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94화
아, 속이 다 후련하네.
그동안 여러 사람을 팼지만, 지금처럼 만족스러운 건 처음이다.
십 년 묵은 체증이 훅 내려가는 것 같다.
엄신에 대한 분노도 분노지만, 팰 때의 타격감이 좋았다.
몸 관리를 잘했어.
주먹이 엄신의 몸에 닿을 때마다 어찌나 쫙쫙 달라붙는지, 그 느낌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또 반응은 어떻고.
“……제발 좀 살려 주세요.”
양쪽 눈에 멍이 들고, 쌍코피까지 흘린 그가 두 손 모아 싹싹 빌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이마에 땀 흘려 가며 ‘고된 노동’을 한 보람을 느낀다.
그러게 인생 살 만큼 살았으면 얌전히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 왜 쓸데없이 분란을 만들어.
남궁정혁이 땀을 닦으려 손을 들자 그가 움찔했다.
“괜찮아, 이제 안 때려.”
때릴 만큼 때렸거든.
“이리 와 봐.”
남궁정혁이 손가락을 까닥하자, 엄신이 그 앞에 냉큼 다가왔다.
거참, 사람 미안하게 왜 무릎까지 꿇어.
“편하게 앉아.”
편하게 앉아서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편하게 대답하면 돼.
남궁정혁은 그동안 가졌던 의문을 하나하나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 시설은 누가 언제 만들었냐?”
“그것은…….”
정신교육이 제대로 됐었음일까.
엄신이 지체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마교는 소림사에서 죽은 천마를 묻기 위해 이곳에 천마총을 만들기 시작했단다.
하지만.
“전황은 마교에게 급속도로 불리해졌습니다. 마교의 무사들이 악착같이 버텼지만, 남궁수가 앞장선 정파를 사나운 기세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했다고.
당장 전쟁에서 지고 있는데 아무리 천마를 묻을 곳이라고는 하나, 죽은 사람의 무덤까지는 챙길 여력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천마총은 미완성 상태로 이십 년간 방치되었습니다. 그자가 저를 찾아오기 전까지 말입니다.”
……그자? 그자가 누군데?
“목금장주, 이회입니다.”
이회라는 이름을 말할 때 그의 눈빛이 사나워지는 걸 보니, 딱히 좋은 감정을 지닌 건 아닌 것 같다.
“그는 제가 마교 사람인 걸 알고는 저를 찾아와 제의했습니다. 천마총을 완성시키자고요. 공사에 필요한 비용은 모두 자신이 대겠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그런 제의를 한 이유는?”
이회가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그런 제의를 그냥 했을 리 없다.
뭔가 꿍꿍이가 있었겠지.
“오대세가에 원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여 천마를 위한 제물로 바치자고 하더군요.”
“당연히 승낙했고?”
“제가 손해 보는 것은 없으니까요. 이곳을 완성시켜 각 세가로 지도를 보냈습니다.”
“그럼 그 소문은 잘못된 것이겠군.”
“무슨 소문 말입니까?”
“이곳에 마교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 말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천마가 저승길 편히 갈 수 있도록 금은보화를 같이 묻으려고 했죠. 하지만 미완성된 시설에 그런 걸 둘 리 없죠.”
남궁정혁은 실망했다.
보물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다.
“보물이 없으니 천마의 시체도 당연히 이곳에 없겠군.”
남궁정혁이 그렇게 지레짐작했는데…… 응?
엄신의 표정이 이상하다.
그가 갑자기 입을 딱 다물었다.
남궁정혁의 시선을 피해 고개까지 돌렸다.
설마…….
“있어? 천마의 시체가 여기 있냐고?”
남궁정혁이 엄신의 양어깨를 잡고 추궁했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고 말할래? 그냥 말할래?”
남궁정혁이 어금니를 꽉 다물고 말하자, 엄신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있긴 있습니다.”
“뭐? 잘 안 들려. 큰 소리로 말해.”
“천마의 시체가 여기 있다고요.”
* * *
엄신은 의문을 느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되게 친숙한 느낌이다.
그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어느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되었다.
생긴 건 전혀 다른데 말이다.
‘말투와 눈빛, 모든 것이 제운강과 닮았구나.’
그래서일까.
엄신은 그를 천마, 제운강의 시신이 보관된 장소로 순순히 안내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가 그곳에 무척 가 보고 싶어 하더라고.
안 데리고 가면 더 맞을 것 같기도 하고.
“저깁니다.”
남궁정혁이 엄신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작은 제단 위, 그보다 더 작은 상자가 있었다.
아마도 화장한 것 같은데…… 너무 초라한 거 아닌가.
그래도 명색이 전 마교의 교주이자, 천마의 시체를 모신 곳인데.
남궁정혁의 표정에서 그 속내를 짐작한 엄신이 말했다.
“원래는 녹지 않는 얼음, 빙정을 구해다 그 속에 모시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중이라 그것도 쉽지 않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 손으로 직접 화장했습니다.”
“천마의 시신을 이곳까지 가져온 사람은 누군가?”
“그것도 저입니다. 제가 소림사에서 이곳까지 직접 모셔왔죠.”
……응? 이건 의외다.
당신이 소림사에 왜 와?
“아무래도 소림사가 무림에서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천마의 승리를 축하하러 갔죠, 술 한 병 들고.”
엄신도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던가.
그가 씁쓰레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이 고사주가 될 줄은 몰랐지만. 제가 소림사에 도착했을 땐 천마가 이미 죽어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시신을 거뒀습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내 시신을 수습해 줘서.
다만 의문은 남지만.
우리가 시신까지 챙길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을 텐데.
최소한 남궁정혁은 그리 생각했다.
“혹시 시신을 직접 챙긴 다른 이유가 있나?”
시체 해부라도 하려고 했던 거 아니냐고.
엄신이 그동안 한 짓을 생각하면 그런 짓을 하고도 남는다.
“제가 마교에서 총 네 명의 천마를 섬겼습니다.”
“……?”
“그렇게는 안 보이지만, 제가 나이가 엄청 많거든요.”
“그래서?”
“저를 가장 많이 혼낸 사람이 제운강, 그 사람입니다. 그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죠.”
말을 하던 엄신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저자가 자신을 때리는 방식마저도 제운강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고갤 갸우뚱하는 엄신을 보며 남궁정혁이 말했다.
“그럼 그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았겠군. 많이 맞았으니 말이야.”
“물론 뒤에서 욕도 많이 했죠. 할 수만 있으면 제가 그를 패기도 싶었고요.”
오호, 그런 생각을 하셨어.
남궁정혁이 다시 주먹을 꽉 쥘 때였다.
“하지만 가장 고마운 사람이 그이기도 합니다.”
“……?”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제가 하려는 일을 가장 많이 지원해 줬거든요.”
그건 그렇다.
의술을 연구하는 데는 많은 돈이 들었다.
약초값이 좀 비싸나.
더구나 엄신의 기행을 아는 사람들이 그에게 강요하기도 했고.
쓸데없는 연구 하느라 주변에 민폐 끼치지 말고 환자들 치료에나 집중하라는.
그때 내가 엄신 편을 좀 들어줬다.
무공을 늘릴 방법을 연구해 보라고.
‘근데 그거 당신 때문이 아니야.’
날 위해서지.
당신이 의술에 집착하는 만큼이나, 나도 강해지길 원했거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어쨌든 나도 고마워.”
“뭐가요?”
“그런 게 있다.”
내 시신 수습해 줘서.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살살 때릴 걸 그랬다.
엄신이 또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네.
남궁정혁이 제단 위에 놓인 상자를 짚었다.
“이건 내가 가져갈게.”
그러자 엄신이 기겁했다.
“이미 죽은 사람의 유해입니다. 그걸 가져가서 어디다 쓰려고요?”
“밖에다 뿌리려고.”
“그걸 왜 당신이 뿌립니까? 당신이랑 천마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원래 내 물건, 아니 나니까 말이야.
더구나, 내가 원래 갑갑한 거 싫어하거든.
밖에서 훨훨 날아다닐 수 있게, 바람 잘 통하는 곳에서 뿌릴 거야.
제단이 있는 방을 나가려는 남궁정혁의 바짓가랑이를 엄신이 붙잡고 늘어졌다.
“정마대전이 끝난 지 이미 이십 년이나 지났습니다. 죽은 사람의 유해까지 모독할 필요는 없잖습니다.”
“아니, 밖에다 그냥 뿌릴 거라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걸 가져가서 죽은 천마를 조롱하려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다, 그만 상자가 바닥에 떨어져, 하얀 가루에 바닥에 흘렀다.
“이런…….”
놀란 엄신이 뼛가루를 상자 안으로 황급히 쓸어 담았다.
남궁정혁에겐 그 모습 또한 의외였지만.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인 줄 알았더니 남을 챙긴 줄도 아는구나.
“인제 어디로 갈 거야?”
“뭐요?”
“여기 더 있을 수도 없잖아. 따로 갈 곳은 있나?”
“그걸 왜 당신이 신경 씁니까?”
“나랑 같이 가자고.”
뜻밖의 제의에 놀란 엄신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서 그런 소릴 하는 거요.”
“그러는 당신도 내가 누군지 모르잖아.”
“누군데요.”
전 천마 제운강.
지금은…….
“남궁세가 막내아들.”
남궁정혁의 대답에 엄신이 벌떡 일어났다.
“남궁세가라면…….”
“맞아, 남궁도가 이 몸의 생물학적인 아비지.”
“원수의 아들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뭐 저래 놀래?
오대세가에 지도를 보냈을 때부터 이 정도쯤은 예상한 거 아닌가?
“네 아비만 아니었어도 우리가 정마대전에 이겼을 것이다.”
“그건 그래. 천마만 살아 있었어도 마교가 정마대전에서 이겼겠지.”
촤악, 엄신이 단도를 다시 꺼냈다.
“무슨 꿍꿍이냐?”
“……?”
“나와 함께 가자고 한 저의가 무엇이냐 말이다.”
“우린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무슨 목표?”
“타도, 남궁도.”
남궁정혁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했다.
“마교를 멸망시킨 남궁도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아?”
“무슨 개수작이냐? 아비가 아들에게 복수라니,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전례가 없는 일도 아닐 텐데.”
“……?”
“제운강 이전의 마교 교주가 어찌 죽었지? 자식 손에 죽지 않았는가.”
“그, 그걸 어떻게……?”
내가 천마가 되기 전, 마교에 내분이 일어났다.
당시 마교 교주였던 공윤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공준구.
그럼 아들은 왜 아버지의 목에 칼을 겨눴나?
이 이유도 어이가 없는데 한 여자 때문이었다.
공윤의 첩 중 한 명과 공준구가 눈이 맞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안 공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당장에 아들을 잡아 족치려 했지.
잘못된 사랑에 눈먼 공준구도 순순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공윤에게 불만을 가진 세력을 모아 맞서 싸웠다.
두 부자의 싸움은 결국, 아들이 이겼다.
그가 아버지의 심장에 검을 꽂고 차기 교주가 되려 했단 말이다.
‘내가 그를 저지하긴 했지만.’
그런 공준구를 죽인 사람이 나다.
아무래도 당시 공준구를 보는 마교도들의 시선이 좋지는 않았거든.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은 아니다.
마교는 강자존의 세계.
아무리 부자 관계라 하나, 강한 사람이 약한 자를 죽이는 건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너무 문란하다는 거지.
거의 모든 마교도들이 그를 교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때 내가 나섰다.
영웅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이라고 어릴 적부터 배웠거든.
나의 검으로 공준구의 목을 치고 마교 교주가 되었다.
“너는 무슨 이유로 남궁도에게 복수한다는 것이냐!?”
“남의 집의 사정은 알 필요 없고, 나와 함께하겠나?”
저 인간이 가끔 예측불허의 사고를 치긴 해도 그 재주는 쓸 만하다.
옆에 두면 필시 도움이 되리.
“너와 함께 간다고 해서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고?”
“더 많은 지원을 해 주마.”
“……?”
“내가 제운강이 했던 것보다 더 많이 너의 연구비를 지원해 준다고.”
그러기 위해선 한 사람의 불치병을 고치긴 해야겠지만.
“더구나 한번 해 보고 싶지 않아?”
“뭐가 말이냐?”
“남궁세가의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가 보고 싶지 않냐고.”
나와 함께 가면 그럴 수 있다.
덤으로 남궁도 얼굴도 볼 수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