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48화
흑풍대주 문석.
그를 처음 만난 건 내가 스물다섯 살 때, 그러니까 밑바닥부터 시작해 마교 최고의 타격 부대인 흑풍대에 들어갔을 때였다.
문석은 조장, 나는 평대원.
직장 상사였던 셈이지.
“멍청한 짓 하다 동료 발목을 잡으면 내 손에 죽는다.”
나를 본 문석의 첫마디였다.
남들보다 곱절은 큰 덩치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얼굴, 생각대로 논다고, 하는 말도 얼마나 험상궂은지.
솔직히 그때는 좀 위축됐다.
쫄았던 거지.
뭐? 나는 겁대가리 같은 건 탯줄 자를 때 같이 싹둑 자른 거 아니냐고?
이거 왜 이래, 나도 원래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저 험한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 뿐.
아무튼, 내가 그때 그렇게 긴장한 이유가 있었다.
문석이 조장으로 있는 조는 흑풍대의 다섯 개 조 중 가장 많은 실적을 올렸지만, 반면에 생존율 또한 가장 낮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누가 뒤에서 강제로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전투만 벌어지면 문석이 돌격대장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조장이 맨 앞에서 나가 싸우는데 조원들이라고 뒤에서 구경만 할 수 있나.
조장 옆에서 같이 싸워야지.
그런 이유로 문석의 조는 항상 다른 조에 비해서 몇 배는 대원이 죽어 나갔다.
그렇게 조원들은 염라대왕한테 공물로 갖다 바치면서 자기는 또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래서 불린 별명이 불사신, 문석.
‘그때는 참 재수도 없다고 생각했지.’
흑풍대원이 되어서 인생 좀 펴나 했더니 하필 문석의 조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열심히 안 살았지, 그때는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웬걸, 같이 생활해 보니 이 남자, 반전 매력이 있었다.
험악한 인상에 성질은 생긴 것보다 더 지랄 맞지만, 일단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끔찍이 챙겼다.
술, 밥을 수시로 사는 건 물론이거니와, 가족들 생일까지 챙겨 줬다.
흑풍대 조장으로서 적지 않은 녹봉을 받음에도 그가 빈털터리인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럼 그의 눈 안에 드는 기준은 뭐냐?
간단했다.
- 살아남는 것.
전투에서 살아남으면 그의 사람이 되었다.
역설적이긴 하지.
지가 부하들은 사지로 내몰면서 살아남은 놈만 인정해 주다니.
하지만 마교란 그런 곳이다.
싸울 땐 화끈하게 싸우고, 놀 땐 더 화끈하게 놀고.
‘문석한테 술 많이 얻어먹었지.’
문석이 나를 참 좋아했었다.
그 총애는 내가 흑풍대주가 되었을 때도 이어졌고.
“마교는 강자존의 세계 아닙니까, 강한 자가 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게 맞습니다. 이제부턴 윗사람으로 모시겠습니다.”
이후 수많은 전공을 세운 내가 문석을 제치고 먼저 흑풍대주가 되었다.
그러면 솔직히 시기, 질투심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자기를 모시던 예전 부하 밑에서 일하게 됐으니.
하지만 문석은 달랐다.
덩치만큼 큰 배포를 가졌는지 그는 시원하게 상황을 인정하고 나를 직장 상사로 모셨다.
그게 참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그도 황균과 함께 내가 마교 교주가 될 때까지 내 등 뒤를 묵묵히 지켜 주었다.
난 당연히 그에 대해 보답을 하려 했고.
하지만 그가 거부했다.
“저는 장로가 되기 싫습니다.”
자기는 현장 체질이란다.
그래서 끝까지 흑풍대주로 남아, 전투 현장 최일선에서 활약했다.
그런 문석이 관아에는 왜 잡혀갔을까?
“말을 훔쳤습니다.”
돈이 좋긴 좋다.
웃돈을 얹어 준다니 개방 거지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문석…… 아니, 석문이 왜 말을 훔쳐?”
“거기에는 좀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 말입니다.”
“무슨 사연?”
“그것이 말입니다…….”
거지의 말을 정리하면 이렇다.
보육원 옆에 있는 마방, 곡아마방.
그곳이 꽤 장사가 잘돼 확장을 꽤 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곡아마방에서 보육원 땅을 팔라고 했는데 문석이 거절했다고.
“곡아마방주가 엄청 짠돌이거든요. 그 땅 시세가 적어도 금자 오십 냥을 할 텐데 절반도 안 되는 금액을 제시했답니다.”
“안 봐도 쓰레기 새끼네.”
계속된 문석의 거절에 마방주는 결국 실력 행사에 나섰다.
부하들을 동원해 보육원에 행패를 부렸다나.
꼬마가 말했던 무서운 아저씨가 이들이지 싶다.
“석문도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협박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거든요.”
여기까지만 들어도 기가 찬다.
고작 마방에서 일하는 놈들이 강해 봤자 얼마나 강하겠는가.
그런 놈들이 문석을 협박해?
흑풍대의 검은 말이 뜨면 정파의 정예고수들도 벌벌 떨었는데.
이 대목에서 남궁정혁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석문이 무공을 할 줄 아는가?”
“아니요, 그는 무공을 할 줄 모릅니다.”
역시나.
이런 곳에서 보육원을 운영한다고 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무공을 잃었다는 걸.
황균이 그랬듯이.
‘…….’
밥 먹는 것보다 싸우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그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 고아들을 돌보는 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협박도 먹히지 않자, 곡아마방주, 오만철은 최후의 수를 썼습니다.”
“그게 설마…….”
“석문이 말 10필을 훔쳤다고 관아에 고발했습니다. 현감은 즉시 포졸을 보내 그를 옥에 가뒀죠.”
“증거는? 그가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옥에 가두든 말든 할 거 아닌가.”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오만철과 이곳 현감, 임숭재가 특별한 관계거든요. 오만철이 사업상 편의를 위해 임숭재에게 수시로 뇌물을 갖다 바쳤습니다.”
임숭재?
또 그놈하고 엮이는 건가?
“석문이 누명을 썼을 수도 있다는 거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크죠.”
아이고야, 숨이 턱 막힌 남궁정혁이 가슴을 쳤다.
검은 말을 타고 중원을 누비던 마교의 흑풍대주가 고작 말 도둑이 되어 옥에 갇힌 신세라니.
사람 앞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지만 이건 너무 초라하잖아.
‘…….’
한편으론 나도 책임감을 느낀다.
아니, 내 잘못이다.
내가 남궁도 그놈에게 패배하지만 않았다면, 그래서 중원을 정복했더라면 황균도, 문석도 인생의 승리자가 되어 누구도 부럽지 않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을 것을.
내 능력이 부족해 저들 인생이 꼬인 것만 같아 괜히 미안하다.
하여간 남궁도가 이 모든 일의 시작이다.
나는 이를 바드득 갈며 물었다.
“오만철이 사는 곳이 어디냐?”
“만나시게요?”
이런 경우, 나의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오만철이란 놈의 모가지를 뚝 부러뜨리는 것.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긴 방법이기도 하지.
하지만 이번만은 평화적으로 해결해 볼 생각이다.
‘문석을 위해서.’
그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그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니까.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이제 이런 것밖에 없다.
누명이든, 아니든 말 열 마리 값을 치를 셈이다.
보육원 땅도 팔게 하고.
위치도 그렇고, 건물도 허름한 게 영 맘에 안 들더라고.
어디 햇볕 잘 드는 곳에 보육원을 새로 만들어 줘야겠다.
문석이 노후를 안락하게 보낼 수 있도록.
그렇게라도 해 줘야 내 맘이 편할 것 같다.
돈이야 살아 움직이는 금고, 왕소단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 * *
“석문이 훔쳐 간 말값을 치르러 오셨다고?”
“그렇소.”
곡아마방으로 찾아가 용건을 밝히니, 오만철의 부하들이 그의 방으로 안내해 줬다.
마침 그가 저녁을 먹고 있었다.
푸짐한 상차림에 반주까지 곁들여.
‘보육원 아이들은 사 일이나 굶었다는데 잘도 처먹네.’
오만철은 비만이었다.
턱살을 목도리처럼 둘렀고, 배는 얼마나 튀어나왔는지 바늘로 콕 찌르면 뻥 터질 것 같다,
척 봐도 탐욕스럽게 생겼네.
그가 입안에 든 음식물을 쩝쩝대며 말했다.
“석문과는 무슨 관계이기에 말값을 대신 갚는다는 거요?”
“거기까진 알 필요 없고, 그저 당신은 돈만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렇지, 아니겠지.
보육원 땅까지 뺏어야 하는데.
그래서 남궁정혁은 그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 줬다.
“보육원 땅도 팔 거요.”
오만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니 어지간히 듣고 싶은 말이었던가 보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 석문의 허락은 받고 온 거요?”
“내가 그의 대리인이니 내 말만 믿으면 돼요.”
문석이 그 땅에 특별한 애정이 있어서 안 판다고 버틴 것도 아니다.
다만 그 땅이 팔면 아이들과 함께 갈 곳이 없을 뿐.
더 살기 좋은 곳에 보육원을 열어 주면 좋다고 가겠지.
“땅을 팔려면 석문이 옥에서 나와야 할 것 아니겠소? 내가 지금 당장 말값을 줄 테니 석문에 대한 고발을 취하하시오.”
크하하하하, 오만철이 파안대소했다.
그렇게 좋냐, 이 돼지 새끼야.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겠소, 내가 땅 때문에 석문을 일부러 옥에 가뒀다고.”
와, 진짜 누가 그랬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방금 가래침 뱉을 뻔한 거 참았다.
“그래서 말값이 얼마요?”
“금자 스무 냥.”
말 한 마리 값이 얼추 금자 두 냥인 거로 알고 있다.
열 마리니까 스무 개 맞네.
“여기 있소. 지금 당장 관아로 같이 갑시다.”
남궁정혁이 돈을 지급했지만, 오만철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움직일 기미가 없다.
“뭐 하시오, 당장 관아로 가자니까.”
“말 한 마리 값이 금자 스무 냥이라고.”
“……뭐?”
“석문이 훔쳐 간 말은 한혈마요.”
“하루에 천 리를 뛰어다닌다는 한혈마? 피 같은 땀을 흘린다는 그 한혈마?”
“잘 아네. 그럼 한혈마가 얼마나 비싼지도 잘 알겠군.”
이 돼지 새끼가 진짜 돌았나.
남궁정혁은 오만철의 말에 절로 나가려는 주먹을 참았다.
한혈마는 중원 전체를 뒤져도 백 마리 있을까 싶은 귀한 말이다.
천마였던 나조차도 몇 번 본 적이 없을 정도이니 말 다 했지.
근데 그런 말이 이런 촌구석에 열 마리나 있었다고?
아마 중원에서 제일 큰 마방에도 그렇게는 없을 거다.
“말값이 금자 이백 냥, 게다가 정신적 피해 보상비는 따로요.”
“정신적 피해 보상비까지 받으시겠다?”
진짜 정신적 피해 보상비가 뭔지 알려 줘?
남궁정혁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지만, 그걸 눈치채지 못한 오만철이 계속 나불댔다.
“혹시 말을 키워 보셨소?”
“아니.”
“석문이 훔쳐 간 그 말들은 내가 새끼 때부터 애지중지 키운 말들이오, 그런 말을 도둑맞았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당신을 모를 거요, 당연히 상처 입은 내 마음도 위로받아야지.”
“그래서 그게 얼만데?”
“금자 천 냥. 말값까지 더해서 총 천이백 냥이지.”
허허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금자 천이백 냥이라니, 그 돈이면 곡아마방의 일 년 치 수익과 비슷하지 않을까?
남궁정혁이 상 위에 있는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캬, 술이 들어가니 정신이 좀 또렷해지네.
입가를 슥 닦은 남궁정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그렇게 사람이 좋아 보이냐? 네 자산을 막 부풀려 줄 것 같고 그래?”
이런 말이 있다.
가는 말이 고우면, 사람을 얕잡아 본다고.
그러면 가는 주먹이 거칠면 어떻게 될까?
저 돼지 새끼가 날 어떻게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