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105화
사연호의 말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그가 그랬잖냐.
북해빙궁은 은혜를 아는 곳이다.
도움을 주면 그것에 대해 반드시 보답한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이고, 좋다.”
찰랑찰랑.
남궁정혁이 따뜻한 물속으로 몸을 더 밀어 넣었다.
그동안 추운 곳에서 찬바람만 맞아서 그런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 속에서 몸을 녹이니 그동안의 피로가 사르륵 녹는 것 같다.
“물 온도는 맞으십니까?”
“딱 좋네, 아주 좋아.”
남궁정혁이 손을 내밀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북해빙궁의 무인이 술을 대령했다.
꿀꺽꿀꺽.
“캬.”
술에다 꿀이라도 탔나.
식도를 넘어가는 술이 달달하다.
아니면 지금 그만큼 내 기분이 좋든가.
눈 쌓인 설원 한복판, 그곳에서 온천욕을 즐기니 천상 낙원이 따로 없다.
북해빙궁에 이렇게 운치 있는 곳이 있는 줄은 또 몰랐네.
양기섭과 현광호의 검은 손길로부터 북해빙궁을 구한 지도 벌써 일주일.
남궁정혁은 그동안 아주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북해빙궁이 아주 고마운지, 그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더라고.
그건 그들이 내놓는 음식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도련님, 이러다 살쪄서 돌아가겠는데요.”
보통 집 떠나면 고향 음식이 그리워지기 마련.
타지 음식은 입맛에도 안 맞고.
하지만 이곳 음식은 달랐다.
만든 이의 정성이 담겨 있어서 그런지 입에 척척 달라붙었다.
저 봐라, 정학우가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오물거리는 모습을.
그가 식탐이 그렇게 강한 사람도 아닌데도 얼마나 맛있으면 저렇게 허겁지겁 음식을 먹겠냐.
“천천히 먹어라, 그러다 체한다.”
단주 잘 만난 덕에 정학우가 포식할 때, 북해빙궁의 무인이 남궁정혁에게 다가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궁주님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이제는 몸 상태가 좋아졌나?
그는 원재식이 준 독을 마시고 상태가 급속도로 안 좋아졌었다.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런 그를 엄신우가 옆에서 붙어 치료했다.
진혁호에게는 천운이 따라 준 셈이다.
인성을 떠나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한 천하제일 명의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
남궁정혁이 가주실로 들어가자 침대 위에 앉아 있던 그가 바닥으로 내려와 절까지 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나도 이 정도로 베푼 은혜를 어떻게 보답받아야 할지 모르겠어.
고개를 끄덕인 남궁정혁이 말했다.
“몸은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예전엔 가슴 한복판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 놓은 듯 항상 답답한 느낌이었다. 가끔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도 있었고요.”
자리에서 일어난 진혁호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가슴이 답답하지도 않고, 통증도 없습니다.”
진혁호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의 병이 완쾌된 것을 알겠다.
이전에 수척했던 모습과 달리 혈색이 아주 좋아졌기 때문이다.
소화어룡의 내단이 그의 몸에 잘 맞았던 모양.
그 모습에 남궁정혁은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원재식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사부를 시해하려고 한 그는 지금 북해빙궁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진혁호 옆에 있던 사연호가 분개해서 외쳤다.
“그런 자는 당장에 목을 쳐야 합니다!”
그는 천륜을 저버린 짓을 한 자신의 사형을 용서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물어보기는 했지만.
감히 나를 함정에 빠뜨린 놈이다.
원한다면 내가 그놈의 목을 뎅강 잘라 줄게.
하지만 정작 피해를 당한 당사자의 뜻은 다른 것 같았다.
진혁호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식이가 그토록 어긋난 것에는 내 잘못도 있다. 제자가 잘못된 길로 향하면 그것을 바로잡아 주어야 하거늘, 그를 탓하기만 했으니.”
“스승님, 설마 그놈을 용서할 건 아니시죠?”
“어찌 용서까지야 할 수 있겠느냐, 다만 그의 목을 자르라고 내 입으로 명령할 수는 없구나.”
“그럼 어쩌실 겁니까? 평생 감옥에 가둬 두실 겁니까?”
“먼 곳으로 유배 보낼 것이다. 그곳에서 평생토록 자신의 죄를 반성하게 해야지.”
사연호는 스승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었지만, 곧 수긍했다.
그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제자답게.
“양기섭과 현광호는 어쩌실 겁니까?”
남궁정혁에게 쓰러졌던 그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충분히 죽을 만한 중상을 입은 현광호는 체력이 강한 고수답게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오 층에서 떨어진 양기섭도 한쪽 다리과 양쪽 팔이 부러진 했지만 살아 숨 쉬는 데에 지장은 없었다.
그들을 떠올리는 것으로도 불쾌한지 진혁호의 눈빛에 매서운 한기가 감돌았다.
“그들도 기필코 살려 놔야지. 살려 둬서 자기 입으로 직접 실토하게 할 것이다. 그들이 북해빙궁과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단호한 그의 어투로 볼 때 철형궁과의 관계에 일대 파란이 불 것 같다.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남의 집안일은 본인들이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
난 내 식구부터 먼저 챙기면 된단 말이다.
남궁정혁이 진혁호에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궁주님 몸도 다 나은 것 같으니 이제 줄 건 줘야죠.”
바로 한랭구절초의 꽃잎 말이다.
* * *
방 가운데 왕소단이 누웠다.
그런 그의 표정은 한없이 경건했다.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그의 비원이 지금 이 순간 이뤄지기 때문이다.
“준비됐나?”
“예.”
왕소단 앞에서 선 엄신우가 작은 상자을 열었다.
그곳에서는 천왕말쌍벌의 꿀과 진황은행나무의 진액이 들어 있었다.
왕소단이 돈 주고 산 걸 저 상자에 담아 여기까지 들고 왔다.
그리고…….
“이것이 한랭구절초의 꽃잎일세.”
엄신우의 오른손에는 왕소단의 병을 치료할 약재 중 가장 구하기 어려웠던 한랭구절초의 꽃잎이 들려 있었다.
진혁호가 직접 꽃잎을 따서 남궁정혁에게 건넨 것이기도 했다.
“많이 아플 걸세.”
엄신우가 우선은 왕소단의 중심에 침을 놓았다.
“자네도 알다시피 어쩌다 그곳을 맞으면 다른 곳보다 더욱 고통이 크잖아, 그거 신경이 몰려 있어서 그래.”
“…….”
아니요, 저는 잘 모릅니다.
그쪽 신경이 말라비틀어져서 그런 것인지 오히려 다른 곳보다 둔감하게 느껴지거든요.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오래된 회한이 떠올랐다.
‘그때 먹이를 주지 말았어야 했어.’
왕소단이 사는 곳 근처를 배회하는 개가 한 마리 있었다.
누가 버린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뛰쳐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정한 거처 없이 마을을 떠도는 개였다.
어린 왕소단은 그런 개가 불쌍했다.
그래서 집에서 몰래 가지고 나온 음식을 개에게 나눠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손을 혀로 날름거리는 개가 얼마나 귀여웠던지.
당시에는 황색 털을 가진 그 누렁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린 왕소단에게는 그 무엇보다 즐거웠다.
그런 누렁이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원래 사는 집으로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누구한테 잡혀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먹이를 나눠 주던 곳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개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린 왕소단은 상심했다.
좋은 친구를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마저 느꼈다.
누렁이가 다시 나타난 것은 일주일 후.
다만 척 보기에는 상태가 좋지 못했다.
눈에는 진물이 가득 고였고,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흘렀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광견병에 걸린 개의 증상인지.
어린 왕소단은 누렁이를 다시 만나 반가웠지만, 광견병에 누렁이는 아니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먹이를 나눠 주던 사람을 몰라봤다.
그날 그렇게 왕소단은 소중한 구슬을 잃었다.
“아파도 참아야 하네.”
기다란 침이 왕소단의 구슬 속으로 푹푹 들어갔다.
으- 옆에서 그 모습을 보는 남궁정혁이 몸서리쳤다.
괜히 자신의 아랫도리까지 저리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어 엄신우가 세 가지 약재를 한 곳에 넣어 정성껏 빻았다.
“진정한 고통은 지금부터야.”
엄신우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왕소단이 그것을 한 번에 삼켰다.
한시라도 빨리 병을 치료하고 싶다는 듯이.
“으윽.”
몸속 한복판에 횃불을 지핀 느낌이다.
그 불길이 내장을 태워 버리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윽,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왕소단이 몸을 비틀자 엄신우가 다급히 말했다.
“움직이면 안 돼, 꾹 참게.”
뜨거운 횃불이 혈도를 타고 서서히 아래로 이동하다, 이윽고 그곳에 닿았다.
신기한 일이다.
순간 오히려 고통이 줄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왕소단의 두 눈을 번쩍 떴다.
이제껏 세상을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으윽, 이를 악다문 그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끄으읍……!”
그런 왕소단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래, 차라리 울게. 그럼 고통이 가실게야.”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기뻐서 우는 겁니다.
왕소단은 직감했다.
말라비틀어진 신경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다는 걸.
항상 무디고 둔했고 그곳에서 불로 지지는 듯한 느낌이 생생히 전달되었다.
신경이 살아났으니 이런 고통도 느껴지는 것 아닐까.
그렇게 왕소단은 오늘 진정한 남자로 다시 태어났다.
* * *
거참, 뭐 이렇게 많이 나왔데?
사람 부담스럽게.
날씨도 추운데 말이다.
남궁정혁의 눈앞에는 수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은 중원으로 돌아가려는 남궁정혁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장 앞에 서 있는 진혁호가 고개를 숙였다.
“남궁정혁 님께서 북해빙궁에 베푼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옆에 있는 사연호도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이 다 갚지 못하면 제가 대를 이어서라도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든 은혜를 갚겠다는 그 마음은 갸륵하기도 하지만, 저렇게 비장하게 말하는 걸 보니 한편으론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래, 그 마음 변치 말고 죽을 때까지 영원히 간직하게.”
그렇게 북해빙궁도들의 환송을 받으며 남궁정혁과 그의 부하들은 중원으로 출발했다.
남궁세가로 돌아가기 위하여.
이번에도 이동 수단은 역시 마차였다.
“도련님, 배가 훨씬 더 빠릅니다.”
정학우가 마차는 너무 느리다고 항의했지만, 그 의견은 기각되었다.
뱃멀미에 넌더리 난 남궁정혁은 배를 탈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느긋하게 중원으로 돌아왔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데요.”
남궁세가에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아침부터 먹구름 가득 낀 하늘이 심상치 않다 싶더니 앞을 제대로 보기 힘든 폭우가 내렸다.
“이대로 길을 계속 가는 것보단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학우의 말에 남궁정혁이 고갤 끄덕였다.
당장 무리해서 남궁세가로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고, 그것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곳으로 가자.”
남궁정혁이 가리킨 곳은 그들이 가던 길 한쪽에 있는 절벽이었다.
그곳의 지대가 높아 나무 사이에 천막을 치면 작은 불은 피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정학우와 왕소단이 마차에서 방수포를 꺼내 나무 사이에 묶을 때였다.
“뭔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지…… 응?”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던 남궁정혁이 눈을 끔뻑였다.
내리는 건 비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