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99화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집중이 잘되는 때를 아는가?
스스로 하고자 할 때이다.
남이 억지로 시켜서가 아닌, 본인이 원해서 할 때 가장 집중이 잘된다.
북해빙궁의 담벼락을 넘은 왕소단처럼 말이다.
‘드디어 소망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길.
지금 그 기회가 드디어 왔다.
단 하나의 꽃잎만 얻을 수 있다면 자신의 잃어버린 청춘에도 따스한 햇볕이 비출 수 있게 되었단 말이다.
그러니 북해빙궁의 어둠 속으로 스며 들어가는 왕소단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고 경쾌하겠는가.
아무도 그의 침입을 눈치채지 못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북행빙궁을 지키는 경비 무사들은 물론이거니와, 늦은 밤 하품을 하며 복도를 지나는 하녀까지, 단 한 명도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랭구절초는 어디에 있을까?’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조사해 보았다.
그 꽃이 북행빙궁 어디에 있을지에 대하여.
하지만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 한랭구절초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 꽃의 구체적인 위치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무래도 북행빙궁의 신물인 만큼 보안 유지를 하는 것 같았다.
큰 상관은 없지만.
왕소단이 이제껏 남의 집을 한두 번 털었나?
귀한 물건을 어디다 보관하는지는 눈 감고, 아니 눈 부릅뜨고 보면 딱 알 수 있었다.
‘이 층 이상은 올라갈 필요도 없다.’
한랭구절초는 살아 있는 생물.
흙 속에 심겨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일 층에 있을 터, 어둠과 동화한 왕소단은 일 층만 누비고 다녔다.
그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지만.
북해빙궁이 그 명성에 걸맞게 부지가 매우 넓어 일 층만 뒤지고 다니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저기가 제일 수상한단 말이야.’
처마 밑에 거꾸로 붙은 그의 눈빛이 빛났다.
그의 시선 끝에는 한 건물이 있었다.
겉모양은 특별하지 않았다.
지금껏 뒤진 건물과 비교하면 일 층짜리 저 건물은 오히려 초라했다.
그래서 더 의심이 갔다.
‘주변에 장애물이 없어.’
보통 건물 주변에는 꽃이나 나무 등을 심는다.
건물이 돋보일 수 있도록 최소한의 조경을 한단 말이다.
북해빙궁의 건물들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저 건물만 유독 삭막하다.
꽃이나 나무는커녕, 그 흔한 잡초 하나 없었다.
마치 침입자가 몸을 숨길 곳을 곳을 제거라도 한 듯이.
‘그렇다고 가지 못할 내가 아니지만.’
처마 밑에서 몸을 한참 동안 숨기고 있자, 땅바닥에 그늘이 졌다.
구름이 달빛을 가린 것이다.
왕소단이 이제껏 기다린 기회이기도 했다.
그가 몸을 날려 그늘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의 스승, 귀영신투를 천하제일대도로 명성을 날리게 한 잠영은신술이었다.
비록 아직은 스승의 실력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왕소단은 이동하는 그늘 속에서 무사히 건물 안으로 잠입했다.
‘……아무도 없다?’
기척을 죽이고 건물 안에 있을 사람의 숫자를 가늠해 보았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특이한 구조군.’
게다가 건물의 구조까지 특이했다.
건물 속은 뻥 뚫려 있었다.
왕소단이 천장에 붙어 건물의 중심으로 다가갔다.
혹시 모를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격동으로 가득 찬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랭구절초?!’
그곳에는 한 그루의 꽃이 피어 있었다.
분홍색깔의 화려한 꽃이었다.
엄신우가 그러지 않았는가.
한랭구절초는 분홍색이라고.
단 하나의 꽃잎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했다.
희망을 향해 몸을 날리려던 왕소단이 멈칫했다.
“자네는 여기서 뭐 하는가?”
순간 그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누가 말을 건단 말인가?
왕소단이 슬쩍 고개를 돌리자 흰옷을 입은 장년 사내가 보였다.
“이곳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군. 자네는 누군가?”
범상치 않게 느껴지는 그의 기도에 왕소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는 어르신은 누구신가요?”
“나? 여기 주인.”
“여기 주인이시라면 북해빙궁주?”
“자넨 참 용감한 사내야.”
“……?”
“이곳이 북해빙궁인 걸 알면서도 감히 침입한 걸 보면 말이야.”
“그러는 어르신은 참 부지런하시군요. 이 늦은 시간에 이곳을 지키고 계시니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나? 잠이 안 와 창밖을 보는데 웬 침입자가 빙궁 내를 쑤시고 다니더군. 그래서 목적이 뭔가 싶어 따라다녀 보았지.”
“하하하, 그러시구나.”
어색한 웃음을 짓는 왕소단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껏 자신의 뒤를 쫓아다닌 저 사람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왔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왕소단이 뒷걸음질 쳤다.
이제는 이판사판.
한랭구절초의 꽃잎만 하나 딴 뒤, 어떻게든 도망쳐 볼 작정이다.
경공 하나만큼은 자신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아마도.
그런 그에게 북해빙궁주가 말했다.
“거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게. 그러다 죽어.”
“……?”
북행빙궁주가 품속에서 철전 하나를 꺼내 한랭구절초 쪽으로 던졌다.
스스스슥, 갑자기 뿌연 안개가 일어나 한랭구절초 주변 구역을 가득 메웠다.
왕소단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안개를 보고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본 궁의 신물을 지키는데 그만한 안전장치 하나쯤 없을까, 무무혼천진법이라는 거네. 한번 빠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어. 그러니 이리로 오게.”
“어르신한테 잡혀도 살아도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당장은 죽지 않겠지…… 쿨럭쿨럭.”
북해빙궁주가 갑자기 기침을 시작했다.
몸까지 들썩이며 기침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병이 있는 건가?
‘기회다.’
북해빙궁주의 몸 상태까지는 자신이 알 바 아니다.
왕소단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잔상을 남길 만큼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아무 소용 없었지만.
아무렇게나 뻗은 그의 손에 왕소단 뒷덜미가 잡혔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내 집에 들어온 도둑을 놓칠 정도는 아니네.”
* * *
“캬, 따끈한 게 좋다.”
여긴 이십 년이 넘게 지났어도 그대로구먼.
맛이 변하지 않았어.
허연 국물을 한 숟갈 떠먹어 보고 감탄한 남궁정혁이 맞은편에 앉은 부하들에게도 음식을 권했다.
“어서 먹어 봐, 이곳이 이 지역에서는 가장 맛있는 집이다.”
남궁정혁은 북해빙궁 인근을 탐색하다 깜짝 놀랐다.
이십여 년 전에 갔었던 음식점이 아직도 있었던 것이다.
아들이 어머니의 대를 이어 한단다.
당시 북해빙궁의 소궁주, 진혁호를 흠씬 두들겨 패줬던 바로 그곳이기도 했다.
남궁정혁이 그릇까지 들고 국물을 술술 들이켜자, 정학우가 불만 섞인 투로 말했다.
“지금 왕소단이 삼 일째 행방불명인데 밥이 넘어가십니까?”
“잘만 넘어간다.”
“……네?”
“내가 밥을 안 먹어서 소단이가 돌아오면, 한 세 끼쯤은 굶어 줄 수 있어. 근데 내가 밥은 안 먹는다고 소단이가 돌아올까?”
“……그건 아니죠.”
“그러니 더 열심히 먹어야지. 사람은 배가 든든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밥심으로 소단이를 찾아야 한단 말이다.
“왕소단은 어떻게 찾을 겁니까? 방법은 있습니까?”
글쎄, 정황상 왕소단이 북해빙궁에 잡혀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그를 구할 수 있을까?
남궁정혁이 고민할 때였다.
한 무리의 사내들이 음식점 안으로 들어왔다.
“사연호 님, 어서 오십시오.”
음식점 주인이 무리의 맨 앞에 있는 사내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풍기는 분위기 하며, 입고 있는 옷으로 볼 때 이 동네에서 꽤 잘나가는 사람인가?
그런 것 같다.
주변에서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연호 님이라면 궁주님의 둘째 제자 아닌가.”
“직접 뵙는 건 오늘 처음이지만, 늠름해 보이시는군.”
“소문으로는 궁주님이 첫째 제자보다 둘째 제자를 더 총애하는 말도 있어.”
그런 그를 남궁정혁이 유심히 보았다.
그런 남궁정혁을 보고 정학우는 불안을 느꼈고.
남궁정혁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저 인간이 사고를 칠 때마다 눈빛이 저렇게 반짝반짝 빛났기 때문이다.
“도련님, 그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갈취범한테는 그런 거 안 지켜도 돼.”
“……?”
“저길 봐라.”
남궁정혁이 턱 끝으로 가리킨 곳을 정학우가 보았다.
“……저건?”
“소단이 거 맞지?”
왕소단은 재물이 넉넉한 만큼 고가의 장신구를 하고 다녔다.
그중 하나가 팔찌.
그는 손목에 순금으로 만든 두툼한 팔찌를 차고 다녔다.
근데 그것이 사연호의 손목에 걸려 있다.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거북이 문양이 새겨져 있는 걸 보니 맞는 거 같습니다.”
후루룩, 남은 국물을 단번에 일으킨 남궁정혁이 사연호에게 다가갔다.
“잠깐, 내가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
갑작스러운 질문에 불쾌하지는 않았다.
짝다리까지 짚고 있는 남궁정혁을 보며 사연호는 오히려 의아함을 느꼈다.
최소한 이 지역에서 자신에게 저리 건방을 떠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거 어디서 났어?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 말이야.”
남궁정혁의 말에 사현호가 손목을 들어 보였다.
“이거?”
“그거 어디서 훔쳤어?”
풋, 사연호가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사부님에게 선물로 받은 팔찌를 보고 훔쳤다니.
건들거리는 자네도 그렇고, 하는 말까지.
아무리 봐도 제정신은 아니다.
“저리 꺼져라.”
사연호가 팔을 휘둘렀다.
미친놈한테는 매가 약…… 이어야 하는데.
“……!”
느긋한 마음으로 팔을 휘두른 그가 두 눈을 부릅떴다.
상대가 자신의 팔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뭔 힘이.’
팔목을 빼내려고 하는데 쉽지 않다.
상대의 힘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다.
“이거 놔라.”
사연호가 볼썽사납게 뒤로 꽈당 넘어졌다.
팔목을 빼내기 위하여 힘을 세게 줄 때 상대가 진짜로 놨기 때문이다.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줬어, 잘못 없다.”
“……감히.”
어금니를 꽉 다문 사연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근 자신에게 이토록 큰 모욕감을 준 자가 있었던가.
“사연호 님,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모욕감을 느낀 건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연호가 당한 행패에 분노한 부하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곳 사람이 아닌 것 같구나.”
“남의 동네에 왔으면 조용히 있다가 갈 것이지, 어디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남궁정혁이 흉흉한 기세를 뽐내는 그들 앞에서 팔을 쫘악 휘둘렀다.
그러자 순간 거친 바람이 불며 그들이 데굴데굴 뒤로 굴러갔다.
“내가 지금 너희 같은 잔챙이들을 상대할 여유가 없다.”
빨리 왕소단을 찾아야 하거든.
그런 그에게 정학우가 충고했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소란을 피워 봤자 저희에게 좋을 것이 없습니다.”
“왕소단을 구할 방법을 찾았다.”
“어떻게요?”
“우리가 북해빙궁으로 가서 왕소단을 내놓으라고 하면 순순히 내어 줄까?”
“아마 우리도 잡아가려고 하지 않을까요? 왕소단과 한패라고.”
“그럼 교환하자고 한다면?”
“뭘 교환하는데요?”
물건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럼, 사람을 구하려면?
남궁정혁이 사연호를 보고 씨익 웃었다.
“인질을 붙잡고 왕소단과 교환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