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61화
“할 말이 있습니다.”
남궁정혁이 남궁도가 있는 가주실 문을 대차게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가주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대장로 남궁수와 그의 측근들도 있었다.
“…….”
척 봐도 남궁세가의 장로들은 여기 다 모인 것 같네.
저들이 한가롭게 마주 앉아 다과를 즐길 사이도 아니고, 대낮부터 뭐 하는 거람?
“지금 월두 회의 중이다.”
아, 그랬나.
오늘이 달의 첫 번째 날이었나.
월두 회의는 매달 첫째 날, 세가의 수뇌부들이 모여 가문의 대소사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는 자리다…… 라고 정학우에게 예전에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사이가 사이니만큼, 가주 측 장로들과 대장로 측 장로들이 얼굴을 붉히며 언쟁을 벌이는 일도 잦다고.
근데 아직은 안 싸웠나?
다들 차분한 모습이다.
‘회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군.’
탁자 위에 놓인 차와 과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거로 보아 그런 것 같다.
조금 더 늦게 올 걸 그랬나?
재밌는 구경거리를 놓쳤네.
“할 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함부로 낄 자리가 아니니 나중에 다시 찾아오거라.”
남궁수 옆에 앉아 있는 재경각주, 남궁학이 말했다.
예전 백합투괴를 잡아 오면 새 건물을 준다고 해놓고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폐건물을 내준 그 좀팽이 말이다.
그러니 그의 말이 남궁정혁에 먹힐 리가 있겠는가.
남궁정혁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이 저렇게 속이 좁은 소인배다.
“낄 자리, 못 낄 자리 구분은 내가 알아서 하니, 재경각주는 마시던 차나 계속 마십쇼, 그 사이에 제 볼일은 끝날 테니.”
“너는 여전히 버릇이 없구나…….”
남궁정혁이 발끈하는 남궁학을 무시하고 남궁도 앞에 섰다.
“제가 꼭 가고 싶은 데가 있는데 가주의 허락이 필요하다는군요.”
“…….”
남궁도가 계속 말해 보라는 듯한 의미로 남궁정혁을 바라보았다.
“강시가 출몰했다고요? 남수단이 가서 깔끔하게 처리해 드리죠.”
“그 일은 현무단이 맡기도 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저희도 함께 가 주겠습니다.”
남궁정혁이 큰 인심 쓴다는 듯 말하자 등 뒤에서 볼멘소리가 들렸다.
“단원도 얼마 되지 않는 주제에 무슨 백지장을 맞들어? 현무단 발목이나 안 잡으면 다행이지.”
남궁학이었다.
그가 과일을 씹으며 계속 말했다.
“듣기로는 얼마 전 현무단원과 남수단원이 결투를 벌였는데 남수단원이 일방적으로 졌다고 하더군요.”
그의 말에 남궁수 측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가 적으면 질이라도 높아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니.”
“단주가 저리 천둥벌거숭이처럼 설치는데 단원들이라고 다를까요.”
“남궁세가 저리 질 떨어지는 부대가 필요합니까? 차라리 이번 기회에 해체하죠.”
저런 소리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했다고, 기분까지 나쁘지 않을쏘냐?
오히려 더 기분 나쁘다.
그걸 빌미로 어떻게든 나와 남수단을 헐뜯고 싶어 하는 저들의 태도가 괘씸해서.
아주,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다.
그동안 나 욕하고 싶은 거 어떻게 참았냐.
게다가 남궁수의 태도는 또 어떻고.
‘차라리 대놓고 웃어라.’
점잖은 척, 한껏 무게 잡고 앉아 있는 그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린다.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다.
가식적인 놈, 그렇게 고소하냐?
“저는 강시를 꼭 퇴치해야겠습니다.”
남궁정혁이 남궁수에게 단호하게 주장했다.
“무식한 인간들이 남수단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거든요. 그들의 삐뚤어진 인식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라도 강시를 아작 내야겠습니다.”
“…….”
톡톡톡, 남궁도가 아무 말 없이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쳤다.
고민할 때 나오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역시, 그 일 때문이었나?’
그동안 어딜 싸돌아다녔는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나타나, 더 뜬금없는 요청을 하길래 또 뭔 바람이 불었나 했다.
그런데 명예회복을 원한다?
‘최소한 의기소침해 있는 것보단 낫군.’
그도 당연히 남수단과 현무단이 충돌한 것을 알고 있었다.
무영각의 각주, 모단수에게 보고 받았으니.
혹시나, 남궁정혁이 그 일로 기가 죽은 건 아닌가 걱정도 했고.
괜한 염려였지만.
‘확실히 심지가 굳건해졌어.’
굳이 비유하자면 예전의 남궁정혁은 사나운 개였다.
상대가 누구든 일단 짖고 보는.
하지만 사납다는 게 곧 강하다는 걸 뜻하진 않는다.
오죽하면 그런 말도 있을까.
약한 개가 먼저 짓는다.
자기 내면의 나약함을 숨기기 위해 먼저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망나니.
그게 예전의 남궁정혁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대답해 봐요, 나 강시 잡으러 가도 되는 거 맞죠?”
버릇없는 건 예전과 그대로지만…….
“거참, 답답하네, 뭐라고 말 좀 해 보라고요, 오늘 아침에 혓바닥 씹어 드셨나?”
아니, 싹수는 더 없어진 것 같지만, 그래도 한 인간으로서는 훨씬 더 단단해졌다.
그건 의욕에 불타는 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지.
“현무단보다 남수단이 훨씬 더 유능한 조직이니깐 일단 믿고 맡겨 보시라까요.”
흡족하다.
위축되고 소심한 것보다야 패기와 자신감이 넘치는 게 좋지.
‘…….’
솔직히 좀 과하기는 하다만.
쟤는 성향이 왜 저리 극단적으로 오가는 걸까?
그래도 아비로서 기회는 줘야겠다.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
“남수단은 현무단과 함께 출동하여…….”
남궁도가 남궁세가의 가주로서 남수단의 출동을 허락하려고 할 때였다.
“저는 거추장스러운 짐과 함께 가기 싫습니다. 이번 일은 현무단만으로 충분합니다.”
한 사내가 등장했다.
나이는 삼십 대 초중반?
귀밑으로 길게 기른 구레나룻이 인상적이다.
“부디 그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아니면 차라리 남수단만 보내시든가요. 저는 짐짝 달고 일 못 합니다.”
말하는 본새로 보건대 저자가 아마도…….
“현무단주 남궁남호, 가주님 앞에서 예를 갖추시오.”
역시나, 현무단주인가 보다.
아무리 그래도 가주 앞에서 고개를 너무 빳빳이 세우고 있는데.
현무단이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전력 중 하나라 해도 저건 너무 건방지잖아.
저 정도 유세를 떨려면 분명 믿고 있는 뒷배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말이야.
‘……잠깐.’
휙휙, 남궁정혁의 시선이 남궁수와 남궁남호를 오갔다.
‘……닮았네.’
설마 부자 사이?
그런 짐작을 할 때 남궁남호가 남궁수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출동하기 전에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야, 이놈의 집안, 핏줄 한번 강하네.
나와 남궁강혁도 남궁도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남궁수 부자 역시 마찬가지다.
아주 판박이처럼 닮았다.
남궁도를 싫어하는 것 역시 똑같은 것 같고.
“이곳까지 찾아와서 인사하는 걸 보니 현무단주는 참 예의가 있어.”
“내 자식이 자네 반만 닮았으면 좋겠어.”
남궁남호의 등장에 남궁수 측근들이 난리가 났다.
다들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그를 칭찬했다.
그중 가장 열심인 사람은.
“이리 와서 앉아라.”
자기 자리까지 내준 남궁학이었다.
그 꼴을 보니 기가 차는구먼.
어이, 아저씨. 나보고는 함부로 낄 자리가 아니라며.
그럼 남궁남호는 낄 자격이 있다는 거냐?
그가 남궁학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는 모습을 보니 남궁수 측근들이 그에게 아부 떤 것이 오늘만의 일은 아닌 듯하다.
“가주, 어떡할 거요?”
남궁수가 말문을 열었다.
“현무단주는 남수단과 함께 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소. 가주는 그 뜻을 존중해야 할 것이오.”
남궁도의 등 뒤에 서 있던 모단수가 반박했다.
“월권행위입니다. 누구를 어디에 보낼지는 가주님이 결정합니다. 현무단주가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란 말입니다.”
“건방진 놈, 네놈에게 물은 게 아니다.”
“저도 대장로님께 말한 게 아닙니다. 현무단주에게 말한 거지요.”
“남궁정혁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가주 쪽 사람들은 버릇이 없구나.”
“남의 사람 탓하기 전에 자기 자식부터 챙기시지요. 현무단주야말로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가 부족해 보입니다.”
“네놈이 뚫린 입이라고 막 나불대는구나!”
쾅,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남궁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모단수를 노려보자, 그도 지지 않겠다는 듯 남궁수를 노려보았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라고 가만히 있겠는가.
덩달아 눈에 쌍심지를 켜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싸움이 시작되는 거구나.’
마음 같아서는 가주실 한쪽에 의자를 갖다 놓고 저들이 싸우는 광경을 더 구경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그럴 상황이 아니다.
지금은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당신들이 싸우든 말든 내 알 바 아닌데 우선은 내 말을 좀 들어 달라고.
짝짝, 남궁정혁이 분위기 환기 차원에서 손바닥을 쳤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나중에 천천히들 싸우시고, 우선은 제 문제부터 결정하죠.”
“결정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넌 그냥 세가에 남으면 된다.”
남궁남호, 저 인간은 날 언제 봤다고 초면에 반말이야?
“나랑 같이 가기가 그렇게 싫냐?”
“건방진 놈, 감히 어디서 반말이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거 몰라? 존댓말 듣고 싶으면 너부터 존댓말 하든가.”
“버르장머리 없는 놈, 난 너보다 나이가 많은 사촌 형뻘이다. 당장 예를 갖추지 못하겠느냐?”
젊은 놈이 꼰대 같기는.
무림에서 조금 일찍 태어난 게 무슨 대수라고.
이 바닥에선 싸움 잘하는 사람이 당연히 형이지…….
“……!”
순간 남궁정혁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나한테 그렇게 형 소리가 듣고 싶어? 좋아, 형이라고 불러 줄게.”
“불러 줄게가 아니고 내가 당연히 형…….”
“단!”
남궁남호의 말을 끊은 남궁정혁이 검지를 세웠다.
“내기하는 거야.”
“무슨 내기?”
“강시를 부리는 영환술사 잡는 내기, 이기면 내가 형이라고 불러 주지.”
흥, 그의 속셈을 깨달은 남궁남호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해서 현무단을 따라가려는 네놈의 꿍꿍이를 모를 것 같으냐?”
“그래서 싫어? 질 것 같아서? 현무단주란 양반이 저리 겁이 많아서 어쩌나.”
남궁정혁의 도발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남궁수 대장로님, 자식을 잘못 키우셨습니다. 사내의 배포가 저리 작아서야 어찌 큰일을 하겠습니까? 아무래도 남궁남호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는 현무단주까지가 다인 것 같습니다.”
간만에 혓바닥을 놀렸는데 효과가 있다.
“네놈이 감히 누구 아들에게 막말하는 것이냐!”
아비, 남궁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고.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마라.”
아들, 남궁남호는 뜨거운 콧물을 씩씩 뿜어댔다.
“그러니까 내기하자고, 내가 당신을 공경할 기회를 달라니까?”
“좋다, 하자, 내가 고작 네놈에게 질 것 같으냐.”
앗싸, 걸렸다.
주변에서 오냐오냐하면서 키워서 그런지 몰라도 의외로 단순한 놈이다.
제 성질을 못 이겨서 허락한 걸 보면 말이다.
“불공평한 내기다.”
남궁수가 트집을 잡고 나섰다.
“뭐가요?”
“경호는 너보다 나이가 많다. 네가 형이라 부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경호가 너를 형이라 부르는 건 크나큰 치욕이다.”
“이기면 되잖아요, 설마 자식을 믿지 못하는 겁니까?”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기의 조건은 공평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쳇,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대충 어물쩍 넘어가려 했는데 안 통하네.
“그럼 어쩌자고요? 다른 조건을 더 붙여요?”
남궁수가 고개를 돌려 한 사람을 바라봤다.
“……?”
바로 남궁도를.
“가주는 자기 자식을 믿으시오? 난 믿는데.”
저거 뭐 하자는 수작일까?
설마……?
“어떻소? 우리도 내기에 참여하는 것이. 자식이 지는 사람이 상대를 형이라고 부르는 거요.”
남궁수의 제안이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만큼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남궁세가가 족보도 없는 쌍놈들 집안도 아니고, 무려 천하제일세가라 불릴 만큼 명망 있는 집안이다.
그런 곳에서 가주와 대장로가 호칭을 가지고 내기라니.
이건 남궁정혁과 남궁남호가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아, 물론 가주에게 매번 형 소리를 들으면 나도 민망하니 딱 한 번,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릴 때 형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미 자기가 내기에서 이긴 것처럼 말하네?
그만큼 자식을 믿는 건가?
딱히 안 믿어도 될 것 같은데.
남궁정혁이 그런 생각을 할 때 남궁도가 입을 열었다.
“애초에 형이라 부르지 말라고 말 건 대장로 아닙니다.”
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젊은 시절, 제가 형이라고 하니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다면서 대장로가 화낸 건 기억 안 나십니까?”
“내가 그랬나? 오래전 일이라 난 기억이 잘 안 나오.”
의뭉 떠는 걸 보니 기억하네, 기억해.
젊은 적엔 서자라 무시했다가 남궁도가 가주가 되니 이제야 형 소리가 듣고 싶은가 보다.
하여튼 저 인간은 왜 저리 치사할까.
“그래서 가주는 내기를 할 거요? 말 거요? 혹시 질까 겁나는 건가?”
남궁수가 재촉하자, 모단수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가주님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내기를 하겠습니까…….”
슥, 남궁도가 손은 들어 모단수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물었다.
“자신 있느냐?”
내기에서 이길 자신이 있냐고.
말해 뭐 해.
당연한 것을.
남궁정혁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제껏 뭘 하든 남한테 져 본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 남궁도 당신한테 패배한 것만 빼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