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47화
정학우는 직감했다.
남궁정혁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남궁정혁이 무슨 사고를 칠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일었던 일은…….”
그가 제 눈으로 본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더하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이렇게 된 것입니다.”
괜한 누명을 쓰기 싫은 정학우가 설명을 끝마치자마자, 중년 사내가 물었다.
“네 말과 내 아들의 말이 다르니 난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겠느냐?”
“전 사실만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럼 내 아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냐?”
그가 정학우를 추궁했다.
역시 그 아들에 그 아버지인 건가.
“어차피 자기 자식 말만 믿고 싶은 거 아닌가.”
남궁정혁이 중얼거리자 창을 든 관병 중 한 명이 발끈했다.
“이놈! 어디서 무례를 범하느냐, 이분이 누구인 줄 알고.”
저런 건 집안 내력인가.
또 저러네.
아니, 내가 저 양반을 오늘 처음 봤는데 누군 줄 어떻게 아냐고.
“이분은 종2품, 임사홍 참판 어른이시다. 그러니 예의를 갖춰라.”
제법 높으신 분인 갚다 예상은 했는데 내 생각보다 더 높다.
저 정도면 고관대작들이 즐비한 조정 내에서도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닐 수 있다.
이거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은데.
“나도 부모이니 내 자식의 말을 먼저 믿고 싶은 건 부정하지 않겠네. 그래도 시시비비는 확실히 가려야지.”
임사홍이 제 아들, 임숭재를 보았다.
“네 말이 거짓이 없으렷다?”
“……제가 왜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임숭재를 뻔히 쳐다보던 임사홍은 고개를 돌려 정학우를 보았다.
“너도 네가 한 말에 책임질 수 있겠느냐?”
“남궁세가의 이름을 걸고 전 떳떳합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갈리는 상황, 잠시 고민한 임사홍이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하자.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저 아이에게 있는 듯하니 그에게 누구 말이 맞는지 물어보자. 원래 어린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법이지.”
가마에서 내린 임사홍이 말에 치일 뻔했던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야, 네가 길을 지나던 중 빠르게 달리는 말에 부딪힐 뻔한 일이 있느냐?”
“…….”
예상외의 사태에 놀란 아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임사홍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다, 내가 책임지겠다. 누구를 너를 탓하지 못할 것이니, 나를 믿고 사실을 말해 보아라.”
그 부드러운 손길에 용기를 얻어서일까, 아이가 손가락으로 두 사람을 가리켰다.
“저 아저씨가 날 치려고 할 때요, 이 아저씨가 구해줬어요.”
여기서 저 아저씨는 임숭재이고, 요 아저씨는 남궁정혁이다.
불안함에 입술을 씹고 있던 임사홍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숭재, 네 이놈. 네가 거짓말을 했구나.”
“아버지, 어찌 저런 아이의 말만 믿고…….”
“아직도 거짓말을 할 셈이냐?”
제 아버지의 강렬한 눈빛에 임숭재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죄, 죄송합니다. 아, 아버지가 오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급한 마음에 그만…….”
“못난 놈!”
짝, 임사홍이 임숭재의 말을 끊고 뺨을 후려쳤다.
단번에 그의 뺨이 붉어졌다.
“내가 너를 그리 가르쳤느냐? 항상 백성을 먼저 살피라 하지 않았더냐.”
“……죄송합니다.”
면목 없다는 듯, 임숭재가 사과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은지 임사홍은 제 아들을 한참을 노려보다, 남궁정혁 일행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자식을 잘못 가르쳐서 이런 일이 생겼네. 다 내 잘못이야.”
음, 그런 것 같습니다.
남궁정혁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때, 다른 사람들은 황송함을 금치 못했다.
“왜 이러십니까, 저희가 민망합니다.”
“내 잘못을 용서해 주겠는가?”
“그럼요, 어서 고개를 드십시오.”
“너도 이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어라.”
아버지의 재촉에 임숭재가 마지못해 말했다.
“미안하다.”
“똑바로 하지 못하겠느냐?”
아버지의 호통에 임숭재도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잘못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
다시 가마 위에 올라탄 임사홍이 제 아들을 데리고 관아로 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정학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참판 어른이 공명정대한 분이라 다행입니다.”
“아버지는 괜찮은데 아들이 문제군.”
“음…… 그렇죠?”
“…….”
“저도 그런 부자를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훌륭한데 아들이 문제죠.”
“…….”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부자가 누구인지?”
“더는 말하지 마라, 내 주먹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니.”
남궁정혁의 주먹을 본 정학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동안 남궁정혁이 사람을 얼마나 잘 패는지 봤기 때문이다.
* * *
착한 일을 해서일까, 석문의 보육원을 찾기가 쉬워졌다.
조금 전 구해 준 아이가 마침 그곳에 산단다.
“저기예요.”
보육원은 마을 외곽에 있었다.
척 보기에도 초라했고, 강한 바람만 불어도 지붕이 날아갈 것만 같이 생겼다.
부지는 제법 넓지만, 사람들이 사는 초가집들은 매우 낡았다.
게다가.
“히이이잉.”
보육원 바로 옆에 말을 키우는 마장까지 있다.
울타리 안에서 뛰어다니는 말들이 보였다.
꽤 규모가 큰 곳이었다.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은 아니군. 마장과 바로 붙어 있으니 시끄럽고, 냄새까지 날 텐데.”
남궁정혁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걸 정학우가 받았다.
“대신 땅값이 싸니까요. 아이들과 함께 살기에는 넓은 공간이 필요해 저기서 보육원을 운영하나 봅니다.”
마음이 착잡하다.
한때 검은 말을 타고 천하를 호령했던 전 흑풍대장이 이렇게 지지리 궁상맞게 살고 있었단 말인가.
차라리 석문이 문석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가 보면 알겠지.’
그들이 보육원이 안으로 들어가자 한 초가집 문이 열리며 꼬마가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야? 석문 아저씨가 온 거야?”
그 말이 신호였을까, 다섯 개 초가집의 문이 동시에 열리며 아이들이 쪼르르, 튀어나왔다.
“석문 아저씨가 돌아왔다고?”
“아저씨, 어디 있다가 이제야 온 거예요?”
“보고 싶었잖아요.”
조용했던 보육원이 금방 시끌벅적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한 아이가 한마디씩만 해도 그게 얼마야.
하나, 둘, 셋, 넷…… 스무 명이 넘네.
참 많이도 모았다.
아이들 대부분은 대부분이 열 살이 되지 않아 보인다.
“누가 석문 아저씨 왔다고 했어?”
“아저씨가 아니잖아.”
“뭐야! 아저씨 아니야!?”
남궁정혁 일행의 얼굴을 확인한 아이들이 시무룩해졌다.
저 애들의 말로 미루어 보아 석문은 이곳에 없나?
개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꼬마가 남궁정혁이 구해 준 아이의 손목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갔다.
“왜 밖에 나간 거야? 저 사람들은 누구고?”
“석문 아저씨를 찾으러 갔다 왔어.”
“바보야, 석문 아저씨는 포졸들이 잡아갔는데 네가 어떻게 찾는다는 거야.”
뭐? 석문을 포졸들이 잡아가?
무슨 이유로?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해 보아라. 석문이 누구한테 잡혀갔다고?”
남궁정혁이 불쑥 다가가자 큰 아이가 뒷걸음질 치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괜찮아, 이 아저씨는 착한 아저씨야, 내가 위험할 때 구해줬어.”
남궁정혁도 한마디 보탰다.
“우리는 석문의 친구다. 그와 연락이 안 돼 직접 찾아온 것이니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 보아라.”
“그게…….”
큰 아이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일곱 밤 자기 전에 포졸들이 갑자기 와서 석문 아저씨를 데리고 갔어요.”
칠 일이나 지났다고?
“왜 잡아갔는지는 모르고?”
“그것까진 몰라요.”
큰 아이가 이제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계속 말했다.
“그전에는 무서운 아저씨들이 찾아왔었는데… 석문 아저씨는 괜찮겠죠?”
“무서운 아저씨?”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무서운 아저씨라니.
그놈들은 누군데?
“무서운 아저씨들은 평소에 아는 사람들이니?”
“몰라요, 어느 날부터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한테 행패를 부렸어요.”
“행패? 무슨 행패?”
“흐, 흐아앙.”
남궁정혁의 마음이 너무 급해서일까?
자신도 모르게 추궁하듯 말했더니, 겁은 먹은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미안하구나, 애야. 마음이 급해서 그랬을 뿐, 널 해칠 의도는 없다.”
“흐아아앙.”
남궁정혁이 최대한 부드럽게, 말한다고 말했는데 아무 효과가 없다.
아이는 울음을 그칠 기색이 없다.
이럴 땐 필요한 건…….
“문호야.”
넉살 좋은 그라면 아이를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아이는 잘 다루지 못합니다.”
결국, 아이를 달랜 건 시간이었다.
울 만큼 운 아이가 남궁정혁의 말에 답했다.
“무서운 아저씨들이 맨 처음엔 화를 내더니, 나중엔 석문 아저씨를 때렸어요.”
이때까지의 얘기만 들어봐도 석문의 신변을 위협하는 뭔 일이 생기긴 한 것 같다.
여기서 남궁정혁은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혹시 석문 아저씨의 왼쪽 뺨에 큰 점이 있니?”
문석의 뺨에는 커다란 몽고반점이 있었다.
“몰라요…….”
아, 답답하네.
대체 이 꼬마가 아는 건 뭘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이가 이어서 말했다.
“석문 아저씨는 얼굴에 화상을 입어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어요.”
화상?
내가 아는 문석은 얼굴에 화상 따윈 입지 않았지만, 지금은 있을 수도 있겠다.
황균의 한쪽 팔이 없어진 것처럼.
‘…….’
아니, 얼굴의 화상 덕분에 정천맹의 추적을 여태껏 피한 걸 수도.
“석문의 방이 어디냐?”
“저쪽이에요.”
석문의 방으로 안내를 받은 남궁정혁은 그의 방을 꼼꼼히 뒤졌다.
혹시 석문의 소지품 중에 그의 신원을 단정할 만한 물건이 있을까 싶어서.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확신을 주는 물건을 찾았다.
‘정말 문석이 맞구나.’
서랍장 제일 밑을 여니 말이 자수로 새겨진 검은색 두건이 있었다.
전생에 남궁정혁이 선물한 것이다.
말을 타고 달릴 때 머리 흩날리지 말라고.
못생긴 얼굴, 더 못생겨진다는 농담과 함께 건넨 물건이기도 했다.
‘…….’
남궁정혁은 그 두건을 쫙 쥐었다.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여태까지 간직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게 과거에 연연하는 성격도 아니면서.
그때, 정학우가 방으로 들어왔다.
“도련님, 쌀이 떨어져 아이들이 지난 사흘 동안 밥을 먹지 못했답니다.”
어째 초췌해 보이더라니.
유일한 어른이 없어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나 보다.
성장기 어린이에게는 영양 공급이 중요한 법이거늘.
“넌 당장 시장에 가서 얘들 먹일 음식부터 사 와라. 난 따로 알아볼 게 있다.”
“뭘요?”
“그동안 문석, 아니 석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지.”
“어떻게요?”
* * *
당신이 만약 궁금한 게 있다면 가장 가까운 다리로 가라.
왜냐고?
그곳에 높은 확률로 거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곳, 곡아현도 예외는 아니고.
딸랑, 남궁정혁이 거지에게 은자 한 개를 던졌다.
“한 다경에 은자 한 냥 맞지?”
“…….”
개방 정보료는 진량현 흡혈괴마 사건 때 이미 파악했다.
남궁정혁은 은자 한 개를 더 던지며 말했다.
“두 배로 줄 테니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잘 대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