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87화
복주에서 남궁세가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삼 주가 지났다.
단주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려다 보고 있으니 옆에 있는 정학우가 말을 건넸다.
“내상이 다 나으신 것 같습니다. 혈색이 완전히 돌아왔네요.”
“내가 그간 들인 공이 얼만데 당연히 나아야지. 그런 것치곤 조금 늦게 나은 감이 있지.”
“그러게요, 술만 안 드셨어도 더 빨리 나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건 내가 마시고 싶어서 먹은 게 아냐. 어쩔 수 없이 마신 거지.”
남궁정혁의 뻔뻔한 대답에 정학우가 피, 샐쭉였다.
“누가 도련님한테 억지로 술 먹였습니까, 본인이 좋아서 마신 거지.”
“사람 성의를 무시할 순 없잖냐, 내가 그러게 야박한 사람이 아니거든.”
묘화에게 복주까지의 여정을 알려 줬더니 그녀가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진백현 부부가 무사히 떠나게 된 것을.
또한 고마워했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딛고 그들을 지켜 준 것에 대하여.
묘화가 그런 마음을 회식으로 보답하더라고.
“마음껏 드십시오.”
지난 삼 주간 옥화루에 한 열 번은 간 것 같다.
그녀가 나와 남수단을 수시로 초대하는데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준비한 술도 남길 수 없고.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
“난 어쩔 수 없었어. 묘화를 성의를 거절할 수 없었단 말이야.”
그런 이유로 단전의 회복이 조금 늦어진 감이 있긴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맛있는 술과 음식을 즐겼으면 됐지.
당장 무공 쓸 일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모두 의욕이 넘치는군요.”
정학우도 남궁정혁과 함께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의 끝에는 연무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남수단 1조, 2조, 3조가 있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요. 우리가 한시라도 수련을 게을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저러다 세뇌당하는 거 아닐까?
1조가 서문호에게 물들까 걱정도 되는데.
그래도 자기들이 선택한 조장이란 이건가.
1조는 서문호의 일장연설이 끝나자마자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싸우다 다치면 자기 손해입니다. 다음 전투에서 죽고 싶은 사람은 수련하지 않아도 돼요.”
저건 자율성을 강조하는 걸까?
아니면 시비를 거는 걸까?
그래도 효과는 있다.
양일남의 삐딱한 말에 오히려 자극을 받았는지 2조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열심히 검을 내리쳤다.
“녹봉은 공짜가 아냐, 받은 만큼 일해야지. 수련도 일의 일환, 녹봉을 더 많이 받으려면 열심히 수련하세.”
아주 현실적인 이유다.
남궁정혁 가슴에 가장 와닿은 말이기도 하고.
그렇지, 남의 돈 받아먹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3조도 남궁건의 호령에 맞춰, 성심성의껏 검을 휘둘렀다.
“모두 의욕이 넘치는군.”
부하들의 저렇게 열심히 수련하는데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뭐라도 해야지.
남궁정혁은 책상 앞에 앉았다.
“또 그걸 하시려는 겁니까?”
“조용히 해라, 지금부터 집중력이 무척 중요한 작업을 하니까.”
현재 남수단이 익힌 무공은 대연검법이다.
얼자인 나도 이걸 익혔고.
남궁세가의 혈족이 아닌 자는 이것보다 더 나은 검법을 배울 수가 없으니까.
남궁세가에서 가장 좋은 검법인 창궁무애검법은 남궁세가의 피를 이은 사람만이 익힐 수 있다.
쪼잔한 정파 놈들답게 하는 짓이 엄청 치사한 거지.
그래서 대연검법을 개량해 볼까 한다.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고, 어색한 부분은 개선해서 남수단 전용 검법으로 쓰려고.
지금 그 개량 작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는 중이다.
남궁정혁이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름은 뭐라 정하는 게 좋을까?
‘……대연천마검법?’
아니야, 이건 너무 노골적이야.
천마라는 명칭에 단원들이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어.
‘……남수대연검법?’
이건 너무 촌스러워.
뭐 좀 멋지고, 척 듣는 순간 강하게 느껴지는 그런 명칭이 없을까?
남궁정혁이 옆머리까지 지그시 누르며 고민하자 정학우가 말했다.
“이름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삼 일째 그것만 생각하십니까?”
얘가 뭘 또 모르네.
무공에서 가장 중요한 게 명칭이야.
목숨 걸고 싸울 적에게 자신 있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명칭.
“네 이름이 정학우가 아니라 방자라고 생각해 봐라. 넌 그걸 사람들한테 얘기하고 싶겠냐? 자기소개 당당히 할 수 있겠냐고.”
“……멋진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그 누구에게라도 부끄럽지 않은 이름으로요.
정학우가 명칭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때였다.
“단주님, 저 왔습니다.”
남수단 특별단원, 왕소단이 단주실 문을 열었다.
“일전에 말씀하신 거 나왔습니다.”
“벌써? 빨리 나왔네.”
“단주님 부탁인데 제가 특별히 신경 좀 썼죠.”
그럼 내가 말한 대로 잘 나왔나 한번 볼까?
남궁정혁은 가주실 밖으로 나갔다.
* * *
“어때? 잘 어울리나?”
“옷이 날개더라더니 인물이 확 사는군.”
“자네도 꽤 괜찮아 보이네.”
내가 왕소단에게 부탁한 것이 이거다.
남수단 전용 무복.
필요한 인원도 다 채웠고, 조장도 뽑았으니 통일된 복장이 필요할까 싶어서.
지금 남수단원이 똑같은 맞춰 입은 저 옷은 색상부터 모양까지 내가 직접 선택한 것이다.
“단주님,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내가 생각한 대로 잘 나왔네.”
왕소단이 일을 제법 잘 처리했다.
이 주 전, 종이에 그림을 그려 준 대로 옷이 잘 만들어졌다.
나풀나풀하는 옷감도 고급스러워 보이고.
“도련님, 저도 잘 어울립니까?”
정학우도 새로운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어떠냐? 옷을 만드는 나의 탁월한 감각이.
이 정도면 무척 뛰어나지 않으냐.
내가 또 워낙 다방면에 재능이 있다 보니 뭘 하더라도 다 잘하더라고.
“겉모양도 멋지고, 활동하기에도 편합니다.”
팔다리를 이리저리 휘둘러 본 그가 말을 이었다.
“근데 색깔이 왜 연빨간색입니까? 남궁세가를 상징하는 색깔은 파란색인데요.”
그야 내가 빨간색을 좋아하니까.
천마를 상징하는 색깔이 빨간색이다.
더구나 정학우의 말대로 남궁세가를 상징하는 색은 파란색.
그러니 더 빨간색으로 해야지.
만약 남궁세가를 상징하는 색이 빨간색이었으면, 나의 취향과는 상관없이 파란색을 선택했을 거다.
“도련님, 이건 실수로 빠뜨린 거죠?”
“뭐가?”
정학우가 자신의 왼쪽 가슴팍을 가리켰다.
“이곳에 남궁세가의 이름이나 상징을 새겨 넣어야죠. 그래야 우리가 남궁세가 소속인 걸 다른 사람이 알죠.”
정학우의 말대로 보통 거기엔 가문의 이름이나 상징을 새겨 넣는다.
사천당가 무인들만 봐도 거기에 당(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았던가.
“일부러 뺐어.”
“왜요?”
“나중에 넣으려고?”
“나중 언제요?”
언제긴 언제야.
내가 이곳 가주가 되어서 남궁세가 현판 내리는 날이지.
그때 천마신교를 상징하는 불(火)을 당당히 새겨 넣을 거다.
그날의 통쾌할 미래를 상상하며 으흐흐흐, 남궁정혁이 웃음을 흘릴 때였다.
“남궁정혁 단주님.”
남궁세가의 한 무사가 찾아왔다.
“가주님께서 단주님을 찾으십니다.”
“뭣 때문에?”
“그건 직접 만나 보시면 알 게 될 것입니다.”
“바쁘다 그래.”
“……네?”
“바빠서 갈 수가 없다고 하라고.”
볼일 있으면 지가 직접 올 것이지, 왜 귀찮게 사람 오라 가라야.
남궁정혁이 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무사가 재차 말했다.
“꼭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요.”
* * *
귀찮음을 무릅쓰고 가주실로 가니 남궁도가 한껏 무게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모단수도 얼굴도 굳어 있었고.
대체 그 중요한 일이 무엇이길래 저 두 사람의 저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남궁정혁이 남궁도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중요하다는 일이 뭡니까?”
원래는 안 오려고 했는데 그 중요한 일이 뭔지 궁금해서 와 줬으니, 빨리 말해 봐요.
“오룡회를 알고 있느냐?”
“오룡회? 그게 뭔가요?”
처음 듣는 남궁정혁이 고갤 갸웃하자, 남궁도가 설명했다.
“오룡회는 오대세가 후기지수들이 모여 친목을 다지는 자리다. 삼 년에 한 번씩 모여 무학에 관해 토론하고 대련을 하기도 하지.”
“근데요?”
“그 오룡회가 이 주 후 열린다. 네가 그곳에 참석해라.”
“설마 해서 묻는데 중요하다는 일이 이건 아니죠?”
“맞다.”
나 참, 간만에 또 어이가 없네.
하도 중요한 일이래서 기껏 왔더니 뭐? 오룡회?
지금 애새끼들 모여서 소꿉장난하는 데에 나보고 가라고?
이것만 해도 기가 차는데 저들의 저 진지한 표정은 또 뭔가?
난 또 뭔 엄청난 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았네.
“안 가요.”
남궁정혁이 딱 잘라 말하자, 남궁도가 다시 권유했다.
“넌 반드시 가야 한다. 저번 모임에는 강혁이가 갔는데 올해는 많이 바쁘다.”
별로 안 바쁜 것 같던데.
얼마 전 그를 복주에서 만나지 않았던가.
다친 데는 괜찮냐고, 내상은 후유증을 조심해야 한다고 얼마나 귀찮게 하던지.
그렇게 잔소리 늘어놓는 사람이 바쁘긴 뭐가 바빠?
오룡회 가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거 아니냐고.
“어쨌든 전 안 가요. 저도 무지 바쁜 사람이라. 그런 친목 모임은 적성에도 안 맞고요.”
그런 곳에 갈 시간 있으면 대연검법 한 동작을 더 수정하겠네.
남궁정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남궁도의 눈빛이 깊어졌다.
“네 말대로 오룡회는 단순 친목 모임, 정 급한 사정이 있으면 한두 번 정도는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남궁도가 말끝에 힘을 줬다.
“올해는 다르다. 오대세가 모두가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특별한 사정이 있거든.”
“무슨 사정이요?”
슥, 남궁도가 자기 앞에 있는 종이를 제 아들에게로 밀었다.
“이게 뭡니까?”
지도다.
하지만 온전한 지도는 아니다.
조각난 지도의 한 부분이다.
“열흘 전, 오대세가는 모두 똑같은 서신을 받았다. 그 지도는 그 서신 안에 들어 있었다.”
“그것이 제가 오룡회에 꼭 참석해야 하는 이유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지도 뒷면을 보아라.”
남궁정혁이 지도를 뒤집어 거기에 적힌 글씨를 보니…….
“……!”
남궁정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만큼 그곳에 적힌 글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후, 호흡을 고른 그가 뒷면에 적힌 글을 다시 보았다.
- 이 지도는 천마총의 위치를 알려 준다.
쉽게 말해 지도에 천마총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단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천마총이란…….
“천마가 묻힌 무덤이 있다고요.”
즉 나의 무덤이란 말이다.
그러니 어찌 남궁정혁이 놀라지 않을까.
“예전부터 무림에 떠도는 소문이 있었다. 마교가 패망하기 직전 천마의 무덤을 만들고, 그곳에 정파에서 약탈한 무기와 영약을 숨겼다는.”
남궁정혁이 지도를 다시 뒤집어 보았다.
“이렇게 한 조각만 보냈다는 건…….”
“오대세가가 모두 모이면 온전한 지도가 되겠지.”
남궁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네가 오룡회에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이유다.”
“……제가 가지 않을 수는 없군요.”
저 지도에 표시된 천마총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무덤이니.
“오룡회는 제갈세가에서 열린다.”
잠시 뜸을 들인 남궁도가 말을 이었다.
“이 일은 보안이 지극히 중요하다. 천마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림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그렇겠지.
불빛만 보면 뛰어드는 것이 어찌 불나방만의 일이겠는가.
여태껏 희귀한 보물이나 신병이기가 나타날 때마다 탐욕에 눈먼 수많은 무인이 죽었다.
그런데 천마총?
이건 전 무림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는 거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정사 구분할 거 없이 모든 무림인이 몰려와 보물을 노릴 것은 자명한 일.
그것만은 나도 사양이다.
만약 이 천마총이 진짜 나의 무덤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오룡회로 위장해 제갈세가로 모이는 거군요.”
“우리가 한 번에 움직이면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살 수도 있어. 마침 올해가 오룡회가 열리는 해이니 사람들의 눈을 속이긴 딱이다.”
“서신을 보낸 자들이 누군지는 알아봤습니까?”
“본 세가뿐만 아니라 나머지 사대세가도 그들의 뒤를 캐 봤지만, 아무것도 알아낸 것은 없다.”
누굴까?
이런 짓을 벌인 자들은.
무슨 목적으로 지도를 보낸 것일까?
“각 세가에서 열 명씩 무인들을 보내기로 했다. 총 오십 명의 무인이 천마총으로 가는 것이다.”
많다고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
딱 적당한가?
사람이 너무 많으면 의사소통이나 이동에 불편이 있을 것이다.
“세가 최정예 무인 아홉 명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난 필요 없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이번 일은 비밀 유지가 필수.
사람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움직이고 싶지 않다.
모르면 사람과 함께 다니면 불편하기도 하고.
“저와 함께 갈 사람은 두, 세 명이면 충분합니다. 남수단 내에서 제가 알아서 뽑지요.”
이제껏 침묵을 지키던 모단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정혁 도련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가주님의 말을 따르시지요.”
안전? 내가 내 몸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할 사람으로 보이는 건가?
“제 몸은 제가 알아서 지킵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머리 쓰는 사람에게는 말로 설득해 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직접 보여 주는 게 낫지.
남궁정혁이 주살검을 뽑았다.
“이래도 걱정되십니까?”
남궁정혁이 내공을 불어넣자, 주살검에 불이 붙은 듯 파란 검기가 넘실거렸다.
“헉…….”
모단수가 입을 크게 벌리고 경악했다.
너무 놀라게 해 줬나?
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
정기를 모두 흡수하고 내공이 크게 증가한 그였다.
목숨 걸고 도박한 보람이 있는 거지.
남궁정혁의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