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55화
제기랄, 진퇴양난이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후퇴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기철은 순간의 고심 끝에 전진하기로 했다.
당장은 뒤에서 추격해 오는 막사현의 추격이 더 위급하니까.
기철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금지, 사신의 둥지로 스스로 들어갔다.
‘심유도에 와서까지 쫓길 줄이야.’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가 찾아왔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조정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고 있는 줄 알았던 친구의 표정이 무척 어두웠다.
“이 책자를 맡아 줄 수 있겠나?”
매우 조심스럽게 하는 부탁에 한편으론 서운함 마저 느꼈다.
우리 사이에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그때 친구가 말을 덧붙였다.
“……이 책자를 가지고 있으며 자네도 죽을 수 있어.”
이어지는 친구의 충격적인 발언.
이 책자에 한 나라의 기둥뿌리가 흔들릴 만한 내용이 적혀 있단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항상 활기차고 호통했던 친구가 왜 저리 초조해 보이는지.
하지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자네를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네.”
설사 나의 목숨이 다할지라도.
우린 그런 사이 아닌가.
책자를 맡긴 친구는 그렇게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극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친구가 죽었다는.
그가 타고 가던 마차의 바퀴가 빠져 절벽 밑으로 떨어졌단다.
그때 직감했다.
친구는 살해당했다.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친구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줘야만 했다.
“혹시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거든. 이 책자를 병조판서 유학성 대감에게 전해 주게.”
지금 생각해 보니 친구는 이때 자기 죽음을 예상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신신당부했겠지.
이 책자를 유학성에게 직접 전해 주어야 한다고.
사방에 동창의 첩자가 깔려 있으니 다른 사람을 거쳐서 주면 안 된다고.
친구가 직접 주고 싶었지만, 하필 그때 유학성이 북방의 국경으로 시찰을 나가 만날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기철은 책자를 품 안에 넣고 수도, 남경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뒤를 쫓는 정체불명의 무리가 있었다.
그때부터 기나긴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저들이 자신의 친우를 죽인 장본인들일까?
불안했다.
어딜 가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제대로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었다.
남경으로 가기 전에 붙잡힐 것만 같은, 아니 자신도 죽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더구나 남경에 도착한다 한들 유학성을 어찌 만난단 말인가.
그분은 자신이 직접 만나고 싶다고 쉽사리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결국,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자신이 안전히 몸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딜까?
어디로 숨어야 동창의 눈과 귀가 닿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넓은 중원 천지에 그런 곳은 거의 없었다.
‘일생일대의 도박을 해야만 했지.’
책자를 어느 야산에 묻고 표국을 통해 서신을 부쳤다.
그동안 친구가 했던 일과, 자신이 하려는 일을 적은.
귀한 것을 흔하게 여겨라.
일반 서신이니 오히려 동창의 감시가 허술하지 않을까?
애타고 간절한 마음으로 부친 서신이기도 했다.
제발 이 편지가 유학성에게 무사히 닿기를.
그 후, 애꿎은 관리에게 여러 번 시비를 걸고 사고를 쳐 스스로 죄인이 되었다.
만약 그 편지를 유학성이 보지 못한다면 자신은 영원히 심유도에 갇혀 살아야 한다.
그런데 아뿔싸.
“운도 없었지…….”
이곳에서 막사현의 만날 줄이야.
당장의 사정이 급하다 보니 그와의 악연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왜 하필 그를 여기서 만난단 말이다.
무림인들을 가둔 섬 형태의 옥은 이곳 말고도 중원 곳곳에 있는 거로 아는데.
결국, 심유도 안에서도 죄수 중의 죄수가 되어 쫓겨 다녀야만 했다.
‘팔자 한번 사납구나.’
비참한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후회는 없다.
친구의 부탁을 들어줄 수만 있다면.
자신의 서신을 과연 유학성이 보았을까.
하루라도 빨리 그가 자신을 이곳에서 구해 주길 바랐다.
“휴, 방금 전엔 진짜 죽을 뻔했다.”
무공은 약하지만, 경공 하나는 웬만한 절정고수보다 낫다고 자부했다.
그가 지금껏 살아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오늘 오전, 양쪽에서 포위한 자경단의 함정에 빠져 붙잡혔었다.
푸하하하, 회심의 미소를 짓는 막사현의 잔인한 눈빛이 얼마나 무섭던지.
이제 죽었다 생각했는데 자신의 양팔과 발목을 묶은 밧줄이 어설프다.
손목을 조금씩 움직이니 조금씩 느슨해졌다.
그래서 오늘도 결단을 내렸다.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딴 것보단 목숨이 더 중요하지.”
바지에 똥을 쌌다.
그러자 자경단 놈들이 혐오스럽단 얼굴로 멀찍이 떨어졌다.
그 기회를 놓칠쏘냐, 밧줄을 풀고 순식간에 도망쳤다.
문제는 욕하면서 쫓아오는 막사현의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사신의 둥지 쪽으로 왔다는 거다.
이곳이 왜 그렇게 불리는지는 자신도 모른다.
다만 이곳에 온 첫날, 막사현과의 악연을 모를 때 어느 죄수가 알려 줬다.
마을 반대편 산봉우리에는 근처도 가지 말라고.
그곳의 동백나무 숲에 들어가면 절대 살아서 나올 수 없다고.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장에 막사현에게 잡혀서 죽느니 이곳에서 단 일각이라도 더 사는 게 나으니까.
‘…….’
그런데 막상 들어오니 별거 없다.
평화롭게 지저귀는 새소리, 수풀이 우겨져 만든 그늘.
다른 곳보다 오히려 아늑하다.
지레 겁먹은 막사현도 더는 쫓아오지 않고.
‘왜 이곳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거지?’
잘못된 소문이 퍼진 건 아닐까?
진즉에 여기서 생활할 걸 그랬네.
간만에 마음의 안정을 찾은 기철이 바지를 벗었다.
마침 지하수가 솟아나는 작은 웅덩이가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씻고, 바지도 빨아야겠다.
그가 깨끗이 빨래한 바지를 햇볕이 잘 드는 바위 위에 널었을 때였다.
“그쪽이 기철이란 사람입니까?”
“……!”
등 뒤에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기에 더욱 소름 돋았다.
뒤를 돌아보니 앳된 미청년이 서 있었다.
“휴, 이제야 겨우 만났네.”
“당신은 누구……?”
“유학성이 보내서 왔습니다. 남궁…… 아니 유안이라고 합니다.”
아아, 드디어…….
순간 하늘에 감사했다.
서신이 그에게 무사히 닿았구나.
기철을 쫓아 금지 안까지 들어온 남궁정혁이 말했다.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이곳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밖이 더 위험합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도주인 막사현이 날 죽이려고 하거든요.”
“이젠 내가 도주요.”
“……?”
“막사현을 죽이고 내가 도주가 되었다고요.”
남궁정혁이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내가 내 일을 방해하는 놈을 살려 둘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라서, 그게 꼭 아니더라도 죽어 마땅한 놈이긴 했죠.”
아, 유학성 대감이 사람을 제대로 보냈구나.
그 흉폭한 막사현을 죽이다니.
기철의 눈에는 남궁정혁이 하늘에서 내려온 지국천왕처럼 듬직하기만 했다.
“흠흠, 그전에 우선 바지부터 입으시오.”
남자 둘이 있는데 아래를 까고 있으니 민망하구먼
남궁정혁이 고개를 돌리자 기철이 바지를 주섬주섬 입으려고 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지국천왕님께서 불편하시다는데.
입으면서 말려야지.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어어…….”
별안간 들려오는 기철의 당황스러운 외침.
이에 남궁정혁이 고개를 돌렸는데 기철을 보았는데.
“……!”
대체 이게 어찌 된 현상인가?
기철이 허공에 떠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마치 공중에서 수영이라도 하듯이.
“내가 왜 이런 것…… 커억.”
놀란 기철이 말을 끝맺지 못했다.
쑤우우욱, 한 사람이 나타나 그의 목을 꽉 쥐었기 때문이다.
“……허공섭물?”
허공섭물이란 극강의 고수가 내공으로 사물을 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인 남자를 저렇게 들어서 움직인다?
최소 화경급 고수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저자가 사신인가?’
동백나무 숲에 들어오기 전 덕천에게 들었다.
이곳에 사신이라 불리는 괴물이 산다고.
그는 약 오 년 전 심유도에 왔다고 한다.
‘젠장, 저자에게 발각되지 않고 나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저자가 사신이라는 흉악한 악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지가 동백나무 숲을 돈 주고 산 것도 아니면서 이곳에 접근한 자를 모조리 죽였기 때문이다.
불법 점거인 주제에 소유권 주장은 확실한 거지.
대신 그는 동백나무 숲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심유도 도주가 되어 죄수들 위에 군림할 수 있지만, 본인만의 공간에서 혼자 사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아직도 이곳에 들어오는 멍청한 놈이 있었군. 그것도 둘이나.”
긴 수염이 얼굴 전체에 빼곡히 자리 잡아 나이를 쉽사리 짐작할 수 없다.
다만 목소리로 추정컨대 보이는 것에 비해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40대 후반? 아니면 50초 초반?
“남자 둘이서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것이냐? 그것도 바지까지 벗고.”
“피치 못 할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들어왔을 뿐, 우린 곧바로 나갈 것이니 그를 풀어 주시오.”
우선은 대화로 사태를 해결하고픈 남궁정혁이 정중히 말했다.
사신이 코웃음 쳤지만.
“흥, 어차피 네놈도 죄를 지었으니 이 섬에 갇힌 거겠지. 그런 버러지 만도 놈의 말을 내가 왜 들어 줘야 하냐?”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대화가 통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럼 나도 예의 차릴 필요 없지.
“그렇게 말하면 자기 얼굴에 스스로 똥칠하는 거 아닌가? 당신도 죄를 지었으니 여기에 있는 거잖아, 지금 스스로 난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라 인정하는 거야?”
“내가 너희 같은 놈들과 같은 줄 아느냐? 난 죄가 없다. 스스로 이곳에 잡혀 왔다.”
“이 세상의 죄수들은 다 나빠. 근데 그중에서 가장 나쁜 놈들이 누군 줄 아쇼?
남궁정혁이 묻자 사신이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살인자?”
“아니, 당신 같이 사람이야, 죄를 짓고도 난 죄가 없다고 부정하는 사람. 심유도에 괜히 잡혀 왔겠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왔겠지. 지금이라도 인생을 반성하는 자세로 살아요. 그럼 혹시 알아요? 극락왕생은 이미 물 건너갔지만, 지옥만은 안 갈지.”
“네놈이 혓바닥이 뽑히고 싶나 보구나.”
“혓바닥 뽑히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멍청하기는.”
남궁정혁이 비아냥거리자 기철의 목을 쥔 사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서 애꿎은 기철의 목만 더 조였다.
“커억, 커어억.”
“그 사람 그만 놔주죠. 그러다 진짜 죽겠는데.”
“어차피 너희는 이곳에서 다 죽는다.”
말뿐인 허세가 아니다.
사신이 기철의 목을 뚝 부러뜨리려 할 때 남궁정혁이 다급히 외쳤다.
“그자를 죽이면 안 돼. 나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란 말이야.”
“그럼 그렇지.”
사신이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사내놈 둘만 있는데 바지를 벗고 있더라니.”
“……?”
“사내들만 섬에 갇혀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기지.”
뭔 말이야?
저 인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비역질을 하면 되냐?”
……뭐?
비역질이라 하면 남자들끼리 그렇고 그런……?
갑자기 열이 확 받는다.
세상 살다 살다 별 오해를 다 받아보네.
마음 같아서는 저 인간의 주둥아리를 확 잡아 찢어 주고 싶은데, 화경급 고수다.
현재 내 수준으로는 솔직히 힘든데.
음…… 참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