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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4화 (4/144)

#4화

처음에는 잠시 망설이던 레이첼은 곧 젠에게 사과를 건넸다.

아마 진심으로 사과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나와는 달리 젠은 귀족인지 평민인지도 알 수 없는 아이였으니까.

‘물론 지금 옷차림이나 생김새를 봤을 때는 귀족 같긴 하지만.’

레이첼은 일단 아무것도 안 하기에는 내 눈치가 보이니 빨리 사과하고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래. 그게 어디야.’

아까까지 소리를 지르며 범인으로 몰아가던 사람이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꼭 예전 내 억울함을 보상받는 것 같아서.

‘그때 결국은 사장이 잘못 계산한 거였지.’

하지만 그 사람은 나한테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빨리 일이나 하라며 어물쩍 넘어갔을 뿐.

그 일에 비하면 지금은 아주 잘 해결된 편이었다.

사과를 끝낸 레이첼은 후다닥 파티장을 떠났다. 나머지 사람들 역시 분위기를 살피더니 차례차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칵테일 파티라 늦게 시작하기도 했고 이런 상황에서 파티를 즐기는 것도 웃겼으니 말이다.

‘슬슬 나도 돌아가야지.’

아까 서 있던 곳에 메리가 그대로 있는 것이 보였다. 좋아. 이제 진짜로 여길 떠날 수 있…….

“아멜리오 영애!”

……아, 진짜. 또 누구야.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몸을 돌리자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 파티의 주최자, 다이아나 헨티슨이었다.

급하게 달려온 모양인지 거칠게 숨을 내쉬던 다이아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몸을 일으켰다.

“보내 주신 편지 잘 읽었어요! 한번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대화를 하게 되네요.”

……맙소사. 그 편지를 읽었단 말이야?

‘쥐구멍이 어디 있더라.’

차라리 그냥 땔감이 되는 것이 나을 뻔했다. 다이아나가 원작 속 헨티슨 가문 사람인 줄 알고 잘 보일 마음에 있는 말 없는 말 다 갖다가 썼는데.

진짜 수치스러워서 죽을 것 같다. 어쩌면 내 사망 원인은 이것 때문인지도 몰라.

다이아나는 알까. 드레스 자락이라도 찢어서 얼굴에 뒤집어쓰고 싶은 내 심정을.

“저는 영애같이 말 잘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너무 부러워요.”

……모르는구나. 그러니까 저렇게 말할 수 있지.

“만약 저였다면 그냥 그 계집애 머리카락을 다 뜯어…….”

“……영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이아나가 배시시 웃었다. 뭔가 찜찜하긴 한데, 다이아나의 호감을 사자는 계획은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지금은 다 쓸모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파티 즐거웠어요.”

아까부터 메리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서둘러 움직였다.

하지만 발을 떼자마자 다이아나에게 한쪽 팔을 붙잡혔으므로 별 소용은 없었다.

이 집안은 남의 팔을 덥석 잡는 것이 취미인가. 나 좀 보내 줘라, 제발.

“잠시만요, 영애. 저랑 잠깐만 이야기하지 않을래요?”

“죄송한데 제가 피곤…….”

“젠에 대한 이야기예요.”

다이아나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잠깐이면 돼요.”

아,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마음 약해질지 어떻게 알고.

“……진짜 잠깐만이에요.”

내 말에 밝게 웃어 보인 다이아나가 그대로 나를 붙잡고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메리를 향해 쉬고 있으라는 뜻으로 손짓해 주었다.

진짜, 이게 뭐 하는 짓이람.

‘빨리 가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하는데.’

이 값 다 톡톡히 받아 낼 거다. 진짜로.

* * *

로레이나가 다이아나를 따라 점점 멀어졌다. 젠은 로레이나가 눈앞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젠을 옆에서 보고 있던 제럴드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뭐가?”

“아멜리오 영애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으시잖아요? 그래서 다이아나에게 그녀를 붙잡아 두라고 한 거고요.”

제럴드가 익숙하게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빼더니 빠르게 무언가를 기록했다.

대화 내용을 기록하고 그걸 나중에 젠이 확인하고 나면 불태우는 일은 늘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기억 못 하시겠지만 아까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모레트 영애는 황태자비 후보로 유력한 사람이라 나설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는 정리해서 다시 보고드릴…….”

“아니, 됐어.”

“네?”

“다 기억하니까 그럴 필요 없다고.”

“……다 기억하신다고요?”

“그래.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젠, 아니 레오나드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로레이나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레오나드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볼 수 없다는 말이 맞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제럴드 역시 사람이라고 인지할 수만 있을 뿐 정확한 얼굴 생김새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로레이나는 달랐다. 로레이나는 즐거울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화났을 때의 얼굴은 어떠한지 다 보였다.

그래서였다. 밖으로 나오지 말라던 헨티슨 남작의 부탁에도 무작정 나가 로레이나의 팔을 잡았던 것은.

‘저기, 꼬마야? 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데 팔 좀 놔줄래?’

로레이나가 처음 말을 했던 순간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마주한 눈은 아주 예쁜 푸른색이었다.

“다, 다 기억하신다고요?”

레오나드가 누군가와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건 처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놀란 제럴드가 대화 내용을 기록하던 것도 잊고 멍하니 레오나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오나드의 눈에는 그 표정 역시 보이지 않았다. 아까 로레이나의 얼굴은 잘만 보였는데도.

확실하다. 로레이나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래. 그래서 옆에 붙어 있어 볼 생각이야.”

“네? 하지만 황제 쪽에서 눈치라도 채면 어쩌시려고…….”

제럴드의 말에 레오나드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없이 작고 연약한 손이 시야에 잡혔다.

“어차피 이 몸으로 있는 한 그쪽에서도 눈치 못 챌 거야. 황제가 찾고 있는 건 성체가 된 하프 드래곤이지, 어린 남자아이가 아니니까.”

본래 드래곤이 성체가 되는 시기는 100년. 하프 드래곤 역시 이와 같은 성장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300년이 지났음에도 레오나드는 아직 성체가 되지 못했다.

다른 드래곤의 기운을 받으며 둥지에 좀 더 있어야 할 시기에 보호자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중요한 정보가 새어 나갈 일이 없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레오나드와 헨티슨 남작가 사람들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오히려 잘된 일 아니야? 혹시라도 내 존재를 황제가 이상하게 여길까 봐 남작저에 꽁꽁 숨기느라 고생했잖아. 황제가 감시하는 대상에 헨티슨 남작가도 껴 있었으니까.”

현재 권력을 잡고 있는 데프론 황가는 다른 이들과 달리 레오나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암살 시도를 주도한 것이 지금의 데프론 황가였으니 말이다.

그들의 추적은 레오나드가 황궁에서 도망친 직후부터 계속되었으니 그의 보호자인 헨티슨 남작가가 고생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레오나드는 몇 없는 기억 중 사용인들 입단속을 시키느라 골머리를 앓던 헨티슨 남작을 떠올렸다.

그가 아멜리오 백작저로 떠난다면 이제 그럴 필요도 없어지니 잘된 일이지 않은가.

“그건 그렇지만……. 아멜리오 영애가 자기 집에 머무는 걸 허락해 줄까요?”

“어떻게든 허락하게 만들어야지. 어쩌면 저주를 풀 유일한 실마리일지도 몰라.”

“하지만…….”

뭐라 대꾸하려던 제럴드는 여전히 로레이나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는 레오나드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저런 모습의 레오나드는 처음이니,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300년 전 마녀 이사벨이 내린 저주. 그 저주 때문에 레오나드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레오나드가 가진 것 중 어느 것 하나도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얻어진 것이 없었다.

걸음을 어떻게 떼어야 하는지, 넘어졌을 때는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 그리고 외로울 때는 어떻게 혼자 견뎌야 하는지.

이 모든 것들을 레오나드는 전부 혼자 겪고 알아내야만 했다.

‘그래. 다 레오나드 님을 위해서야.’

저 어깨에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다. 레오나드가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차리기 전에 저주를 풀어야만 했다.

이사벨의 저주 이후 죽은 건 당시 황제와 황후뿐이라, 저주의 내용을 모르는 이들은 이사벨이 그들을 죽이기 위해 저주를 걸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어떻게든 아멜리오 영애를 설득해야지. 그렇게 결심하고 10분 후…….

제럴드는 그냥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싶어졌다.

“아까 나설 수 없었던 건 사정이…….”

“그래도 그건 아니죠. 제가 안 나섰다면 젠은 꼼짝없이 목걸이 도둑으로 몰렸을 텐데. 게다가 그 목걸이가 그냥 목걸이에요? 무려 황태자 전하께서 모레트 영애에게 하사하신 목걸이라잖아요. 어쩌면 황태자 전하께서 젠한테 벌을 주셨을지도 모르죠. 젠이 감옥에 갇히게 되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면서 쩔쩔매실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아니라면 아까도 나섰어야죠. 같이 있었다는 말 한마디 해 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렇게 입을 꾹 닫고 계셨던 거예요?”

“죄송…….”

“여기 사람들은 왜 자꾸 사과를 엉뚱한 사람한테 하는 거예요? 미안하다는 말은 저 말고 젠한테 가서 하세요.”

제럴드는 하는 말마다 3초 이상을 이어가지 못하고 가로막히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앞으로 나섰을 때부터 만만치 않은 아가씨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게 정말 열네 살짜리 아가씨의 말솜씨가 맞는 건가?’

그리고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로레이나에게 헨티슨가 사람들은 다 둘도 없는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

물론 왜 젠을 모른 척했느냐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점은 편했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다이아나가 로레이나의 말에 맞장구치며 손뼉 치고 있는 것이 한몫했다.

저 바보. 자기한테도 해당하는 말인 것도 모르고.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지?’

여기서 젠을 잠깐만 맡아 줄 수 있냐는 말을 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쓰레기가 될 것 같다.

‘뭔가 다른 말 없을까.’

같은 말이지만 조금 덜 쓰레기가 될 수 있는 그럴듯한 말. 생각하자, 제럴드. 이게 다 레오나드 님을 위한 일이야.

이 시련을 극복해 내지 못하면 레오나드 님이 실망하실…….

“아멜리오 영애, 혹시 잠시만 젠을 맡아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 바보가! 제럴드는 아무런 생각 없이 말을 내뱉은 자신의 동생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에 다이아나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응수하는 사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로레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젠을 맡아달라니요?”

“저희가 사정이 좀 있어서, 젠을 잠깐 다른 곳에 맡겨야 하거든요. 아까 보니까 젠이 영애를 잘 따르는 것 같아서요.”

“무슨…….”

“마침 젠을 안다는 말도 하셨으니 젠이 아멜리오 백작가에 있는 걸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테고요.”

이어지는 다이아나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무는 로레이나를 보며 제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봐라.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로레이나의 눈이 더 뾰족해지지 않았는가.

더 심각했던 것은 말을 한 건 분명 다이아나인데 로레이나는 제럴드만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제가 사람들 앞에서 젠을 아는 아이라고 한 것 때문에 바로 저한테 떠맡기시는 거예요?”

“……영애, 우선 제 말을 좀…….”

“그러시면 안 되죠. 아무리 피가 반밖에 안 섞였다고 해도 한 가족인데.”

“일단 제 말을……. 네?”

잠시 생각하던 제럴드는 곧 자신이 왜 쓰레기가 되었는지 납득했다.

아무래도 로레이나는 젠을 헨티슨 가의 사생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식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다니. 억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굳이 정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정말 잠시만 맡아 주시면 됩니다. 금전적인 보상은 충분히 하겠습니다.”

“제가 그런 것으로 넘어갈 사람으로 보여요? 사람을 뭐로 보시는 거예요?”

아, 역시 안 되는 건가. 제럴드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레오나드에게 뭐라 말을 하면 좋을지 벌써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영애가 힘들지 않도록 젠을 돌봐 줄 사람들도 같이 보내겠습니다.”

……어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들려오는 말이 없었다.

‘혹시 너무 기가 막혀서 말할 가치도 없다는 걸까.’

제럴드는 두려운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19년이나 살아놓고 왜 열네 살짜리 아가씨를 무서워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멜리오 영애?”

고개를 들자 로레이나가 뭔가를 고민하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로레이나가 천천히 입을 뗐다.

“저 혹시…… 그 사람들에 기사들도 포함인 건가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말에 제럴드는 냉큼 대답했다.

무조건 포함이다. 그전에 자신이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저희가 보낸 사람들에 대한 인건비 역시 저희가 담당할 예정이니 영애는 그냥 마음 편히 계시면 됩니다.”

“음…….”

바라는 것을 짚어 주었음에도 여전히 고민하는 로레이나의 모습에 제럴드가 초조해하고 있을 무렵 응접실 문이 열렸다.

끼이익.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레오나드였다.

‘잘하고 있는지 감시하러 오신 걸까.’

그렇게 혼날 각오를 하고 있는 제럴드의 귓가로 레오나드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누나랑 있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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