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
#프롤로그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갑작스레 웬 남자가 아멜리오 백작저를 방문하기 전까지는.
“오랜만이야, 로레이나.”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예쁜 붉은 눈에 웃음기를 드리우며 말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남자를 본 순간 생각이 정지되어버린 탓이었다.
그리고 남자 역시 이런 나의 상태를 눈치챈 것 같았다. 다 이해한다는 듯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을 보면.
“아, 맞다. 내 소개를 제대로 해야겠지.”
“…….”
“내 이름은 레오나드 젠 데르키안.”
원작에 한 줄도 나오지 않는 엑스트라로 빙의된 지 6년 차.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상황을 맞이했다. 절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왜, 왜…….’
……왜 남자 주인공이 우리 집에 와 있는 거지? 나는 놀라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재빨리 틀어막았다.
아니, 그리고 오랜만이라니? 우리 오늘 처음 보는 사이 아닌가요.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레오나드가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모든 의문이 사라졌다.
“너를 만나러 왔어.”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한 거리였다. 열린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에 레오나드의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아직 날이 밝아 햇살이 잔뜩 들어오는 응접실 안에 밤하늘이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반짝이던 붉은 눈이 이내 반으로 접혔다.
곧 입가에는 옅은 웃음기를 띤 미소가…….
‘어라?’
나 저 미소를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로레이나.”
레오나드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상념에 빠진 나를 건져 올리는 것처럼.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잖아.”
“…….”
“벌써 잊어버렸어?”
질문을 끝낸 레오나드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 묘하게 익숙한 행동에 예전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4년 전, 사람이 별로 없어 늘 조용한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가 유난히 북적거렸던 때가.
그리고 항상 그 중심에 있던 얼굴이.
“……젠?”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제야 레오나드가 활짝 웃으며 내게로 손을 뻗었다.
아까 전까지 짓고 있던 미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환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레오나드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했으니까.
‘젠은 내 가슴께까지밖에 안 오는 꼬맹이였는데?’
그에 비해 지금 레오나드는 내가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컸다.
불과 4년 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이 묘하게 성숙한 분위기도 그렇고.
‘레오나드가 젠일 리 없어.’
분명 그게 맞는데…….
머리 위로 느껴지는 따뜻한 손길에 잠시 생각이 멎었다. 레오나드는 아무런 말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귀중한 보석을 만지는 양 섬세한 손길이었다. 머리 위쪽을 배회하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내 오른쪽 뺨에 닿았다.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고개를 들었을 때 또다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보석같이 반짝인다고 생각했던 붉은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넌 모르겠지.”
“…….”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를 기다려왔다는 남자 주인공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잠시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레오나드가 천천히 내 뺨을 쓰다듬었다.
“로레이나.”
그러고는 내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마치 세상에 아는 것이 그것뿐인 것처럼.
“뭐든지 다 할 테니까 내 옆에 있어 줘.”
“…….”
“제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꼭 나한테 애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이래, 진짜.’
이러니까 꼭 나한테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잖아.
나는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레오나드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나 4년 전에 무슨 짓을 한 거지?
#1화
“아멜리오 영애, 괜찮나요?”
“지금은 힘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로레이나 아멜리오. 아멜리오 백작가의 하나뿐인 아가씨.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몸에 빙의하고 처음 들은 말은 꽤 잔인했다.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자 나를 향해 쏟아지던 안쓰러운 시선이 더 짙어졌다.
“어머, 어쩜 좋아. 충격이 큰 모양이에요.”
“당연하죠. 아멜리오 영애는 아직 12살인걸요. 그 나이에 부모님 두 분이 동시에 돌아가셨으니…….”
대학 입학식 날 내가 읽던 소설에 빙의한 것도 모자라 하필 그날이 빙의된 몸의 부모님 장례식 날이라니. 뭐 이런 경우가.
하지만 이런 상황이 어색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원래 운이 지지리도 없는 편이었고 이런 일쯤이야 나에게는 흔한 일이었으니까.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고, 받아 주는 보육원이 없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야 뭐…….’
이쯤이면 괜찮은 편이라고 스스로를 달랬건만, 내 불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소설에 빙의한다는 이 상황만으로도 기가 막히는데 지금이 원작 소설의 본격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기 무려 30년 전이란다.
여기에 덧붙여서 내가 빙의된 몸이 원작에 언급도 안 되는 엑스트라라는 것까지 알았을 때, 나는 결심했다.
내 인생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일의 연속이라면, 차라리 아무리 코가 깨져도 치료비 걱정 없는 부자가 되자고.
설마 그것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 * *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빙의되고 2년 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내가 시한부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 막 14살이 되었던 나는 굉장히 소박한 꿈을 꾸고 있었다.
첫 번째, 깨진 코를 회복할 수 있을 정도의 부자가 되는 것.
두 번째, 원작이 시작되는 30년 후에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연애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
로레이나는 백작 영애였기에 그리 어렵지 않은 꿈이라 생각했다.
아멜리오 백작가에서는 이전 세계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생활이 이어졌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멜리오 가문이 제국에서 손꼽는 부자인 것은 아니었다.
영지는 작은 편이었고 오는 길은 복잡하고 험하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내가 오갈 것도 아닌데. 나는 복잡한 수도까지 올라갈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내가 죽기 전까지 다 못 쓰고 간다면 그게 그거다.
억만장자는 아니어도, 한적한 시골에서 조용히 살기에 백작가의 재산은 충분했다.
불운했던 내 인생에 이처럼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다니.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이 모든 것을 동시에 무너뜨릴 사건이 있으리라고는.
쨍그랑.
들고 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조금 전의 소리가 찻잔이 깨지면서 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방금 내 마음속에서도 같은 소리가 났거든.
“……지금 뭐라고 했어?”
누가 목을 조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 나왔다.
‘침착하자. 잘못 들었을 거야.’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이 상황이 꿈이기를.
물론 곧 들려온 대답으로 인해 그 희망은 박살 나고 말았지만.
“아가씨가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이종족이시라고요.”
여상한 목소리로 말한 시녀, 메리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내가 깨뜨린 찻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고 그러세요? 꼭 처음 아신 것처럼.”
처음 안 게 맞으니까 그렇지.
“혹여나 그런 농담은 하지 마세요. 아가씨가 이종족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 찾는 게 더 힘들 테니까요.”
……그렇게 힘들지 않을걸? 그 모르는 사람 여기 있어, 메리. 바로 네 옆에.
“이종족 중에서도 아름답고 기억력이 좋기로 유명한 하프 엘프시잖아요.”
그렇구나. 원래도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리고 아가씨 머리칼에 대한 찬사가 얼마나 많은데요? 분홍빛 머리는 흔하지 않잖아요. 그중 이렇게 예쁜 색은 세상에 아가씨 하나뿐이고요.”
“…….”
“이 세상에 하나 남은 이종족 아가씨를 모시게 된다니. 처음에 제가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아가씨는 모르실 거예요.”
메리가 바닥에 쏟은 차를 닦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 이 세상 하나 남은 이종족 좋지.’
그게 내가 아닌 레오나드의 설정이니까 문제지.
바로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 말이다.
지금이야 사정이 있어 숨어 지내지만 레오나드는 이종족이었다. 그것도 그중에서 가장 귀한 취급을 받는 하프 드래곤.
심지어 원작 시작 전, 레오나드를 제외한 이종족은 전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럼 방금 이종족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어떻게 되느냐.
“……원작이 시작되기 전에 죽는 거지, 뭐.”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조용히 내 인생의 목표에게 안녕을 고했다.
안녕. 돈 많은 백수 생활.
안녕. 말년에 남의 연애사 훔쳐보려던 소박한 꿈.
짧았지만 그동안 즐거웠다. 내 인생 통틀어서 가장 행복했던 2년이었어.
‘난 왜 이런 엄청난 사실도 몰랐던 거지? 사람들이 부모님 이야기라도 했으면 금방 알았을 텐데.’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의외로 답은 금방 나왔다. 나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담담하게 말하지만 빙의한 직후의 나는 꽤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갑작스레 다른 세계에 빙의되었는데 제정신인 사람이 있을 리가.
분명 장례식날 멍하니 서 있다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 머리 박고 기절했었지.’
당연히 사람들은 내가 부모의 이른 죽음에 충격을 받아 그런 것이라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주위 사람들은 지난 2년간 백작 부부에 대한 언급을 피하게 되었다.
‘나 역시 따로 물어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네.’
진작 물어볼걸. 진짜 지지리 운도 없지. 설마 내가 세상에 몇 없는 이종족일 줄 알았겠냐고.
“메리, 만약에 내가 시한……. 아니, 얼마 뒤에 죽는다면, 그건 뭐 때문일까?”
내 말에 메리가 재미난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하고 그러세요? 아가씨는 저희 같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시잖아요.”
“……그렇지.”
“신의 축복도 받으셨으니 몇백 년은 기본으로 사실 텐데.”
몇백 년이 기본이라니. 그런데 나는 그 기본도 못 살고 원작 시작 전에 죽는다고?
그리고 말이 30년 뒤지, 원작 시작 전에만 죽으면 되니 바로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은가.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 세계, 그러니까 소설 <크루시아> 속 현존하는 이종족들은 모두 신의 축복이라는 특혜를 받은 이들이었다.
신의 축복은 그 이름에 걸맞게 질병이나 사고의 위험으로부터 이종족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했고.
그러니 나는 병에 걸려 죽는 것도, 사고로 죽는 것도 아니라는 거였다.
‘그렇다면 남는 건 살해당하는 것뿐인데.’
이건 진짜 너무하잖아. 코 깨져도 상관없을 만큼의 돈이 있으면 뭐 하는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미 죽은 몸은 되살릴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세계에 마법이 존재한다면 모르지만…….’
이미 마법이 사라진 지 300년이나 지난 세계관에 이제 와 그런 걸 기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럼 나는 꼼짝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채로? 더 생각하는 것조차 괴로워서 낙담한 채 소파에 누웠다.
그사이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다 치운 메리가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내 몸을 흔들었다.
“어서 일어나세요, 아가씨. 하실 일이 있잖아요.”
“설마 또 연애편지에 답장하라는 건 아니지?”
“……다, 다른 편지도 있어요!”
그 말은 대부분이 연애편지라는 거잖아. 뭐,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지금 같은 상황에도 그런 편지에 답장을 해 줘야 한다니.
“그냥 다 불태워 줘, 메리.”
“정말 다 태워요?”
“응, 아니면 모아 두었다가 겨울에 땔감으로 쓰던가.”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했는지 메리가 우물쭈물하는 것이 보였다.
그에 다시 한번 쐐기를 박으려는데, 별안간 등 뒤로 낮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건 안 됩니다, 아가씨.”
누구인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저택에 한 명뿐이었으니까.
“제가 아가씨께 편지를 쓰더라도 다 불태우실 겁니까?”
“당연히 아니지, 길버트…….”
힘없이 답하자 길버트가 나긋하게 웃었다.
아멜리오 백작가에 가장 오래 있었던 집사다운 미소였다.
“그럼 다른 분의 편지도 똑같습니다. 답장하는 것이 예의죠, 아가씨.”
“길버트랑 그런 사람들은 달라. 내 소문만 듣고 보내는 편지들인걸. 어차피 답장 안 해도 별 신경 안 쓸…….”
“아가씨.”
반복되는 부름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걸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별수 없었다.
내가 지금 갑자기 시한부가 되었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어차피 말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알았어, 답장 쓸게. 그런데 너무 많이 거절해서 이제 쓸 말도 없어. 뭔가 새로운 말 없을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길버트가 나에게 온 편지 중 몇 개를 추려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첫 번째는 파티 초대장이었고 두 번째도 파티 초대장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도 파티 초대장……. 응?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을 때 길버트가 웃었다. 눈가의 주름에 옅은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아가씨 말씀대로 별 의미 없는 편지에 답장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
“특히 그 말도 안 되는 연애편지들은 더더욱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 느끼한 편지들을 보지 않아도 된다니.
나는 감사의 의미로 길버트에게 싱긋 웃어 주고는 곧장 답장을 써 내려갔다.
‘그래 봤자 전부 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 파티장이라니.
가뜩이나 사람도 많은 곳인데 거기 갔다가 칼 맞고 죽을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얻은 귀한 삶인데 그럴 수 없지.’
그렇게 열 번째 답장을 써 내려갈 무렵, 나는 익숙한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아주 귀중한 이름을.
“……메리, 메리!”
“왜 그러세요, 아가씨?”
“편지지 이거 말고 다른 것으로 가져다줘. 제일 예쁜 것으로! 좋은 향수 있으면 그것도 좀 가져다주고!”
다급한 외침에 메리가 향수와 분홍색 편지지 하나를 서둘러 가지고 왔다.
나는 그것들을 받아 파티에 참석하겠다는 내용의 답장을 쓴 뒤 향수를 편지지에 살짝 뿌렸다.
부디 이 편지가 그 집 땔감이 되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됐다. 이 정도면 친해지고 싶은 내 마음이 전해지겠지?”
“아시는 분입니까?”
내가 파티에 참석하겠다고 한 것이 의외였는지 길버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에 나는 입꼬리를 올려 씩 웃어 주었다.
그럼 물론이지. 아는 이름이고말고.
* * *
로맨스 판타지 소설 <크루시아>의 남자 주인공 레오나드 젠 데르키안.
그는 남자 주인공 자리에 걸맞은, 그야말로 완벽한 인물이었다.
아름다운 외모, 훤칠한 키. 생명의 신의 핏줄이라는 고귀한 혈통. 그리고 그 증거로 하사받은 카일룸 제국이라는 땅까지.
태어나자마자 차기 황제로 결정된, 그야말로 꽃길 그 자체를 걷는 이였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인생이었건만 사실 레오나드에게는 치명적인 약점 하나가 있었다.
300년 전 한 마녀가 목숨과 바꿔 날린 저주 때문이었다.
[결국 네 곁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
마녀가 날린 저주를 명확히 들은 사람은 가까이에 있던 황제와 황후뿐이었고, 내용도 모호했기에 처음에는 아무도 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레오나드가 태어나고 몇 달 뒤 황제가 원인 모를 병으로 명을 달리하기 전까지 말이다.
그가 신의 축복을 받은 드래곤임을 생각하면 기함할만한 일이었다.
그에 충격을 받은 황후 역시 몸이 약해져 얼마 가지 않아 숨을 거두었고, 레오나드는 저주의 내용처럼 정말 혼자가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행한데, 저주의 영향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레오나드가 다른 이와 교류하는 것을 막고 싶었는지 그에게 타인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질병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타인과 함께한 순간은 금방 잊어버렸다.
레오나드가 기억할 수 있는 건 타인과의 아주 단편적인 기억이거나 혼자 있을 때의 기억뿐이었다.
이런 레오나드가 혼자서 살 수 있을 리는 없으니 원작에서는 그의 조력자 하나를 등장시킨다.
‘이 조력자의 도움으로 레오나드는 무사히 황궁을 벗어나지.’
하루에도 열 번이 넘는 암살 시도를 받았을 만큼 그때의 황궁은 매우 위험했으니까.
아직 혼자 걷지도 못하는 아기인데 그 상황에서 계속 황궁에 있을 수는 없지.
그렇게 레오나드는 안전한 곳에서 조력자의 보호를 받으며 힘을 기를 때까지 수백 년을 숨어 지내는데…….
레오나드에게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이 조력자가 바로 ‘헨티슨 가문’. 나에게 파티 초대장을 보낸 가문과 똑같은 이름이었다.
‘물론 이 둘이 같은 가문이 맞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작중에 헨티슨이라는 성이 흔하다는 언급이 있었으니까. 작위도 딱히 나온 적이 없었고.
그래도 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생명의 신의 후손인 레오나드의 옆보다 안전한 곳은 이 세상에 없다. 생명의 기운이 가장 강한 곳이니까.
레오나드 옆에 있으면 나 또한 살 가능성이 훨씬 커질 터였다. 이건 원작이 시작되기 전, 아니 원작이 시작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저주 때문에 레오나드와 친해지는 것은 힘드니 그 측근들에게라도 엮여 봐야지.’
로레이나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 꽤 수월하리라 생각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이종족이라는 신분도 있었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었고.
……분명 파티장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쨍그랑.
들고 있던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처참하게 깨졌다.
나는 내 팔을 동아줄처럼 붙잡은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파티장 속 수많은 사람 중에서 그 아이의 붉은 눈동자만 유난히 빛나는 것 같았다.
굳게 다물려 있던 아이의 입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내며 열렸다.
“……너 뭐야.”
넌 뭐냐니.
……그건 내가 할 말인 것 같은데, 꼬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