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59화
의외다.
장표가 나랑 비슷한 인생 철학을 가지고 있다니.
“일단 손을 썼으면 마무리까지 확실히 지어야 하네. 그래야 뒤탈이 없거든.”
고럼, 고럼.
어설프게 손을 쓰면 나중에 앙갚음당할 수도 있지.
남궁정혁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항해병들이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육지에 도착한 지금,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사, 살려 주십시오.”
“오늘 있었던 일을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이 싹싹 빌었지만 통할 리가 있나.
장표는 심유도에서 오 년 동안 독이 바짝 오른 사람인데.
“너희들에게 개인적 원한은 없지만 모두 죽어 줘야겠다.”
쓰임새가 다해 죽는 것이 어찌 사냥개만의 일이까.
“으허헉.”
“크아아아악!”
장표가 손을 일렬로 쭉 긋자, 나란히 선 항해병들의 목이 추수철 옥수수마냥 후두둑, 떨어졌다.
이로써 이 군함을 타고 출항했던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자네들은 먼저 배에서 내리게.”
아, 옙.
누구의 말이라고 거역할까.
양손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표님이 말씀하시는데 당연히 따라야지.
남궁정혁이 기철과 함께 군함에서 내리자, 뒤에서 우당탕탕, 시끄러운 타격음이 틀린다.
‘군함을 침몰시키려는 건가?’
……재밌겠는데.
나도 왕년에 마교의 파괴왕이라 불릴 정도로 내 손에 걸리는 건 다 부수고 다녔지만, 저렇게 큰 물건은 부순 적 없다.
속에 쌓인 울화가 확 풀리겠네.
배가 커서 그런지 침몰시키는 데도 한참 걸린다.
‘나도 옆에서 좀 도울까?’
그런 생각을 할 때 꽐꽐꽐, 선체 곳곳에 큰 구멍이 난 군함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초승달이 휘영청 뜬 밤이라서 그런가.
막상 커다란 배가 침몰하는 모습을 보니 으스스하기도 하다.
죽은 수군들의 영혼이 바닷속에서 배를 끌어당기는 느낌이랄까.
“다 됐네.”
정작, 수군과 군함, 모두를 바닷속에 묻어 버린 당사자는 멀쩡하지만.
따닥, 날렵한 경공으로 배에서 뛰어내린 장표가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후아, 후아.”
육지로 돌아온 것이 그렇게 감동스러운가.
그가 남궁정혁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자네 덕분이야, 다 자네 덕분에 내가 중원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어.”
“저도 도움을 받았으니 그리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아니다. 언제가 기회가 된다면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네. 내가 은혜와 원한의 구분이 확실한 사람이거든.”
그리도 고맙나?
본인이 꼭 은혜를 갚겠다는데 나야 나쁠 건 없다만.
본인 편한 대로 하시구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당연히 복수부터 해야지.”
상대가 상대인 만큼 쉽지 않을 텐데.
“우선을 나를 따르던 사람들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하나로 모을걸세.”
눈빛 한번 살벌하네.
거친 인생을 살아오면서 웬만한 산전수전 다 겪은 내가 움찔할 정도다.
“내 눈에서 눈물 하게 했으니…….”
“그자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한다고요?”
“아니, 아주 눈알을 뽑아 버려야지.”
……헛것이 보인다.
장표의 송곳니에서 독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적이 되면 상당히 피곤한 유형이군.
“원하는 바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
“자네는 어찌할 계획인가?”
“기철과 함께 따로 갈 곳이 있습니다.”
더 자세히 얘기해 주고 싶지만, 기밀을 요하는 일이라.
이제 유학성을 만나러 가야지.
기철을 찾으면 오라고 했던 그곳으로.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그럼 이곳에서 헤어져야겠군.”
“또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반드시 있을 걸세. 무림이란 곳은 넓으면서도 좁은 곳이니까.”
장표는 손을 흔들며 저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육지로 돌아와서 그렇게 좋나?
경쾌한 발걸음이 꼭 복수가 아니라 나들이 가는 사람 같네.
* * *
“그럴 수가…… 영기가 동창의 첩자였다니.”
남궁정혁의 말에 유학성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이해한다.
믿었던 사람이 사실은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면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대감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동창이 준 게 더 많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배신했답니다.”
쾅, 유학성이 탁자를 치자, 찻잔 속의 차가 찰랑찰랑 흔들렸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배신한 거였나.”
유학성과는 군함이 도착한 포구, 인근 마을의 한 장원에서 만났다.
군부의 비밀 안가란다.
“어쨌든 기철을 데려왔으니 제가 할 일은 다 한 거죠?”
“수고했네, 역시 자네에게 맡기길 잘했어. 자네가 아니었으면 이 일은 성공 못 했을 거야.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수완이 좋군.”
배신한 영기는 내가 죽인 것으로 했다.
아무래도 장표가 탈옥한 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기철에게도 그렇게 말하도록 입단속시켰고.
그도 순순히 수긍했다.
“비리 조사 보고서를 회수해서 꼭 동창을 소탕하세요.”
동창의 교활한 수법을 볼 때 쉽지는 않아 보인다만, 내 알 바 아니다.
이제 더는 조정과 엮이지 않으리.
“그럼 저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 볼게요.”
예상외로 집 떠난 지가 너무 오래됐거든요.
꾸벅, 인사한 남궁정혁이 떠나려는데 유학성이 붙잡았다.
“갈 땐 가더라도 이건 들고 가야지.”
“……?”
뭘요?
이별 기념으로 뭔 선물이라도 주려나 했는데 아니다.
절대 받고 싶지 않은 물건이다.
슥, 유학성이 둥그런 패를 내밀었다.
“암행무사가 용패를 두고 가서야 쓰나.”
“……이번 한 번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나요?”
“자네, 농담도 잘하는군. 암행무사가 일용직인 줄 알았는가?”
그러는 판서 나리야말로 농담하지 마시죠.
이 짓거리를 또 하라고요?
“암행무사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무림인 중에서도 선택받을 자만이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직위지.”
“그래서 제가 계속해야 한다고요?”
“관에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자넬 찾을걸세.”
내가 나름 사생활이 바쁜 사람인데 너무 막 부려 먹으려고 하네.
“암행무사는 언제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이 나라에서 자네가 필요 없어질 때까지.”
“녹봉은 주나요?”
“암행무사는 명예직일세, 따로 돈은 주지 않아.”
이런 개 같은.
이 정도면 나라에서 앞장서서 노동 착취하는 거 아닌가.
돈도 제대로 안 주면서 사람을 공짜로 부려 먹다니.
괜히 간신배가 날뛰는 게 아니다.
남궁정혁이 용패를 집었다.
그렇다고 암행무사를 계속하겠다는 건 아니고.
‘이놈의 용패, 확 부러뜨려야지.’
안 하겠다는 확실한 거절의 표시로.
하지만 유학성은 남궁정혁의 행동을 오해했다.
“승낙할 줄 알았네. 역시 자넨 정의로운 사람이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확실히 눈치는 없다.
그러니 부하한테 뒤통수나 맞지.
대체 병조판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나라의 미래가 심히 걱정되는구먼.
근데 이거 왜 이렇게 안 부러지는 거야?
뭘로 만들었길래.
남궁정혁이 내공까지 끌어 올려 용패를 부수려고 할 때였다.
“비록 보수도 없는 명예직이지만 암행무사가 되면 좋은 점이 있네.”
“……?”
“암행무사는 임무의 특성상 면책 특권이 있네. 반역죄만 아니라면 어떤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아.”
“제가 길을 가다 아무 관리를 붙잡고 때려도요?”
“그럼 그자가 탐관오리겠지.”
“부잣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쳐도요?”
“암행무사가 하는 일인데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오호, 이건 좀 혹하는데.
일단은 가지고 있어 봐?
햐아, 남궁정혁이 입김을 불어 용패의 겉면을 꼼꼼히 닦았다.
* * *
“도련님, 대체 뭐 하다 이제야 돌아오신 겁니까?”
남궁정혁이 남궁세가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정학우가 뛰쳐나왔다.
“묻지 마라. 말할 수 없으니까. 다만 이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것만 알아 둬라.”
정학우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남궁정혁에 옆에 붙어 코를 킁킁댔다.
“뭐 하냐?”
“술 냄새는 안 나는데.”
이게 나를 뭘로 보고.
해가 아직 중천에서 넘어가지도 않았구먼.
“곡아현에서 도련님이 혼자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떠난 지가 벌써 이십여 일이나 지났습니다.”
그렇게 오래 걸렸나?
하긴 기나긴 여정이긴 했지.
주살검 하나 가지러 갔다가 그렇게 일이 꼬일지 난들 알았나?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으흐흐, 남궁정혁이 흐뭇한 마음으로 바지춤을 매만지자, 동그랗고 단단한 용패의 촉감이 느껴진다.
이것만 있으면 걸릴 게 없단 말이지.
“뭐가 그리 좋길래 혼자 웃으십니까?”
“네가 세상을 살면서 아니꼽게 느낀 관리 없냐? 있으면 말해 봐라. 내가 부하들 복지 차원에서 대신 때려 줄 테니까.”
정학우가 다시금 남궁정혁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리 봐도 어디서 낮술 한잔 마시고 온 것 같은데.
“주먹이 근질거리는데 마땅히 패 줄 관리가 없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러니 저렇게 헛소리를 늘어놓지.
남궁정혁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정학우에게 물었다.
“석문과 아이들은 어찌 됐냐? 잘 데리고 왔냐?”
“도련님의 말씀대로 경치 좋고 양지바른 곳에 새 보육원을 열었습니다.”
그의 말을 더 들어 보니 왕소단이 적지 않은 금액을 썼다고 한다.
자식, 잘했다고 어깨라도 두들겨 줘야겠네.
“가 보자, 석문에게 인사하러.”
“거기보다 먼저 가 볼 곳이 있습니다.”
“어딜?”
“잊으셨습니까?”
“……?”
“도련님이 비양도로 떠나기 전 무얼 하고 있었는지.”
……아, 맞다.
남수단 건물을 새로 짓고 있었지.
“다 지어졌냐?”
“직접 가서 보시지요.”
* * *
“와.”
“어떠십니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정말 기깔 나게 잘 지었어.
‘남궁세가 내 건물 중에서 가장 멋있군.’
넓은 부지에 위에 오 층짜리 전각이 우뚝 서 있다.
값비싼 자재를 써서 그런지 무척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금색으로 치장하여 너무 화려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오히려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거 왕소단의 어깨가 아니라 엉덩이를 두들겨 줘야겠구먼.
‘이제 여기서 함께 살 단원들만 구하면 된다.’
팔짱 낀 남궁정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새 건물을 바라볼 때였다.
‘……’
잠깐, 뭔가 허전한데.
그가 휙휙, 고개를 양옆으로 돌렸다.
“안 보이네.”
“뭐가요?”
“애들, 서문호, 양일남 말이야.”
단주님이 오랜 외출에서 돌아왔으면 정학우처럼 당장에 뛰쳐나오지는 못할망정, 아직 코빼기도 안 비쳐?
괘씸한 것들.
“외출했어? 세가 내에 없는 거야?”
“아니요, 저 안에 있습니다.”
정학우가 손가락으로 새 건물 한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보니 창문으로 두 사람의 인영이 아른거린다.
“이것들이 빠져 나지고.”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나?
아무래도 조직의 위계질서가 무너진 것 같다.
내 또 밑에 놈들이 버르장머리 없는 건 못 참지.
‘…….’
사실 다른 것도 다 못 참긴 하지만.
뭐, 어쨌든.
“당장 내려오라고 해. 오랜만에 친목 도모와 체력 증진을 위해 수련을 해 보자.”
네놈들은 오리걸음 1리부터 시작해서 앉았다일어서기 만 번까지, 아주 제대로 굴려 주마.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생길 때까지.
“한 번만 봐주시죠. 저들이 나오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 어디 아파?”
그런 거라면 내 넓은 아량으로 봐줄 수도 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아픈 건 아니고 쪽팔린 거죠.”
“……?”
“삼 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정학우의 설명을 들은 남궁정혁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뭐라고!”
무슨 일이 있었다고?
남궁정혁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내가 없는 사이, 있을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저런 놈들이 나의 수하라니.
와 씨, 나까지 쪽팔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