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97화
엄신이 허탈한 눈빛으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유, 유골이.’
방금 물난리를 피하느라 천마의 뼛가루가 든 상자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물에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미 물에 녹았을 것이라 영영 찾지도 못할 것이다.
엄신은 그것이 속상했다.
“부모님이라도 죽었어? 왜 그렇게 울상이야?”
그런 그에게 남궁정혁이 다가왔다.
“……유골을 잃어버렸습니다.”
“차라리 잘됐어.”
“……네?”
“차라리 잘됐다고.”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요…….”
발끈한 엄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도로 앉았다.
“물에 놓은 유골이니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겠지. 차라리 잘됐어.”
붉은빛 노을을 등지고 선 그의 모습에서 한 사람이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제운강과 어찌 저리 닮았을까?’
그가 눈을 비비고 남궁정혁을 다시 바라볼 때였다.
“단주님, 그 사람은 누굽니까?”
서문호와 양일남이 다가왔다.
“새로운 남수단원이다.”
“인원이 다 찬 거 아니었습니까? 단원을 또 뽑으실 겁니까?”
“특별단원이다. 너희들도 이 사람한테 잘 보여. 앞으로 너희들의 몸을 관리해 줄 거니까.”
“의원입니까?”
남궁정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양일남이 의문을 드러냈다.
“근데 이 사람은 왜 천마총 안에 있었습니까? 혹시 마교와 한패는 아닐까요?”
냉정히 따지면 너도 마교와 한패야.
네 스승이 마교 장로까지 했던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남궁정혁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답변을 꺼냈다.
“이 사람은 마교에게 잡혀 있던 것을 내가 구해 주었다. 그 고마움에 남수단으로 들어오기로 했다. 갈 곳이 없다 그러더라고.”
남궁정혁의 말이라면 감히 의심할 수 없는 서문호와 양일남이 먼저 인사했다.
“남수단 1조장, 서문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남수단 2조장, 양일남입니다. 잘 지내 봐요.”
상대가 먼저 인사하면 그에 대한 답례가 가는 게 예의건만, 엄신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중원 최고의 명의이자, 구십이 넘은 자신이 상대하기에 저들은 너무 애송이라는 거지.
하지만 그런 그의 속내를 서문호와 양일남이 알 리 없다.
두 사람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남수단 입단을 환영한다는 의미에서 나이도 어린놈한테 먼저 인사했더니,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모습을 보일 줄이야.
이거 인생의 선배로서 예의가 무엇인지 따끔히 가르쳐 줘야 하는 거 아닐까?
딱.
그들이 나서지 않아도 엄신에게 예의를 가르쳐 줄 사람은 따로 있었다.
남궁정혁이 엄신의 뒤통수를 때렸다.
“뭐 해? 인사 안 해? 잘 부탁한다잖아.”
남궁정혁이 눈을 부라리자, 엄신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잘 부탁한다, 나는 엄신…….”
“……우라고 한다. 그의 이름은 엄신우야.”
무림에 그의 이름이 널리 퍼지지는 않았으나, 혹시 모른다.
천수마의의 본명을 아는 자가 있을지도.
그래서 남궁정혁은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네 이름은 엄신우 맞지?”
“……네.”
별로 마음에 안 드나?
엄신보단 엄신우가 훨씬 나은 것 같은데.
자, 이렇게 자기소개의 시간도 끝났고 남궁세가로 돌아가 볼까?
그때 합비로 출발하려던 남궁정혁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가장 중요한 걸 빼먹을 뻔했네.
그가 서문호와 양일남, 두 사람에게 신신당부했다.
“혹시 신우가 너희한테 뭘 주거든 절대 먹지 마라. 몸에 좋다는 약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건네는 것이라면 물도 마시지 마. 알겠지?”
“왜요?”
“그냥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이 말을 다른 남수단원들한테도 꼭 전하고.”
“알겠습니다.”
엄신우에게는 따로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 인간이 내 말을 따르지 않으리란 건, 전생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때려도 인체 실험을 향한 그의 열망만은 막을 수 없더라고.
“이제 합비로 출발한다.”
엄신우를 새 식구로 맞은 남궁정혁은 남궁세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단주님,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남궁정혁은 남궁세가에 도착하자마자 남궁도의 호출을 받았다.
“왜?”
그렇게 물으면서도 왜 찾는지는 남궁정혁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천마총의 일이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서 부르는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남수단 단주실에 들어온 지 일각도 안 됐는데 자신을 부를지가 있지?
이거 인간적인 배려가 너무 없는 거 아니냐고.
“먼 길 다녀와서 피곤해. 다음에 간다고 해. 아니다, 그냥 서면으로 제출할게. 별로 중요한 내용도 없거든.”
남궁도와는 굳이 얼굴을 맞대고 싶은 않은 남궁정혁이 안 간다고 뻗대 봤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남수단 부하들까지 나서 그를 종용했기 때문이다.
“도련님, 저희가 보기 민망합니다. 빨리 다녀오시죠.”
“그러시면 아랫사람들이 뭘 보고 배우겠습니까?”
쳇, 이래서 부모보단 자식이 더 무섭다는 건가.
아랫사람들에게 굳이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 줄 필욘 없다.
남궁정혁이 가주실로 가줬다.
가서 남궁도에게 천마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줬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남궁정혁이 오대세가 후기지수들에게 해 줬던 말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해 주었더니 남궁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다.”
“그럼 저 이제 가요.”
남궁도가 자리에서 일어난 남궁정혁을 붙잡았다.
“잠시만.”
“뭐 더 할 말 있어요?”
“오랜만에 식사나 같이하자꾸나.”
뭐래, 내가 당신이랑 같이 밥을 왜 먹어?
소화 안 돼서 체할 일 있나.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한가하게 식사 따윈 할 시간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길래 밥까지 거른단 말이냐?”
글쎄,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한 남자의 인생을 구원하는 일?”
* * *
“왕 장주님, 이번엔 찾아온 손님은 금자 오백 냥까지 내겠다고 합니다.”
으흐흐흐, 왕소단은 부하의 보고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단 한 번의 투자로 큰돈을 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나의 눈은 정확해.’
몇 년 전, 어느 날 길을 가다 우연히 한 객잔에 들렀다.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허름한 곳이기도 했다.
왕소단도 음식 맛은 기대하지 않았다.
당장 급한 볼일이 있어 이곳을 지나길 일만 없었다면 그런 싸구려 객잔을 갈 일도 없었겠지.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그는 벽면에 삐딱하게 걸린 그림 한 점을 보게 되었다.
청년이 누워 있는 소를 베개 삼아 하늘을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싸구려 객잔에 아무렇게나 걸린 그림.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종이가 누렇게 변했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왕소단은 냄새를 맡았다.
돈 냄새.
저건 필시 돈이 된다.
객잔 주인에게 저 그림을 어떻게 구했냐고 물으니 근처 사는 화가가 그렸단다.
가난하게 사는 화가가 음식값 대신 저 그림을 준 거라고.
객잔 주인도 처음엔 안 받으려고 했는데, 그 화가가 삼 일을 굶었다고 사정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받은 그림이라고도 했다.
그 얘기를 들은 왕소단은 당장에 그 화가가 산다는 집으로 가서 제의했다.
이제까지 그린 그림을 모두 자신이 사겠다고.
앞으로 그릴 그림까지도 미리 자신이 사겠다고.
처음엔 당황한 화가도 왕소단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당장 오늘 끼니를 어떻게 때울까, 걱정인 그에게 왕소단이 내민 돈은 매우 큰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왕소단의 창고에 그 화가의 그림이 서른 점도 넘게 쌓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화가는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아 도화원에 들어갔다.
궁중 화가가 된 것이다.
그것도 황제의 어진을 그리는 궁중 최고의 화가가 되었다.
그것은 곧 중원 최고의 화가가 되었다는 말과 다름없다.
“앞으로 그림값은 더 오를 테니 팔지 않는다.”
어진을 그리는 화가는 오직 어진만 그릴 수 있다.
다른 그림은 그릴 수 없다.
그러니 그가 예전에 그린 그림은 더욱 가격이 오를 수밖에.
흙 속의 진주를 알아본 자신의 안목 덕분에 왕소단은 투자한 돈의 수천 배를 벌 수 있게 되었다.
‘돈은 이렇게 버는 것이지.’
그가 속으로 희희낙락할 때였다.
“장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누구?
“소단이, 그동안 잘 있었는가?”
어릴 적 같은 서당에서 동문수학한 친구, 강창석이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알고 지낸 시간이 오래된 만큼 그와는 가끔 만난 술잔을 기울이며 속에 있는 얘기를 하곤 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잘 만나지 못했지만.
“마님 치마폭에서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 있었군.”
그가 결혼했기 때문이다.
아내와 알콩달콩 붙어 있는 것이 좋은지, 술 한잔하자는 왕소단의 거절을 그가 매번 거절했다.
어차피 퇴짜맞은 걸 알기에 왕소단도 더는 연락하지 않았고.
그런 그가 오늘은 웬일일까?
천금전장을 직접 방문하다니.
“근처를 지나다가 자네 얼굴이 생각나서 들러 보았네.”
“잘 왔어, 오랜만 술잔이나 기울여 보세……?”
활짝 웃으며 친구를 환영하던 왕소단이 멈칫했다.
그제야 강창석의 품에 안겨 있는 무언가를 봤기 때문이다.
“하하하, 나 얼마 전에 아빠가 됐어.”
아기였다.
그의 품 안에는 작은 생명체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
행여나 아기가 깰까, 왕소단이 조심스레 다가가 아기를 들여다봤다.
“귀엽지?”
“……다행히 자네는 닮지 않았군.”
보자기에 쌓인 아기의 뺨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고 있으니 마음의 평화가 찾았다.
왕소단이 손가락으로 아기의 뺨을 살짝 눌러보았다.
그 무엇보다 보드라운 촉감이다.
“자네도 어서 좋은 만나, 결혼해야지.”
“……자네도 내 사정 잘 알고 있지 않나?”
강창석의 왕소단이 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자네의 사정을 마음으로 이해해 줄 여자도 있을 걸세.”
굳이 찾으려면 찾을 수는 있겠지.
그 여자가 좋아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돈이겠지만.
“아이야 입양하면 되는 것이고.”
친구의 어설픈 위로에 속이 쓰리다.
자기는 친자식을 데리고 와서 입양 운운하다니.
그렇다고 화를 내기도 뭐하다.
자신을 위하는 그의 마음만은 진심이기 때문이다.
다만 눈치가 없어서 문제지.
“내가 알아서 하겠네.”
왕소단의 떨떠름한 반응 때문이었을까.
강창석은 왕소단과 간단한 안부 인사,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집으로 돌아갔다.
“…….”
왕소단이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눕혔다.
조금 전까지 돈을 벌어서 좋다고 들뜬 기분은 싸악, 가라앉았다.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돈은 벌어서 뭐 한단 말인가.
물려줄 자식도 없는데.
입안이 쓰다.
마치 자신이 인생의 패배자라도 된 듯,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
오늘 밤에 오래간만에 취해야겠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것 같으니.
왕소단이 겨우 마음을 다스릴 때였다.
“장주님, 남궁세가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단주님이 부르는 건가?
지금은 갈 기분이 아니다.
“일이 바쁘니 다음에 간다고 해라.”
“별로 안 바빠 보이는데.”
눈을 뜨니 정학우가 와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가 여기까지 직접 온 거지?
“남궁세가로 가서 진찰 한번 받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