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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100화 (100/108)

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100화

사람이 너무나 황당한 일을 겪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지금 북해빙궁주, 진혁호가 그런 것처럼.

“하하하하하.”

넓은 대전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큰 웃음을 지은 그가 자신의 손에 들린 서찰을 다시 보았다.

- 사연호를 구하면 싶으면 이틀 후, 왕소단을 데리고 바이칼 호수로 와라.

그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청년에게 물었다.

“이 편지를 누가 가져 왔다고?”

“연호의 부하들이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진혁호의 첫 번째 제자, 원재식이었다.

큰 키에 눈매가 사나운 그도 현재의 상황이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중원인으로 보이는 자가 연호를 잡아갔다고 합니다.”

중원인이라…… 같은 편이 있었던 건가.

아무리 그래도 황당한 상황이다.

같은 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제자를 납치하다니.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인 자의 얼굴이 궁금할 정도다.

원재식이 진혁호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부님, 왕소단이 누굽니까? 저는 그런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틀 전, 한랭구절초를 노리고 본 궁에 침입한 자가 있다. 그자의 이름이 왕소단이다.”

진혁호의 대답에 원재식이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저는 몰랐던 것입니다.”

“내가 본 궁의 일에 관심 없었던 것은 아니고? 요즘 무공 수련을 하고는 있는 것이냐?”

따끔한 사부의 질책.

그의 고개가 절로 내려갔다.

진혁호의 그런 제자의 뒤통수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어릴 적엔 안 그러더니 이젠 속물이 다 되었어.’

한땐 뛰어난 재능으로 진혁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원재식이었다.

그것도 이제는 옛날 일이 되었지만.

원재식은 점점 나이가 들면서 무공보다는 세속적인 것에 더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값비싼 재물이나 권력 같은 거 말이다.

진혁호는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원재식을 제자로 들인 것을 후회할 만큼.

“어쩔실 겁니까? 왕소단이란 자를 풀어 주고 연호를 구하실 겁니까?”

“네 사제가 죽었으면 좋겠느냐?”

진혁호의 호통에 원재식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도 아는 것이다.

진혁호가 자신을 못 마땅히 여긴다는 것을.

그때 북해빙궁의 총관이 궁주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궁주님, 철혈궁의 사자가 지금 막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진혁호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지금 자신의 손에 들린 서찰보다 더욱 기분 나쁜 불청객이 왔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들이 온 이유가 뭐라고 하더냐?”

“궁주님께 안부 인사차 왔고 합니다.”

흥, 진혁호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들의 검은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안부는 무슨, 저번 철혈 회합에 가지 않은 것 때문에 왔겠지.”

철혈 회합은 일 년에 한 번, 철혈궁 산하의 북해빙궁, 대막태양궁, 포달랍궁의 주인이 모이는 자리였다.

명분은 친목 도모.

한집안 식구끼리 안면도 트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거지.

진혁호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자신들의 손아귀에 잘 잡혀 있나 확인하려는 거겠지.’

그래서 한 달 전 열린 철혈 회합에 진혁호는 자신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철혈궁의 사자가 몸에 좋은 약재를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필요 없다. 그딴 약재로 나을 병이었으면 진즉에 나았을 것이다.”

쿨럭쿨럭.

진혁호의 기침이 다시 시작되었다.

다만 이번엔 그 정도가 심상치 않다.

그가 자신의 손으로 입을 황급히 막았다.

“……!”

그의 손바닥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각혈한 것이다.

“……스승님?!”

“궁주님!”

진혁호가 자신을 부축하려는 총관의 손길을 뿌리치고 의자에 앉았다.

‘……부끄러운 일이다.’

북해빙궁주라는 자가 북방의 차가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폐병이라니.

자신에게 수치심을 느낀 진혁호가 두 눈을 감았다.

*   *   *

“밥 먹어.”

“굶어 죽을지언정 적이 내민 음식은 먹지 않는다.”

“싫음 말고, 내 배가 고프냐, 네 배가 고프지.”

남궁정혁이 음식을 와그작와그작 먹는 모습을 보면서 사연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대체 저자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그동안 자신을 위해 수고한 부하들에게 밥 한 끼 사기 위해 간 음식점이었다.

그곳에서 저런 미친놈을 만날 줄이야.

‘뭐어? 날 가지고 뭘 한다고?’

자신을 가지고 도둑놈과 교환한다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웃을 수가 없었지.

‘하는 짓거리에 비해 무공만은 제대로 익힌 자다.’

단 열 수.

북해빙궁주의 제자 중 가장 강한 자신이 단 열 수 만에 쓰러졌다.

상대의 공격이 얼마나 매서운지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자기 혼자 맛있게 밥을 먹는 남궁정혁을 보며 사연호가 바드득, 이를 갈 때였다.

“내일이면 풀려날 수 있으니, 식사는 하십시오.”

정학우가 다시 그에게 음식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안 먹는다니까.”

사연호가 고개를 돌리자, 남궁정혁이 말했다.

“놔둬라. 안 먹는다는 거 보니깐 아직 배가 덜 고픈갑다.”

“도련님, 이자가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 때문에 고생하는데 끼니라도 제대로 챙겨 줘야죠.”

역시 정학우는 착하다.

내가 그의 저런 점을 좋아하지만.

“그나저나 도련님, 인질 교환할 때 괜찮을까요? 행여 일이 잘못돼서 저희까지 모조리 잡히면 어쩌죠?”

다만 쓸데없는 걱정은 좀 많다.

사내가 그러면 큰일을 못하지.

“걱정도 팔자다. 내가 북해빙궁 따위한테 잡힐 것 같냐? 그런 허약한 놈들한테 잡힐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

남궁정혁의 말에 사연호가 발끈했다.

“북해빙궁을 모욕하지 마라. 내가 너에게 진 것이지. 북해빙궁이 너에게 진 것이 아니다.”

나한테 진 것 맞아.

내가 왕년에 너네 궁주, 쌍코피 흘리게 해 준 사람이거든.

“북해빙궁의 혼은 영원하다.”

“그래서 철혈궁이랑 손잡고 마교로 쳐들어갔냐?”

……응?

사연호의 반응이 이상하다.

그냥 한 번 찔러본 거였는데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왠지 엄청 분개하는 것 같은데.

“왜? 철혈궁과 한편이라는 게 부끄럽냐?”

“누가 철혈궁과 한편이라는 것이냐, 그런 식으로 자꾸 본 궁을 모욕하면 더는 참지 않겠다.”

안 참으면?

혈도까지 제압당해서 끌려온 놈이 참, 말은 잘한다.

“북해빙궁과 철혈궁 사이가 좋지 않나?”

“다 알면서 나를 놀리는 것이냐?”

사연호의 거친 반응에 고갤 갸웃한 남궁정혁이 정학우를 보았다.

“둘 사이가 원래 안 좋나?”

동맹이라길래 난 당연히 사이가 좋은지 알았지.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철혈궁주 단사천의 일방적인 요구로 동맹이 맺어진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남궁정혁의 사연호를 보았다.

내부 관계자인이 그를 통해서라면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겠지.

“철혈궁과 북해빙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내가 그걸 너한테 왜 말하겠냐.”

“그거야 내가 듣고 싶으니까. 참고로 말하면 난 이제까지 듣고 싶은 걸 듣지 못한 적이 없어.”

“그, 그건…….”

간만에 손가락 관절 좀 푸나 했더니 사연호가 철혈궁과 북해빙궁 사이에 있었던 일을 순순히 얘기했다.

북행빙궁에서는 쉬쉬한다고 했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이라나.

“그러니까 북해빙궁이 단사천에게 단 삼 일 만에 개박살 났다고?”

이십여 년 전, 당시 북해빙궁주가 단사천과 그와 함께 온 열 명의 동료 앞에 무릎을 꿇었단다.

“단사천, 그자는 북해빙궁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조건으로 단 하나의 요구를 했다.”

“그것이 동맹?”

사연호는 대답하지 않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말이 동맹이지, 사실상 복종을 강요한 것이니 속에서 또 피가 끓어오르는 모양이다.

“동맹관계가 이십 년 넘게 지속되는 걸 보니 북해빙궁은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나 봐.”

당연히 칭찬이 아니다.

이십 년 동안 철혈궁에 복종한 것을 살짝 비꼬아 말하자 사연호가 어금니에 더욱 힘주었다.

“동맹의 유효 기간은 단사천이 죽기 전까지다. 아니면…….”

“……아니면?”

“북해빙궁의 무인이 그자를 꺾으면 그 순간 동맹은 종료된다.”

단사천이라는 자가 자신의 무공에 큰 자신감을 느끼고 있는가 보다.

저런 조건을 넣은 걸 보면.

그나저나 다행이군.

난 또 당시 소궁주였던 진혁호가 나한테 두드려 맞고, 가지고 있던 물건까지 빼앗긴 악감정 때문에 철형궁과 손잡은 줄 알았네.

*   *   *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났다.

남궁정혁 일행은 서찰에 보낸 장소, 바이칼 호수로 향했다.

휘이잉!

귀가 잘릴 듯한 칼바람이 불었다.

“……추워.”

괜히 약속 장소를 여기로 잡았나.

이유가 있어서 이곳으로 오긴 했지만, 가뜩이나 추운데 호숫가란 그런지 더욱 춥다.

그나마 다행인 건 북해빙궁의 사람들이 먼저 나와 있다는 거다.

추운 날씨에 기다리기 싫은 남궁정혁이 일부러 늦게 오긴 했지만.

남궁정혁이, 혼자 북해빙궁의 인물들에게 다가갔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북해빙궁의 수작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 모습이 북해빙궁의 사람들에게는 의외였나 보다.

맨 앞에 서 있던 자가 남궁정혁에게 소리쳤다.

“네가 내 사제를 납치한 자가 맞느냐?”

“……사제?”

“난 북해빙궁의 첫째 제자, 원재식이다.”

진혁호는 안 온 것인가?

남궁정혁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약 스무 명의 북해빙궁 사람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는 없는 것 같다.

“연호는 어디 있느냐?”

“저기 있어.”

원재식의 재촉에 남궁정혁이 한 곳을 가리켰다.

“어디 있단 말이냐?”

“저기 있잖아, 저기.”

남궁정혁이 가리킨 곳은 저~ 멀리 있는 자작나무였다.

그 밑에서 정학우와 엄신우가 사연호를 데리고 있었다.

일반인보다 시력이 훨씬 좋은 원재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보아야 겨우 보이는 먼 거리였다.

“확인했지? 그럼 왕소단은 어디 있냐?”

“데려와라.”

원재식의 말에 북해빙궁 사람들 뒤에 있던 왕소단이 끌려 나왔다.

‘……살이 좀 빠졌나?’

두툼했던 그의 볼살이 조금 갸름해졌다.

그도 사연호처럼 지난 오 일간 밥을 먹지 않은 것인가?

조금 초췌한 모습이긴 하지만 고문당한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남궁정혁을 본 그가 울먹거렸다.

“단주님!”

“괜찮으냐?”

“……괜찮치 못합니다.”

왕소단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갤 숙였다.

남궁정혁도 그 심정을 이해했다.

단순히 북해빙궁에 잡혔기 때문이 아니다.

한랭구절초를 훔치는 것에 실패했으니, 그의 병을 치료하기도 불가능할 터.

왕소단은 그것은 절망했다.

“소단아, 힘내라.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너에게는 내가 있지 않으냐.

내가 너에게 한랭구절초의 꽃잎을 구해다 주마.

남궁정혁이 원재식에게 물었다.

“네가 여기에 있는 사람 중 가장 높은 사람인가?”

“사람이나 맞교환하면 되지, 그건 왜 궁금한 것이냐?”

“너에게 결정권이 있는가 싶어서.”

“……?”

“교환할 건 사람만이 아냐, 물건도 교환하자고.”

“무엇을 말이냐?”

“한랭구절초의 꽃잎, 내가 그것이 꼭 필요해.”

남궁정혁의 말에 원재식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온 북해빙궁의 사람이 모두 비웃음을 흘렸다.

“푸하하하, 그것은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남궁정혁의 다음 말에 웃음을 뚝 그치긴 했지만 말이다.

“음한보신갑을 주마, 그거면 한랭구절초의 꽃잎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이십여 년 전, 진혁호를 두들겨 팬 후, 돈과 함께 뺏은 물건이 음한보신갑이다.

그때 진혁호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질질 매달렸지, 아마.

그것은 북해빙궁의 가보이니 제발 돌려 달라고.

그 말을 듣고 더 돌려주지 않았지만.

‘귀한 물건인 줄 알고 좋다고 들고 왔지만, 정작 나한텐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짜증 나는 마음에 그것을 십만대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렸다.

바로 저기, 드넓은 바이칼 호수에다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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