁정혁은 닥치라는 의미로 서문호의 주둥아리를 콱 집었다.
황균의 반응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의 입장에서 남궁세가는 마교의 중원 정벌을 막은 적수이자, 천마를 죽인 원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에게도 적개심을 드러낼지 모른다.
황균의 옛날 성격 나오면 나 죽고 너 죽자는 식으로 덤빌지도.
‘뭐? 황균은 이제 무공을 잃었다고?’
이 친구가 그런 거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운명의 장난으로 훈장이 되긴 했지만, 본래는 이성보단 본능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괜히 나랑 꿍짝이 잘 맞았던 게 아니지.
황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남궁정혁은 그리 염려했건만…….
‘대체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현재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도 서당 안에서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남궁정혁이 종요와 싸우는 모습을 봤다.
느낀 건 충격.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구와 어떻게 그리 닮았는지.
‘눈빛, 표정, 말투, 행동 모든 게 제운강과 닮았다. 아니, 제운강 그 자체였지.’
다른 건 얼굴과 목소리뿐.
남궁정혁을 보고 있으면 꼭 제운강과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그 기분이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켜 반갑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름 끼치기도 했다.
근데 이런 느낌을 선사해 준 자가 하필 남궁세가의 핏줄이라니.
다른 데도 아닌 그 남궁세가.
제운강을 죽인 남궁도의 가문 말이다.
“……아버지와는 닮지 않은 것 같소.”
상대방으로서는 다소 무례하게 느낄 수도 있는 질문이건만.
“다행이군요.”
“……?”
정작 질문을 받은 남궁정혁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별로 닮고 싶지도 않거든요.”
그리고는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진심입니다.”
이런 점이 제운강 같다.
진짜 그가 저 청년으로 환생이라도 한 건가.
‘……나도 이젠 늙었나 보군.’
되지도 않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말이야.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황균이 하늘을 바라봤다.
‘남궁세가라…….’
참 많이 미워했었는데.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찾아가 그곳은 활활, 불태워 버리고 싶을 정도로.
이제는 많은 시간이 흘러 그 감정도 희미해졌지만.
‘이것도 인연인가?’
잠시 생각에 잠긴 그가 제자, 양일남을 보았다.
“남궁 소협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으냐, 해 보아라.”
“스, 스승님…….”
입술이 옴짝달싹하는 것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쉽사리 말하지 못한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길래 저리 뭐 마려운 개처럼 끙끙대는 걸까?
“괜찮다. 내 진즉에 너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으니. 그렇게 주저하다 남궁 소협이 가면 후회하지 않겠느냐?”
“…….”
스승의 격려에 힘입어 양일남이 눈 딱 감고 외쳤다.
“저, 저도 남궁세가의 무사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남수단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했더니 그거였어.
정학우가 남궁정혁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저는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아까부터 저한테 남궁세가에 대해서 틈틈이 물었거든요.”
아, 그랬었어?
이것 참 곤란하네.
흔적을 지웠다고는 하지만 양일남이 익힌 무공은 마교의 무공이다.
그런 자가 남궁세가에 들어온다?
다른 사람이 다 찬성해도 내가 반대다.
무엇보다.
“네가 떠나면 네 스승은 누가 모시냐?”
양일남이 떠나게 되면 혼자 남을 황균도 걱정이다.
“제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에게는 서당 아이들도 있고, 비양도 주민들도 있으니까요. 모두가 이웃사촌들이죠.”
“제자가 떠나면 좋겠습니까?”
그럴 리가요.
황균이 양일남을 따뜻한 눈빛으로 보았다.
“처음 만난 것은 제가 비양도에 온 직후였습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절망에 찌들어 살던 그때, 처음으로 다가온 사람이 양일남이었다.
그때부터 참 당돌했다.
아저씨는 어디서 왔어요, 라고 물었나.
그리고 그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부모도 없이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던 양일남이 황균의 집에 틈틈이 놀러 와 말동무 상대가 돼 주었다.
처음엔 귀찮아 내쫓기도 해 보았지만,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찾아온 아이의 해맑음에 황균은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러다 양일남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아예 살림을 합쳤고.
괜찮은 척, 씩씩한 척하는 꼬맹이가 애처로웠기 때문이다.
놀이 삼아 무공도 그때부터 가르쳤다.
처음엔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는 호신술 위주로만 가르칠 생각이었는데 이게 웬걸.
생각보다 뛰어난 재능이 아까워 마교의 무공을 전수했다.
정작 양일남은 자신이 익힌 무공의 기원을 몰랐지만.
“일남이가 살기엔 이곳, 비양도는 너무 좁지요.”
알고 있었다.
양일남이 비양도를 떠나고 싶어 하는걸.
이해도 하고.
평생을 이 좁은 비양도에서만 살았으니 더 큰 무대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던 차에 찾아온 사람이 남궁정혁이다.
“일남아, 네가 남궁 소협에게 공손한 것을 보고 알았다. 그의 마음에 들고 싶은 게 아니냐?”
“…….”
양일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였다.
그건 아닙니다, 스승님.
공손 안 하면 두들겨 맞으니깐요.
어찌나 찰지게 잘 패는지 아직도 뼈마디가 시립니다.
“저도 부탁드립니다. 일남이를 데려가 주십시오.”
“꼭 저여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왠지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운강을 닮은 당신이라면.
예전 제운강이 자신에게 그러했듯, 당신이라면 일남이에게도 천하란 무엇인가를 보여 줄지도.
더구나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양일남이 남궁정혁에 앞에서만은 온순한 양이 되지 않나.
“제가 남궁세가인데도요?”
오히려 황균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것이 문제가 됩니까?”
이 친구, 정말 달라졌다.
왜 그리 착해진 것이냐.
한편으로 섭섭하기도 하고.
나는 아직도 남궁도에 대한 복수심으로 타도 남궁세가를 울부짖는데, 예전 동료는 아닌 것 같아서.
“일남이의 실력은 제가 보증합니다.”
열심히 가르쳤거든요.
그 나이 때 저보다 강하도록.
황균이 눈짓하자 양일남이 어깨에 멘 활을 풀어 어느 한 곳을 겨눴다.
피잉- 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른 화살이 갈매기 한 마리를 맞히더니, 그 기세를 읽지 않고 뒤따라 오던 한 마리를 더 맞혔다.
“제법 쓸 만하지 않습니까, 일남이를 거두어 두십시오. 곁에 두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오랜 친우가 머리까지 숙여 부탁하는데 거절할 순 없다.
남궁정혁이 머리를 끄덕이자, 양일남이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방금 잡은 갈매기로 마지막 식사를 올리겠습니다.”
“허허허, 괜찮다.”
“아닙니다. 제가 꼭 그러고 싶습니다.”
“나보다는 새로운 동료가 된 분들을 먼저 대접하렴.”
“스승님도 같이 드셔야죠.”
“허허허, 나는 정말 괜찮다.”
나 갈매기 고기 싫어해.
질기고 퍽퍽해서.
게다가 너 요리도 못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