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98화
“어떤가, 고칠 수 있나?”
남궁정혁의 말에 엄신우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자신의 눈앞에서 덜렁거리는 두 개의 구슬, 아니 하나의 구슬을 보았다.
“……심각하군요.”
그의 말에 왕소단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정혁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남궁세가로 온 그다.
자신의 치료할 수 있는 명의를 모셔왔으니 빨리 와 보라는 말에 희망을 가졌다.
명의치고는 너무 젊어 보이는 외모에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왕소단은 기꺼이 바지를 내렸다.
인제 와서 무엇이 창피할까.
병만 고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병이 생긴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미 혈이 굳어 기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치료하기 어렵겠군요.”
그런데 이번에도 절망스러운 소릴 들을 줄이야.
지금껏 자신의 진료한 모든 의원이 같은 소리를 했다.
이미 굳어 버린 혈을 되살릴 수는 없다고.
“자네 재주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있나 보군.”
남궁정혁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자 엄신우가 반박했다.
“치료하기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축 처졌던 왕소단의 어깨가 다시 올라갔다.
방금 엄신우의 말이 그에게 희망을 줬기 때문이다.
“치료할 수 있다는 겁니까?”
“숨만 붙어 있으면 내가 치료할 수 없는 병은 없어.”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놈이 반말하는 것이 살짝 걸리긴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빌어먹을 병만 치료할 수 있다면 저 사람은, 아니 저분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과 다름없으니까.
왕소단이 엄신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 병만 치료해 주시면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꼭 좀 치료해 주십시오.”
남궁정혁도 옆에서 거들었다.
“네가 그의 병을 치료해야 연구에 필요한 돈을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래요?
엄신우가 일단 왕소단의 손길을 뿌리쳤다.
아무리 간절하다 해도 남자가 자신의 손을 잡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손가락 세 개를 세웠다.
“이 병을 치료하기 하기 어려운 이유는 세 가지 약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이미 말라 버린 혈도를 되살릴 수 없습니다.”
“그게 뭔가?”
“첫 번째는 천왕말쌍벌의 꿀입니다.”
“천왕말쌍벌?”
“운남에만 서식하는 희귀한 벌입니다. 그것이 모은 꿀이 사람의 양기를 북돋는 데는 탁월한 효능이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구할 수 있는데?”
“이건 돈을 주고 살 수는 있습니다. 다만…….”
왕소단을 힐끔 본 엄신우가 말을 이었다.
“그 희소성과 효능 때문에 가격이 엄청나게 비쌉니다. 치료에 필요한 양을 구매하려면 최소 금자 팔천 냥은 필요합니다.”
말을 마친 엄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남궁정혁과 왕소단의 반응이 너무 잠잠했기 때문이다.
무슨 벌꿀이 그리 비싸냐고 깜짝 놀랄 줄 알았더니.
참고로 금자 팔천 냥이면 웬만한 현에서 최고 부자 소릴 들을 수 있는 돈이었다.
“어쨌든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다는 거네.”
“……그, 그렇죠.”
“다음에 필요한 약재는 뭔가?”
“장황은행나무의 진액입니다. 그것이 있어야 말라비틀어진 혈도의 신경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그건 또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
후후, 이번엔 깜짝 놀랄 거다.
장황은행나무는 중원을 다 뒤져도 열 그루가 넘지 않는 매우 희귀한 나무.
그것에서 흘러나오는 진액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금자 오만 냥. 그것을 살려면 금자 오만 냥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은 없다.
금자 오만 냥이면 이곳, 합비에 사는 모든 사람을 삼 년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는 금액인데도 말이다.
“그것도 돈을 주면 살 수는 있다는 거네.”
남궁정혁의 심드렁한 말투에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 약재는 뭔가?”
오기가 생긴 엄신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랭구절초의 꽃잎이 필요합니다.”
“한랭구절초?”
“그것이 있어야 쪼그라든 구슬을 다시 부풀어 오르게 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약재 중 가장 중요한 약재죠.”
“그것도 돈 주면 살 수 있고?”
이번엔 엄신우가 고개를 저었다.
“이것만은 돈 주고도 살 수 없습니다. 가진 사람이 팔 생각이 없거든요.”
“가진 사람이 누군데?”
“북해빙궁입니다.”
뭐? 북행빙궁?
남궁정혁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뜻밖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북해빙궁이라면 저 북쪽에 서식하는 얼음땡이들 말이야?”
“한랭구절초는 북해빙궁의 신물입니다. 천하에서 단 한 곳, 북행빙궁의 궁전에서만 그것이 자랍니다.”
북해빙궁은 새외무림의 수많은 문파 중 세력이 가장 큰 곳 중 하나이다.
아마 오대세가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의 신물이라면 당연히 팔지 않겠지.
북행빙궁 정도 되는 규모의 문파가 돈이 부족할 리도 없으니.
“대체 할 수 있는 다른 약재는 없나?”
“한랭구절초가 북해빙궁의 신물로 지정된 것은 단순히 희귀해서가 아닙니다. 그것만이 지닌 특별한 효능이 필요합니다.”
젠장, 어째 일이 쉽게 풀린다 했더니 벽에 막혔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빙벽.
어떡하지? 어떡하면 우리 소단이 병을 고쳐줄 수 있을까?
남궁정혁이 답답한 마음에 엄신우를 재촉했다.
“남의 일 대하듯 말하지 말고 자네도 뭔가 대책을 마련해 봐.”
“주인이 물건을 팔지 않는데 저라고 뭔 방안이 있겠습니까? 그것을 훔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남궁정혁이 고개를 벌떡 들었다.
역시 저 인간이 괜히 천하제일 명의가 된 건 아니다.
그가 엄신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자넨 역시 똑똑해.”
“……진짜 훔치려고요?”
남궁정혁이 왕소단을 보았다.
“소단아, 자신 있냐?”
“당연하죠, 제 능력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의 두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밝은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 * *
북해빙궁은 중원에서 아주 멀다.
남궁세가가 있는 합비에서 그곳까지의 거리가 최소 만 리는 넘을 터였다.
그곳까지는 가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배를 타고 북해빙궁 인근에 도착하여 마차로 가는 방법.
나머지는 처음부터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이다.
시간은 당연히 첫 번째 방법이 훨씬 빨랐다.
그리고 남궁정혁 일행이 선택한 방법은?
“도련님, 온종일 마차만 타고 가려니 지루해 죽겠습니다.”
“그걸 왜 나한테 불평하냐? 북해빙궁이 멀리 있는 게 내 탓도 아닌데.”
“더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도련님이 굳이 마차를 타고 가자고 하셨잖아요. 뱃멀미 때문에 배는 타기 싫다고요.”
남궁정혁이 투덜대는 정학우에게 말했다.
“그러게 누가 같이 가재? 네가 먼저 날 따라오겠다고 부득불 우겼잖아.”
원래는 북해빙궁까지 왕소단과 엄신우 셋이서만 가려고 했다.
그런데 정학우가 꼭 자기가 같이 가야 한다고 나섰다.
날 옆에서 보좌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 사람은 당연히 자신이고.
단주인 내가 자리를 비우니 부단주인 네가 대신 남수단을 잘 관리하고 있으래도 소용없었다.
남수단원들이 얘들도 아니고 자기 관리는 본인들이 알아서 잘한단다.
아무래도 저번 천마총 사건 때 자기 혼자만 두고 가서 많이 심심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이번 여정을 기어코 따라오지.
“도련님, 근데 북해빙궁의 신물을 훔쳐도 될까요?”
“왜? 무슨 문제 있어?”
“북해빙궁은 철혈궁의 일원입니다. 철혈궁은 남궁세가와 동맹 관계고요. 넓은 의미에서 북해빙궁은 남궁세가와 한편입니다.”
그러니 더 훔쳐야지.
이십 년 전 정마대전 때 남궁세가와 한편을 먹고 마교를 멸망시키는 데 큰 일조 한 것이 철혈궁이다.
북해빙궁은 그 철혈궁 소속 문파고.
내가 복수해야 할 대상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들이 아직 마교의 쓴맛을 덜 봤어, 그때 확실히 조져 버렸어야 하는 건데.’
사실 전생에서 북해빙궁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지역의 음식과 술이 별미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북해빙궁이 어찌 생겼나 구경도 할 겸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 간 적이 있다.
본의 아니게 유혈 사태가 벌어지긴 했지만.
‘지금은 진혁호, 그놈이 궁주인가?’
북해빙궁 인근에서 가장 솜씨가 뛰어나다는 음식점을 가니 자리가 없었다.
빈 좌석이 없는 게 아니라 더는 손님을 받을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
그 이유를 물으니 북해빙궁의 소궁주, 진혁호가 그날 하루 음식점을 전세 냈단다.
근데 내가 또 목표 의식이 강하잖냐.
한 번 마음먹은 건 반드시 해야 하고.
십만대산에서 북해빙궁까지 그 먼 길을 왔는데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그날 처음 만난 진혁호에게 물어보았다.
빈자리에서 조용히 음식만 먹고 가면 안 되겠냐고.
안 된단다.
썩 꺼지라는 욕까지 들었다.
그래서 내가 어쨌을 것 같냐?
‘진혁호를 두들겨 패서 그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다 뺏었지 아마.’
진혁호, 그놈이 북해빙궁의 소궁주답게 귀한 물건과 돈을 많이 가지고 있더라고.
그곳까지 간 여비도 벌 겸, 버릇없는 진혁호도 혼내줄 겸해서, 그것들을 모두 빼앗았다.
뺏은 다음 당당히 외쳤지.
‘불만 있으면 십만대산의 마교로 찾아와라.’
……잠깐, 그래서 그것들이 철형궁과 같은 편을 먹었나?
내가 내 입으로 말하긴 했잖아.
불만 있으면 마교로 찾아오라고.
‘북해빙궁이 철혈궁과 한패가 된 것은 설마 나에 대한 원한 때문인가?’
……에이, 아니겠지. 아니어야 해.
이 일은 평생 비밀이다.
이 일을 마교도들이 알았으면 날 어떻게 원망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남궁정혁 일행을 태운 마차는 한 달이 훌쩍 넘은 후에야 북행빙궁에 도착했다.
* * *
“우와, 건물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중원의 건축양식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군요.”
정학우가 눈앞의 북해빙궁을 보고 감탄했다.
넓은 대지, 높은 담벼락 위로 북해빙궁의 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건물의 지붕이 뾰족한 첨탑으로 되어 있는 것이 중원의 건물과는 확연히 달랐다.
기후도 다르고.
“구경 다 했으면 가자, 춥다.”
북해빙궁이 괜히 북해빙궁이 아니다.
말을 할 때마다 허연 입김이 서렸다.
게다가 또 부는 사람은 얼마나 차가운지.
왕소단이 준비한 최고급 솜털 옷을 입었음에도 한기가 몸속을 파고드는 것 같다.
남궁정혁 일행은 북행빙궁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다.
창을 여니 밖으로 북행빙궁이 보이는 곳이었다.
“할 수 있겠느냐?”
“해야죠, 실패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임하겠습니다.”
남궁정혁의 물음에 검은색 야행복을 입은 왕소단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
양산군자가 남의 집 담벼락을 넘기 딱 좋은 시간대였다.
“낮에 보니 경비가 삼엄하던데 들키지는 않겠지?”
“절 뭐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저들은 제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 갔다 와라.”
“저의 청춘을 찾아서 돌아오겠습니다.”
남의 집 물건 훔치러 가는 주제에 포권지례까지 한 왕소단이 창밖으로 나갔다.
“도련님, 소단이는 언제쯤 돌아올까요?”
“글쎄, 해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까?”
하지만 왕소단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