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46화
눈물의 이별은 없었다.
“잘 다녀오거라.”
황균은 먼 길 떠나는 제자에게 담담히 말했고.
“잘 다녀오겠습니다.”
양일남은 그런 스승에게 그저 고개만 숙였다.
그렇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지금의 이별이 서로에게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니.
슬프지 않은 것은 더더욱 아니고.
‘거의 십오 년을 함께 살았나?’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이별의 발걸음이 쉽게 떨어질까.
하지만 황균과 양일남, 두 사람은 이러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염려되는 것이다.
스승은 행여 제자가 이곳에 혼자 남겨진 자신의 안부를 걱정할까 봐.
제자는 행여 스승이 거친 무림에서 다치지는 않을까, 자신의 안전을 걱정할까 봐.
“…….”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눈빛이기도 했다.
“일남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황균을 당부를 받으며 남궁정혁 일행이 탄 배가 출발했다.
그리고.
“아이고 죽겠다.”
내가 두 번 다시 배를 타면 사람이 아니다.
제운강이었을 적에는 배를 아무리 타도 멀쩡했거늘, 이 빌어먹을 몸은 몇 번을 타도 영 적응을 못 한다.
덕분에 육지로 돌아오는 길에도 물고기에게 밥을 주고 말았다.
“웨에엑!”
“우웁…….”
나뿐만 아니라 정학우와 서문호도 배 난간에 나란히 서서 같이 토했고.
그중에서 양일남만 유일하게 멀쩡했다.
확실히 섬에서 나고 자란 놈이라 뱃멀미에 강하다.
육지에 도착한 남궁정혁이 비양도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미안하다, 친구야. 내가 뱃멀미가 심해서 앞으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친구의 부탁은 들어줘야지.
‘이름이 석문이라…….’
저 멀리 황균이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는 지인이 있단다.
다만 황균이 걱정하는 건 그 지인이 석 달 전부터 연락이 안 된단다.
혹시 안 좋은 일이 있나 싶어 몇 차례 서신을 더 보냈지만, 지금까지 답장이 없다고.
그래서 때마침 나타난 남궁정혁에게 부탁했다.
그 지인이 사는 곳이 남궁세가로 돌아가는 길 중간에 있으니 한번 들러 안부를 확인해 달라고.
‘어려운 일도 아니군요.’
물론 남궁정혁은 기꺼이 수락했다.
사실 가는 길이 아니라 먼 곳으로 빙 둘러가야 해도 수락할 참이었지만.
‘우연의 일치일까?’
지인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석문이라는 게.
예전에 내가 마교 교주가 되는 데 황균과 함께 큰 도움이 되었던 동료의 이름이 문석이다.
혹시나 석문 말고 다른 지인들도 있나 황균을 슬쩍 떠보았더니, 그의 친구들의 다 죽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람이 석문이란다.
뭐, 가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
석문이라는 사람이 과거 흑풍대의 대주로서 무림에 검은 바람을 일으킨 문석이 맞는지.
“단주님, 사람은 역시 땅을 밟고 살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서문호가 모처럼 옳은 말을 했다.
안락한 마차를 타고 이틀, 석문이 산다는 곡아현에 도착했다.
이곳 어딘가에서 석문이 부모 없는 아이들을 보살피며 살고 있단다.
‘…….’
석문이 진짜 문석이 맞다면 이 또한 기가 찰 일이다.
과거 정마대전 때 포로 따위는 식량만 축내는 식충이라며 단번에 목을 치던 ‘피의 무사’가 보육원을 운영하다니.
황균도 그렇고 인생 말년에 왜 그렇게 개과천선한 거냐.
인제 와서 극락왕생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제가 사람들에게 보육원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일행 중 양일남이 나섰다.
“스승님께서 몇 달 전부터 걱정이 많으셨거든요. 지인분이 무사한지.”
그가 길을 지나는 사람에게 말을 걸려는 찰나였다.
“히이잉!”
어디선가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 한복판을 빠르게 달리는 말이 어린아이를 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늦었나?’
다행이다.
몸을 날린 남궁정혁이 아이를 안고 땅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본능적으로 움직인 그가 아니었으면 아이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심하면 죽었을 수도.
“히이이잉.”
갑자기 난입한 남궁정혁 때문에 놀랐는지 말이 앞다리를 하늘 높이 치켜세웠고, 그 탓에 말을 타고 있던 사람이 낙마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깜짝 놀란 정학우가 다가와 남궁정혁의 옷에 묻은 흙을 털 때, 낙마한 말 주인도 일어섰다.
그런데 표정을 찌푸리고 있네?
“네놈이 갑자기 나타나 말에서 떨어졌잖아!”
게다가 삿대질까지 했다.
“내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랬느냐.”
이런 걸 적반하장이란 한다지.
잘못한 놈이 오히려 큰소리치는 것.
남궁정혁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이기도 하다.
“네놈이 먼저 아이를 칠 뻔했지 않냐?”
품에 안긴 아이는 많이 놀랐는지, 창백한 얼굴에 아직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건만, 일을 벌인 놈은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다.
“감히 누구 앞이라고 큰 소리냐, 내가 누군 줄 아느냐, 당장 무릎 꿇고 사죄하지 못할까!”
햐, 이런 놈은 또 오랜만이다.
어디서 좀 사는 집 아들이냐, 이 씹새야.
아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남궁정혁이 대답 대신 다짜고짜 말 주인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는 넌 내가 누군 줄 아냐?”
“네, 네놈이 누군 줄 내가 어찌 안단 말이냐?”
그러자 말 주인은 예상외의 상황에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야, 이 이기적인 새끼야, 너도 내가 누군 줄 모르는데 네놈이 누군 줄 내가 어찌 아냐.”
내 인생 원칙 중의 하나가 이렇게 뻔뻔한 놈이랑은 세 마디 이상 섞지 않는 거다.
남궁정혁이 말 주인을 멱살 채 들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말 옆에 패대기쳤다.
“나는 남궁세가의 남궁정혁이다. 꼬우면 찾아오든가.”
이 광경을 저 멀리서 본 포졸들이 삐익, 휘파람을 불며 뛰어왔다.
“거기, 무슨 일이오?”
“무슨 소란이오!”
차라리 잘됐다.
척 보니 말 주인이 무공도 모르는 일반 백성 같으니 내 손 더럽힐 바엔 관아에서 벌 받게 하는 게 낫지.
“마침 잘 오셨소, 당장 저자를 포박하여…….”
그런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포졸들이 남궁정혁을 포박하려 하였다.
포졸들이 자신을 묶으려 할 때, 그 손길을 뿌리친 그가 말했다.
“……왜 나를 잡으려 하는 것이오? 잘못은 저자가 했는데.”
“어디서 발뺌이냐? 네가 현감님께 행패 부리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래도 거짓을 고할 테냐!”
현감이라고? 누가 현감인데?
포졸이 땅바닥에서 인상을 쓰고 있는 말 주인을 가리켰다.
“저분이 이곳, 곡아현을 다스리는 현감님이시다. 작년 과거시험에서 장원 급제한 훌륭한 분이시지.”
아,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큰소리치시더니 현감 나리셨어?
포졸의 말에 정학우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관아랑 엮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전생에 거칠 것 없이 무림을 활보하던 제운강 시절에도 되도록 관이랑 만은 엮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관이랑 엮이면 여간 피곤한 게 아니거든.
“그냥 도망칠까?”
“아까 했던 말, 기억 안 나세요?”
“……?”
“남궁세가의 남궁정혁이라고 스스로 정체를 까발렸잖아.”
젠장, 실수다.
이래서 사람은 입이 무거워야 하는데.
“그럼 죽여서 뒷산에 파묻을까?”
“고작 이런 일로 사람을 죽여서야 하겠습니까, 더구나 보는 눈이 맞습니다. 거기다 현감이라잖아요! 장원 급제까지 한 관리를 죽이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고요?”
“그럼 어떡하자고?”
두 사람이 속닥일 때 현감 나리께서 남궁정혁에게 다가왔다.
“크흠, 이제 내가 누군 줄 알겠지?”
“…….”
“남궁세가? 내가 이래서 무림인들을 싫어해, 예의가 없거든.”
남궁정혁이 인상을 구겼다.
젠장,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 * *
관무불가침이란 말이 있다.
관과 무림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여 침범하지도 말고 간섭하지도 말자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 일이란 게 그렇게 깔끔하게 딱 나뉠 수가 있나?
이 중원에 워낙 많은 사람이 얽혀 살다 보니 가끔은 관과 무림이 충돌할 때도 있다.
지금 남궁정혁의 경우처럼.
그렇다면 궁금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보통은 무림인이 굽히고 들어가지.’
왜냐? 무림인도 결국 이 땅을 살아가는 백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무림인과 관련이 없는 일반 서민들은 잘 모르는데 무림인들도 조정에 세금 내고 산다.
그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현감이 남궁정혁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그래도 남궁세가는 꽤 명망 있는 문파로 알고 있는데 너 같은 망종도 있긴 있구나. 내가 잘못 알았나 봐?”
우리 현감 나리가 뚫린 입이라고 막 나불대시네.
남궁정혁의 눈가가 실룩거리는 걸 본 정학우가 다급히 말했다.
“도련님, 어서 잘못했다고 비세요.”
내가 왜?
뭘 잘못했다고?
한 고을을 다스리는 현감이라면 오히려 더 백성들을 보살피고 보듬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저자는 말로 어린아이를 칠 뻔했잖아.
한마디로 개념 없는 짓이지.
저런 자가 현감의 자격이 있을까?
‘아, 장원급제했다고 했지.’
자격은 있네.
하지만 공부만 잘한다고 다가 아니다. 인성이 먼저지.
저런 놈이 나중에 탐관오리가 돼서 나라를 좀먹는 거야.
사과는커녕 남궁정혁이 현감을 빤히 쳐다보자, 괜한 조바심이 난 정학우가 다시 보챘다.
“우선 사과부터 해야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할 거 아닙니까.”
“그럼 말해 봐라.”
“뭐가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들어보고 사과할 게 있으면 사과할게.”
그러자 남궁정혁과 정학우의 얘기를 듣고 있던 포졸들이 난리가 났다.
“네 이놈, 감히 현감님께 무례를 범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당장 관아로 끌고 가 곤장을 치겠습니다!”
이것들 정말 성가시네.
“…….”
그냥 눈 딱 감고 다 쓸어버려?
그래도 남궁세가 정도면 지방의 현감 정도는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남궁정혁의 눈빛이 스산해질 때였다.
“숭재야, 거기서 뭐 하느냐?”
인파 사이로 가마를 탄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뭐지? 조정의 높으신 분인가?
창을 든 관병들이 호위까지 하는 걸 보니.
척, 봐도 한 끗발 날리는 사람 같다.
그런 그에게 현감 나리께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방금까지 건방 떨던 태도와는 정반대로.
“아버지, 벌써 도착하신 겁니까?”
“그래, 그런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왜 길 한복판에서 서서 그러고 있는 것이냐? 혹 다툼이라는 벌이고 있는 것이냐?”
“그것이 어떻게 된 거냐면…….”
현감이 잠시 주저하는 척을 하다 주절주절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한데 각색 솜씨가 아주 뛰어나시네?
그가 자기한테 불리한 건 쏙 빼고 말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남궁정혁이 천하의 불한당이다.
제 갈 길 얌전히 가고 있던 현감 나리의 앞길을 막은 것도 모자라, 좋게 타이르는 그의 멱살까지 잡았으니.
이름이 뭐? 숭재?
너 정말 거짓말 잘하는구나.
저 정도는 해야 과거에서 장원급제 할 수 있나 보다.
저잣거리에서 이야기꾼을 했어도 대성했을 거야.
‘주먹이 운다.’
애초에 인내심이라곤 가뭄 속 도랑보다 얇은 남궁정혁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원시천존이시여, 저 새끼만 죽이고 지옥 가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