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막내아들은 천마지존 107화
“남궁은원보?”
고개를 한쪽으로 삐딱하게 꺾은 남궁정혁이 탁자 위의 동그란 동전을 내려다보았다.
호정문 무인들이 말하는 태도나, 남궁은원보란 이름이 주는 느낌에서 저것이 어떤 물건인지는 대충 감이 온다.
내 생각이 맞는지 확인은 해야겠지만 말이다.
남궁정혁의 시선이 정학우에게로 향했다.
“저건 일종의 보은패인가? 남궁세가가 큰 신세를 졌으니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하는 증표?”
“맞습니다. 남궁세가가 어려움에 부닥쳤거나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 도움을 준 사람에게 남궁은원보를 줍니다. 그 도움에 꼭 보답하겠다는 의미로요.”
대답을 마친 그가 호정문 사람들에게 보았다.
“사실 저희는 남궁세가 소속입니다. 제 옆에 앉아 계시는 분은 남수단 단주, 남궁정혁 님입니다. 가주님의 막내아들이지요.”
“예에? 저분이 남궁정혁 님이시라고요?”
“그, 그 남궁신검, 남궁정혁님이 정말 맞습니까?”
호정문의 무인들이 두 눈을 치켜떴다.
그들의 그런 반응이 남궁정혁에게는 의외였다.
뭐 저리 놀라? 날 아나?
남궁신검은 또 뭐고?
“천마총에서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을 구한 사람이 정말 당신, 아니 대협이 맞습니까?”
그러긴 했지.
풋내 폴폴 풍기는 애송이들 인솔해서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천마총에서 무사히 나왔다.
“오대세가를 중심으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대협의 활약으로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과 무인들이 천마총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고요.”
보통 소문이란 잘못된 정보가 퍼지기 마련인데 이번엔 정확한 정보가 제대로 퍼졌구먼.
참 고맙게도 말이야.
“그래서 내가 남궁신검이다?”
“남궁세가에 새로운 신성이 등장한 것을 기리는 명칭입니다.”
오대세가 후기지수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혓바닥을 제대로 털었나 보다.
하긴 나의 위대한 활약을 두 눈으로 직접 봤으니 감명받을 만도 하지.
크크크큭, 미소 짓던 남궁정혁과 정학우의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암, 좋다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그동안 한편으론 서운했거든.
사람들이 내가 잘났다는 걸 몰라 줘서.
근데 뭐? 남궁신검?
이제야 나의 가치를 조금은 인정받은 느낌이다.
게다가 명칭까지 얼마나 멋지냐.
남궁세가의 새로운 검이라니.
푸하하하하.
자기감정 표현에 솔직한 남궁정혁이 함박웃음을 지을 때였다.
“대협,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싫어.”
그가 호정문 무인들의 요청을 단번에 거절했다.
“내가 왜?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을 왜 도와줘야 해?”
“……이거 남궁은원보인데요?”
“그래서?”
남궁정혁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상대방이 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세가의 무인이라면 남궁은원보를 가진 사람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남궁세가의 가법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 내가 가법이나 규율 따위에는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라.”
더구나 당신들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저 멀리 있는 북해빙궁까지 다녀오느라 지금 많이 피곤하거든.
한 일주일 정도는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쉴 생각이야.
“정 도움이 필요하면 남궁세가로 직접 가. 여기서 이틀만 더 가면 되잖아.”
“도련님, 남궁세가 사람이라면 남궁은원보를 가진 사람의 부탁을 들어줄 의무가 있습니다.”
보다 못한 정학우가 나섰다.
“저게 진짜라는 보장 있어? 가짜일 수도 있잖아.”
“무림에서 누가 감히 남궁세가 사람한테 가짜 남궁은원보를 내밀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남궁은원보는 그 속에 담긴 책임이 막중한 만큼 그것을 발행한 기록도 세가에 남아 있습니다.”
정학우가 호정문 무인들에게 물었다.
“이것은 누구에게 받으신 겁니까?”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님께 이십 오 년 전쯤 받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한번 봐도 될까요?”
호정문의 무인에게 남궁은원보를 건네받은 정학우가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남궁정혁도 옆에서 고개를 길게 빼 같이 봤다.
“빛이 나는군.”
이십오 년 된 물건치고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게 관리 상태가 좋다.
“호정문의 가보입니다. 본 문의 문주이신 아버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죠. 그것이 언젠가는 위기에 빠진 호정문을 구할 날이 올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가 지금입니다.
남궁정혁은 고개를 돌려 그 눈빛을 외면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데 귀찮은 일에 말리기 싫었다.
“대협의 할아버지께서 주신 물건입니다. 그분의 뜻을 어기실 셈입니까?”
할아버지는 무슨.
당장 남궁도가 내 아버지가 아닌데 그 사람이 어떻게 내 할아버지냐.
그 사람이 덕 본 걸 왜 내가 갚아야 하냐고.
“도련님, 아무리 봐도 진짜 같습니다. 그리고 남궁은원보에 담긴 의무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
“이것을 발행할 수 있는 사람은 가주님밖에 없습니다. 그 의미를 생각하면 당연할 일이죠.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도 가주님이고요.”
“그럼 남궁도한테 가서 호정문을 도우라고 해. 그가 가주잖아.”
이것을 호정문에게 준 전대 가주의 아들이기도 하고.
“제가 말한 의무가 그것입니다. 남궁세가의 무인이 남궁은원보를 가진 자의 부탁을 받아 그것을 회수해 오면…….”
정학우가 잠시 말을 끊고 뜸을 들였다.
남궁정혁이 뒷말을 추측해 보길 바라는 것이다.
그 기대를 외면할 만큼 그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회수해 온 자의 부탁을 가주가 들어가 들어줘야 한다?”
“맞습니다. 그것이 남궁세가의 가법입니다.”
그래?
갑자기 흥미가 확 동하는데.
남궁은원보를 가지고 가면 남궁도가 말 잘 듣는 하인처럼 내 말을 따라야 한다는 거잖아.
비록 한 번뿐이라 할지라도.
“이리 줘 봐.”
남궁정혁이 정학우에게서 남궁은원보를 건네받아, 가운데 뚫린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빙빙 돌렸다.
마치 그것이 제 것인 것 마냥.
“일단 그 부탁이란 게 뭔지나 들어 봅시다.”
호정문의 무인이 그제야 그들의 곤혹스러운 처지를 남궁정혁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문주님, 날씨가 좋지 않습니까?”
“정말 화창하구나. 바람도 선선하고 말이야.”
호정문의 문주, 곡자운이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최근 수심으로 가득 찼던 그가 오랜만에 짓는 웃음이기도 했다.
그 모습에 그를 모시고 외출 나온 호정문의 부하들도 덩달아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가끔 이렇게 밖으로 나와 기분 전환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허허허, 다음에는 음식도 들고 와서 같이 먹으면 더 좋을 것 같구나.”
근래 가문을 덮친 우환으로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만큼 고심이 크던 그였다.
하지만 이렇게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니, 그 답답함이 잠시나마 날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문주님, 저쪽으로 가면 더욱 경치가 좋습니다.”
이곳 지리라면 부하들보다 곡자운이 훨씬 더 잘 안다.
그들보다 이곳, 상주현에서 훨씬 더 오래 살았으니.
하지만 곡자운은 부하들이 이끄는 대로 잠자코 따라갔다.
어떻게든 자신을 위하는 저들의 마음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저 다리를 건너면…….”
호정문도가 하던 말을 멈추고 다리 맞은편을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건 곡자운 또한 마찬가지.
조금 전의 홀가분한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최근 그를 심적으로 괴롭히는 원수를 진짜 다리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자주빛 무복을 입은 저들은 북두파 소속 무인들이 분명하다.
‘하필 이곳에서 마주치다니.’
호정문이 있는 상주현은 원래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조용한 시골이었다.
그 탓에 이곳에는 무림에 명성을 날리는 대문파는 없었다.
작은 산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듯이, 인구가 적은 상주현에서는 무림 방파가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주현에 자리 잡은 유일한 문파가 호정문.
비록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그들은 조용한 상주현을 지키며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런 상황이 바뀐 건 삼 년 전.
상주현에서 큰 규모의 은광이 발견되었다.
농사 외에는 마땅한 일거리가 없던 이곳에 노다지가 난 것이다.
그때부터 상주현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은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물론이요, 그들을 상대로 한 장사치들까지 몰려와 상업까지 발전했다.
채 만 명도 넘지 못하는 인구가 이십만은 진즉에 넘었다.
갑자기 몰려온 사람들로 인해 그들이 살 집이 부족해서 땅값까지 크게 오를 정도였다.
‘그것 때문에 호정문은 된서리를 맞았지만.’
상주현이 커지면서 늘어난 건 사람과 집뿐만이 아니었다.
무림 문파 역시 속속 들어섰다.
지난 삼 년간 이곳에 새로 생긴 문파가 다섯 개가 넘을 정도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저기 있는 북두파.
이곳에 있는 고만고만한 문파 중 가장 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저들의 힘은 신생 문파 수준이 아니다.’
그들은 토끼 같은 초식 동물이 모여 있는 상주현의 유일한 늑대였다.
북두파는 상주현의 이권을 독식하고 싶은지 시시때때로 다른 문파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들의 위협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생 문파들은 속속 현판을 내렸다.
하지만 호정문은 사정이 달랐다.
‘고향 같은 이곳을 어찌 떠난단 말인가.’
그들이 이곳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이백 년.
선조의 혼과 얼이 살아 숨 쉬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북두파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호정문을 강하게 압박했다.
길거리에서 만난 호정문도에게 일부러 시비 거는 것쯤은 애교였다.
그들은 호정문이 관리하는 가게에 찾아가서 난동을 피웠다.
호정문이 그들의 거친 행동에 항의하면 오히려 큰소리쳤다.
무림인은 행동으로 말하는 것이니 무공으로 승부를 가리자고.
그들의 행패에 호정문의 문도들이 속속 문파를 떠날 정도였다.
곡자운이 최근 밤잠을 설치는 이유였다.
‘진홍이는 남궁세가에 잘 도착했는지 모르겠구나.’
그의 상념의 깨운 건 한 부하의 말이었다.
“문주님, 저들이 다가옵니다.”
맞은편에서 북두파의 무인들이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마치 이 다리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도 되는 것 마냥, 옆으로 나란히 서서.
게다가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리며 슬며시 웃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호정문도들의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마치 자신들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주님, 우리도 가시죠.”
곧 다리 한복판에서 호정문의 무인과 북두파의 무인이 부딪혔다.
“어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호정문의 곡자운 어른 아니십니까?”
곡자운은 자신의 앞에서 비아냥거리며 말하는 자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북두파의 장문인, 문두철의 최측근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는 데 가장 앞장서는 조양구였다.
“근데 저희가 길을 가려는데 이렇게 앞을 막아서면 어떡하십니까, 좀 비켜 주시죠?”
곡자운은 예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을 배려할 줄도 알았다.
하지만 저렇게 빈정거리는 상대에게 호의를 베풀 만큼 호구는 아니었다.
“우리가 먼저 다리에 도착했네.”
“그게 중요한가요?”
“그럼 뭐가 중요한가?”
“제가 지금 당장 이곳을 지나가고 싶다는 거죠. 지금 제 앞을 막은 당신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서라도.”
“자네는 어찌 그리 예의가 없는가, 차라리 정중하게 부탁하면 길을 지켜 줄 수도 있을 것을…….”
조양구가 곡자운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얘들아, 길 터라. 노인네가 말이 너무 많다.”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마음먹었던 것처럼 북두파 무인들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들이 호정문의 문도들을 공격했다.
“쉽사리 당할 줄 알았느냐.”
의지와 달리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원래 시골의 작은 문파였던 호정문의 문도들은 무공이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북두파의 무인들은 무공이 강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문파의 제자들임에도 말이다.
곡자운은 그것이 항상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시원한 물속에서 정신 좀 차려라.”
북두파 무인들이 호정문도들을 다리 밖으로 던졌다.
이제는 다리 위에 남은 호정문도는 곡자운밖에 남지 않은 상황.
“노친네, 그러게 순순히 비키라고 할 때 비키면 좋았잖아.”
“버르장머리 없는 놈.”
곡자운이 조양구의 멱살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아무 소용 없다.
오히려 물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인 그의 동작에 자신의 멱살을 내주고 말았다.
“이렇게 하려고 한 거지?”
“네 이놈…….”
“무공이 약하면 자존심이라도 세우지 말든가. 왜 자꾸 이곳에서 뻗대면서 사람 귀찮게 하는 거야?”
조양구가 멱살을 잡은 채로 곡자운을 들어 다리 밖으로 던져 버리려고 할 때였다.
“그러니까 저것들만 해치우면 남궁은원보가 내 거라는 말이잖아.”
부하들의 맨 뒤쪽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들렸다.
동시에…….
풍덩풍덩.
부하들이 다리 밖으로 하나둘씩, 튕겨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