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106화
사람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게 된다.
그러다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멍하니 서서 어, 어 하는 사이 상황은 종료된다.
이것이 불시에 당황스러운 일을 겪은 일반인의 반응이다.
남궁정혁은 달랐다.
처음엔 하늘에서 떨어지는 여인을 보고 순간 놀라긴 했지만 그것도 잠깐.
곧 땅을 박차고 허공에 날아올라 여인을 품에 안고 무사히 착지했다.
‘많이 놀랐나?’
그의 품속에 안긴 여인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이 느껴진다.
놀란 사람은 그뿐만은 아니지만.
“도련님!”
“갑자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나무 사이에 천막을 치던 정학우와 왕소단도 하는 일을 멈추고 달려왔다.
“그 여인은 어디서 나타난 겁니까?”
글쎄, 그건 나도 궁금하다.
저 구름 위에 사람이 살지 않는 이상, 이 여인은 어떻게 하늘에서 떨어진 걸까?
남궁정혁이 여인을 땅바닥에 내려놓자, 그녀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였다.
우는 것이다.
“왜 저를 구하셨나요? 제가 죽도로 내버려 두지 않고.”
아, 이제야 알겠다.
저 여인은 절벽 위에서 스스로 뛰어내린 거였군.
그래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야.
하나의 의문은 해결되었지만,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아직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이제 겨우 스무 살쯤 되었을까?
저 여인은 한창 꽃다운 나이에 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것일까?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남궁정혁과 부하들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도 남궁정혁이 가진 의문을 똑같이 느끼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저쪽으로 가서 비부터 피하시죠. 그러다 감기에 걸리겠습니다.”
왕소단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감기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요. 저에게는 지금 내리는 비가 돌아가신 부모님의 눈물 같아요.”
“부모님이 언제 돌아가셨는데요?”
“이틀 전 흉수의 손에 그만…….”
흉수?
살해당했단 말인가?
그녀가 다시 서럽게 울기 시작하자 왕소단이 그 옆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접어 앉았다.
“부모님이 살해되신 겁니까?”
“네…….”
“그자들이 누구이길래 소저의 부모님을 살해했단 말입니까?”
“그건…….”
“괜찮습니다. 속 시원히 말해 보세요. 혹시 압니까, 저희가 도울 만한 일이 있을지.”
“이틀 전이었어요…….”
왕소단의 설득이 주효했음일까, 아니면 그 답답한 속내를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라도 풀어내고 싶었던 걸까.
그녀가 이틀 전 자신의 가족에게 일어난 참변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이!”
여인의 말이 끝나자 분개한 왕소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여인에게 벌어진 일은 참으로 안타깝다만, 저 녀석은 왜 저리 흥분한 걸까?
“단주님, 강호의 도리가 살아 있는 한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네가 왜 그리 화를 내냐고?
네 가족이 살해당한 것도 아니잖아.
다만 저 여인에게 벌어진 일은 누구라도 가엾게 여길만한 일이긴 하다.
이틀 전 갑자기 나타난 괴한들이 자신의 가족들을 죽이고 재산까지 강탈해 갔단다
그녀는 그 슬픔과 좌절감을 이기지 못해 절벽에서 뛰어내렸고.
가족의 품으로 가기 위해서.
“소저, 이럴 때일수록 더욱 힘을 내야 합니다. 저승에 있는 가족도 그걸 바라지 않을까요?”
……응? 저 녀석 왜 저래?
슬픔에 빠진 사람을 격려하는 것은 좋다만, 왜 은근슬쩍 손은 잡는 거냐?
“제가 돕겠습니다. 소저의 가족을 죽인 사람을 제가 죽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아주 대단한 정의의 무인 납셨다.
저 녀석이 아까부터 왜 그렇게 흥분하나 했더니 다른 꿍꿍이가 있었구먼.
병을 치료하더니 갑자기 이성에 관한 관심이 막 솟아오르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건 아니지 않냐.
“소저의 원수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시면 제가 당장에 달려가 처단하겠습니다.”
“……그 사람들 아주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괜히 덤볐다간 당신이 죽을 수도 있어요.”
“괜찮습니다. 제가 더 무서운 사람이니까요. 여인에게는 한없이 부드럽지만.”
우웩, 갑자기 속이 메슥거린다.
아까 점심을 그다지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왕소단의 느끼한 말 때문에 급성 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다.
“단주님, 강호의 정의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네가 서문호냐?
정의 타령하게.
남궁정혁이 여인의 얼굴을 슬쩍 훑었다.
‘이쁘긴 이쁘네.’
갸름한 얼굴에 눈, 코, 입이 조화로운 것이 전형적인 미인상이다.
우리 소단이가 저렇게 생긴 여자를 좋아했구나.
“단주님, 뭐 하십니까? 지금 당장 소저의 복수를 하러 가시죠?”
지금 당장?
비가 이렇게 오는데?
“소저, 그 나쁜 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제가 살던 마을에 아직 머무르고 있긴 한데…… 정말 제 가족의 복수를 해 주실 건가요?”
청순가련한 그녀의 눈빛에 왕소단이 더욱 불타올랐다.
“저만 믿으십시오. 저는 제가 한 번 내뱉은 말을 지키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호언장담한 왕소단이 다시 남궁정혁을 재촉했다.
“단주님, 빨리 마차에 타시죠. 소저가 살던 마을로 갑시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 일단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가…….”
“그사이에 흉수들이 마을을 떠나기라도 하면 어찌합니까?”
걔들도 비가 이렇게 오는데 딴 곳으로 갈까?
남궁정혁은 그리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 틈새도 없다.
왕소단이 그의 등까지 떠밀며 독촉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가야 합니다. 강호의 정의로 그 흉수들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잡아야 합니다. 제 마음이 급해서라도 안 되겠습니다.”
“…….”
그의 성화에 남궁정혁 일행이 다시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거세게 몰아치는 폭우 탓에 마차 천장에서는 물이 한두 방울씩 뚝뚝 떨어졌다.
* * *
“저곳입니다. 제 가족을 죽인 자들이 저곳에 묵고 있습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마을 한복판에 있는 객잔이었다.
“악한들아, 너희들을 처단하기 위해 내가 왔다!”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도둑질 말고 싸움하는 데 왕소단이 저렇게 앞장서는 건.
그가 객잔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그 뒤를 따르던 여인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자들입니다. 저자들이 제 부모와 오라버니를 죽였어요.”
객잔의 가장 구석진 곳, 그 자리에는 세 명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들을 향해 왕소단이 챙, 검을 꺼내 들었다.
“이놈들, 너희들은 오늘 다 죽었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다짜고짜 검을 겨누는데 그들이라고 가만있을 리 없었다.
세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검을 꺼냈다.
“네놈은 누군데 우릴 위협하는 것이냐?”
“나는 왕소단, 너희들은 구천지옥으로 안내할 사람이다.”
객잔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외친 왕소단이 검을 꽉 쥐었다.
“…….”
근데 저 녀석 뭐 하냐?
당장이라도 공격할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왜 날 봐?
“……단주님은 뭐 하십니까?”
“뭐가?”
“단주님도 검을 꺼내야죠.”
“네가 상대할 거 아니었어? 하도 자신 있게 나서길래 난 당연히 그런 줄 알았지?”
여인의 눈치를 살핀 왕소단이 남궁정혁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 사정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 모르겠는데
남궁정혁이 어깰 으슥하자 왕소단이 다시 말했다.
“그러지 말고 저 좀 도와주십시오. 저 여인 앞에서 제 체면 좀 세워 달라고요.”
왕소단은 경공과 은신술을 매우 뛰어난 대신 싸움은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한테 저리 사정하는 것이다.
“알았다, 저리 비켜 봐라. 내가 처리할 테니.”
부하의 이성 관계까지 신경 써 주다니,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단주 아니냐.
남궁정혁이 주살검을 뽑자 상대가 외쳤다.
“너희들은 저 여인과 한패냐? 그래서 우리한테 복수하러 온 것이냐?”
“한패는 아니고 우연히 만난…….”
“흥, 어차피 똑같은 놈들이겠지.”
남궁정혁의 말을 싹둑 자른 그들이 선공했다.
그들의 검이 남궁정혁의 전신 사혈을 노렸다.
세 명의 사내가 동시에 공격하면 당황할 법도 하건만, 남궁정혁은 그러지 않았다.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군.’
일류고수 언저리쯤 될까?
자신의 실력에 못 미치는 것은 당연하고, 남수단원들에 비해서도 손색이 많았다.
저런 잔챙이들을 상대로 시간 끌 생각은 없다.
까깡쾅.
주살검에 공력을 주입한 남궁정혁이 검을 휘두르자, 그들의 검이 모두 부러졌다.
헉, 그들이 반 토막 난 검을 보고 경악했다.
“인제 와서 빌어 봤자, 소용없다. 너희들의 죄는 너희들의 목숨으로 갚아라.”
소단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렇게 큰소리치면 민망하지 않냐.
그의 말에 사내들이 바드득 이를 갈았다.
“죽을지언정 너희 같은 놈들에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이렇게 죽지만, 너희들도 언젠가는 심판받을 것이다!”
그 말에 남궁정혁이 고갤 갸우뚱했다.
사람을 죽인 저들의 태도가 너무 당당했기 때문이다.
“매우 극악한 놈들이구나. 끝까지 자신의 죄를 반성하지 않는 걸 보니 말이다.”
……잠깐, 그러고 보니 저들이 여인의 부모를 왜 죽였지?
왕소단이 하도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 이유를 듣지 못했다.
“단주님, 저들의 목을 당장 치시어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시죠.”
“가만히 있어 봐.”
남궁정혁이 흥분한 왕소단을 무시하고, 가장 본질적인 얘기를 꺼냈다.
“너희들이 저 여인의 가족을 죽인 이유가 뭐냐?”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뿐이다.”
“……?”
“아무리 돈이 중요하다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파괴해서야 하겠느냐.”
뭔가 느낌이 싸하다.
그건 비단 남궁정혁만의 감정은 아니었다.
이제는 왕소단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나 보다.
“……돈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정녕 몰라서 묻는 것이냐? 너희들도 저 여인과 한패라면 다 알 것 아니냐?”
“우린 길을 가다가 우연히 저 소저를 만났을 뿐이다.”
“그럼 자세한 사정도 모르고 우린 공격한 것이란 말이냐?”
“그러니까 그 자세한 사정이란 게 뭐냐고?”
“잘 들어라, 저 여인의 가족은…….”
그들의 얘기에 따르면 여인의 가족은 이 근방에서는 유명한 돈놀이꾼이라고 한다.
그것도 방법이 아주 치졸하기 짝이 없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선심 쓰듯 공짜로 돈을 주는 척하면서 나중에 높은 이자를 매겨 돈을 뜯어내는 것은 기본이요, 돈을 빌린 사람이 갚으러 오면 일부러 피하면서 만나 주지 않았단다.
원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이자를 받아 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과도한 이자를 매겨 사람들이 제때 돈을 갚지 못하면 채무자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았단다.
집과 땅은 물론이거니와, 그 가족들까지 고관대작의 집에 하인으로 갖다 팔았고.
그들의 이야기에 충격받은 왕소단이 물었다.
“소저, 이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돈 빌려 가서 갚지 않은 사람이 잘못한 것이지, 그게 우리 가족의 잘못인가요?”
허허허, 남궁정혁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내가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악덕 사채업자의 가족을 돕기 위해 그 비바람을 뚫고 여기까지 왔다는 거잖아.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리는 그가 왕소단을 보았다.
“소단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잘못했습니다.”
왕소단이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머리를 박았다.
뒤지게 맞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기 때문이다.
* * *
객잔에서 묵는다는 것에서 알 수 있겠지만, 여인의 가족을 죽인 사내들은 이 지역 사람이 아니었다.
우연이 이곳을 지나가다 그들의 패악질을 보고 마을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섰다고 한다.
원래는 그들의 재산만 뺏어 원래 주인들에게 나눠 주려 했는데 그들이 무기를 들고 덤비는 바람에 죽이게 됐다고.
“저희는 호정문에서 나왔습니다.”
……호정문?
남궁정혁은 그런 이름의 문파 따윈 들어본 적이 없다.
무림의 정보에 밝은 정학우를 쳐다보니 그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희 문파는 규모가 크진 않지만, 나름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문파가 생긴 지 이백 년은 넘었죠.”
“아, 예.”
남궁정혁이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는 구태여 호정문의 무인들과 한자리에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서 정학우가 권했다.
우리 쪽에서 먼저 실례를 했으니 사과하는 것이 도리라고.
왕소단도 제 잘못을 아는지 이 객잔에서 가장 비싼 요리와 술을 주문했다.
그가 지금 호정문의 무인과 겸상하는 이유였다.
호정문의 무인 중 한 명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비가 언제 그칠지 모르겠습니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와서 이렇게 발이 묶였네요.”
“…….”
남궁정혁이 응답하지 않고 술만 마시자, 그 모습에 민망함을 느낀 정학우가 물었다.
“어딜 가시는 것입니까?”
“남궁세가에 갑니다.”
……남궁세가? 거긴 왜?
“그들에게 꼭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남궁정혁이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뜨자 호정문의 무인이 그 뜻을 오해했다.
“압니다. 남궁세가 같은 대문파에서 저희 같은 중소문파의 부탁 따윈 신경도 안 쓴다는 것을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남궁세가에서도 저희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호언장담에 남궁정혁은 호기심을 느꼈다.
뭘 믿고 저리 자신만만하게 말하는가 싶어서.
그건 정학우 역시도 마찬가지.
“남궁세가에서 왜 호정문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단 말입니까?”
“이것도 인연이니 보여 드리지요.”
그가 품속에서 동그란 동전을 꺼냈다.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동전에는 남궁(南宮)이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그의 말을 정학우가 받았다.
“남궁은원보!”
남궁은원보?
그게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