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처음 보는 모습에 제럴드가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안 될까……?”
속삭이는 듯한 말에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기까지. 심지어 두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였다.
언뜻 보기에는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럴드는 알 수 있었다.
저건 무조건 화가 나서 그런 것이라는 걸. 이런 수치스러운 짓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짜증이 나는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튀어나온 것이 분명했다.
최측근이라는 자가 이런 일 처리도 제대로 못해서야 되겠냐는 시선에 제럴드가 눈물을 머금으려던 찰나, 로레이나가 대답했다.
“좋아요. 제가 젠을 맡을게요.”
그렇게 말하는 로레이나의 볼에도 홍조가 살짝 들어가 있었다.
아무래도 저 ‘누나’라는 호칭이 제대로 먹혀들어 간 것 같았다.
생각보다 빨리 떨어진 허락에 레오나드의 얼굴이 누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제럴드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난 살았어!
“단, 그냥은 안 돼요. 잠깐 대화를 해봤을 뿐 젠은 오늘 처음 보는 아이니까요. 저도 나름의 대비가 필요하지 않겠어요?”
“예. 어떤 걸 원하십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 든 안도감에 제럴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곧 기다렸다는 듯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저랑 계약서 하나만 작성해 주셔야겠어요.”
“……무슨?”
“종이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제럴드가 시종을 향해 눈짓했다.
잠시 후 종이를 받아 뭔가를 적던 로레이나는 방긋 웃으며 다시 그 종이를 내밀었다.
“내용 확인해 주세요.”
계약서라는 제목이 붙은 종이에는 젠이 사생아라는 내용만 쏙 뺀 채로 지금 주고받은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었다.
헨티슨 남작가에서 보낸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시 모든 책임은 헨티슨 남작가에서 진다는 조항도 포함해서.
그 와중에 계약서 형식은 다 갖춘 점이 정말 기가 막혔다.
이 아가씨, 정말 열네 살이 맞는 걸까? 왜 계약서 쓰는 게 능숙한 거 같지?
“직인 찍어 주실 거죠?”
밝게 웃으며 하는 말에 제럴드는 눈물을 훔치며 직인을 가지고 왔다.
……진짜 만만치 않은 아가씨였다.
* * *
“그럼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럴드가 고개를 숙이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 후련하다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제정신이 돌아왔다.
누군가가 찬물을 한 바가지 가져와 부은 느낌이었다.
‘……나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없었다. 나는 내 손으로 계약서를 작성했고 직접 서명도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젠 앞에서 젠을 맡겠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지.’
안 그래도 상처가 많은 아이인데 한 번 더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다 내 잘못이다. 그놈의 누나 소리에 홀라당 넘어가 가지고.
‘어쩔 수 없잖아. 솔직히 너무 귀여웠는걸.’
예전부터 동생 하나 있는 것이 소원이었단 말이다. 그리고 젠을 보면 자꾸 예전 내 모습이 생각이 났다.
젠을 맡기로 한 것이 동정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이 아이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나도 갑자기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 하나 살기도 바쁜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뭐. 계속 저택 안에만 있을 텐데 친구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어차피 계속 맡아 주는 것도 아니니 괜찮을 것이었다.
나는 지난 일을 후회하는 대신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갈까?”
방긋 웃으며 말을 건네자 젠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표정을 살폈다.
어쩐지 미술품이 된 느낌이라 기분이 조금 이상했지만, 안 좋은 쪽은 아니었다.
계속 지켜본 결과, 젠은 그냥 내 얼굴에 흥미 있는 것뿐인 것 같았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젠에게 도움이 된다면야 나쁘지 않지.
‘꼭 내가 표정 변화가 있을 때만 저런 식으로 쳐다보는 것 같은데.’
생각하니까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무뚝뚝한 얼굴인데 지금은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 역시 귀여운 게 최고다.
그렇게 나는 동생 하나를 얻은 채 헨티슨 남작저를 벗어났다.
예상치 못한 식구가 생기기는 했지만 절대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젠을 돌봐 주는 대가로 제럴드는 그에 맞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조금 과분한 보상을 해 주었으니까.
‘설마 기사와 사용인들을 이렇게 많이 붙여 줄 줄은 몰랐는데.’
안 그래도 메리가 일손이 부족하다고 투덜거렸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약속했던 금전적인 보상도 해 주었으니 당분간 저택 사람들 월급도 올려 줄 수 있겠네.
“역시 돈이 좋긴 좋다니까…….”
“돈이 좋아?”
아, 깜짝이야. 이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나 젠이랑 같이 가는 중이었지. 하필 들어도 저런 말을 듣냐.
혹시 방금 그 발언이 동심을 파괴할까 걱정이 되었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빠르게 덧붙였다.
“음,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돈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돈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그럼 싫어해?”
“……아니.”
이어지는 말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거짓말은 못 하겠다. 솔직히 돈을 누가 싫어하겠어?
잠시 내가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있던 젠이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돈을……, 아니, 품 안에서 작은 노트 하나를 꺼내었다.
돈이라니. 미쳤나 봐. 저기서 돈이 왜 나와.
요새 첫 번째 꿈이 위태롭다 보니 예민한 모양이다. 자중해야지.
“그 밖에 다른 거는?”
“어?”
“다른 거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 없어?”
젠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느새 손에 펜까지 쥐어져 있는 것이 꼭 나를 취재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아니, 잠깐. 혹시 저 노트에 방금 내가 돈이 좋다고 한 말이 적혀 있는 건가?
“젠, 그건 왜 적는 거야?”
“나중에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혹시 잊어버릴까 봐 적어 놓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왜 필요한데?
어린아이를 상대로 이렇게 꼬치꼬치 묻는 것이 좀 웃겨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지했다.
‘저 노트가 나중에 내가 죽게 되는 원인이 될지도 모르는 거잖아?’
혹시 알아? 아멜리오 영애가 돈 좋아한다는 말만 보고 부자인 줄 알고 날 노릴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짜로 걱정이 되었다.
큰일 났다. 방금까지는 그래도 반쯤은 장난이었는데 진심이 되어 버렸어.
“젠, 사실 나 돈 안 좋아해. 그러니까 그거 지우고 다른 거 써 줘.”
“안 좋아한다고? 하지만 계약서에 분명…….”
“응,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실 싫어해.”
내 말에 잠시 젠이 미심쩍다는 시선을 보냈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인 건 알지만 그렇게 볼 것까진 없잖아.
“그럼 뭘 좋아하는데?”
“따뜻한 곳? 추운 건 딱 질색이야.”
“왜? 특별한 이유가 있어?”
“안 좋은 기억이 좀 있거든. 그래서 다락방 같은 곳은 아예 안 올라가.”
특히 아멜리오 백작가 다락방은 더더욱.
거기는 난방이 잘 안 되고 좁아서 꼭 이전 세계에서 살았던 집이 생각난단 말이야.
“그리고?”
“음……, 책?”
“…….”
왜 이래. 그 표정 뭐야. 나 진짜 책 좋아하는 편이라고. 저택에 있는 것도 다 읽어서 더 읽을 것도 없단 말이다.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일부러 눈을 또렷하게 떴다. 그것을 잠시 물끄러미 보던 젠이 뭔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황궁에 도서관이라도 새로 지어 줘야 하나…….”
“뭐라고?”
제대로 듣지 못한 탓에 물었으나 젠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뭐, 그래.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겠지. 그럼 이 문제는 이제 됐고.
“젠,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게 있는데.”
“뭔데?”
“왜 이제는 누나라고 안 불러 줘?”
“…….”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정색할 건 없지 않아?
‘진짜 친해지기 어렵네.’
아까 그게 연기였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 연기를 할 만큼 나랑 가고 싶었다는 뜻이니 별로 기분 나쁘지도 않았고. 그보다는 다른 게 더 신경이 쓰였다.
젠은 자기 나이에 맞지 않는 표정을 짓고는 했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아까는 진짜 귀여웠는데.’
그쪽이 젠에게도 훨씬 잘 어울렸다. 물론 내 사심이 아주 많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노트에 뭔가 적고 있는 젠을 조용히 살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젠은 말하는 와중에도 이쪽에 시선 한번을 주지 않았다.
‘남작가에서 쭉 이렇게 살았던 걸까.’
존재를 숨기고 살아야 했을 테니 마음껏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조금 아팠다.
저 예쁜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젠.”
“응.”
“잠깐 나 좀 봐 봐.”
그 말에 빠르게 움직이던 젠의 손이 멈추었다. 나와 대화하는 내내 줄곧 아래를 향해 있던 고개 역시 들어 올려졌다.
곧이어 마주친 시선에 나는 살짝 웃어 주었다.
“드디어 이쪽을 보네.”
그 말에 젠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 잠깐 사이에도 계속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록하는 습관이 있는 건 참 좋은데 말이야.”
내 말을 받아 적으려는 듯 젠의 손이 다시금 움직였다.
또다시 노트 쪽으로 향하는 시선에 나는 젠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곧 보드라운 뺨이 손에 닿았다.
“우리 얼굴 좀 보고 대화하는 게 어떨까?”
“아…….”
“너 내 얼굴 좋아하잖아.”
“……뭐?”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젠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귀 끝부분부터 붉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한번 놀려본 건데, 우와. 생각보다 엄청난 반응인걸.
“내, 내가 왜?”
“아니었어? 난 또 빤히 쳐다보길래 내 얼굴 좋아해서 그러는 줄 알았지.”
“그건!”
젠이 내가 앉아 있는 맞은편으로 튀어올 기세로 몸을 일으켰다.
순간,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로 들어가는 길이었던지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마차 한가운데서 휘청거리는 젠의 어깨를 재빨리 붙잡아 끌었다. 애초부터 젠을 잡고 있었기에 내 쪽으로 당기기는 쉬웠다.
휴, 큰일 날 뻔했네.
“괜찮아?”
내 품 안에 안정적으로 안착한 젠을 보며 물었다.
분명히 잘 받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젠?”
“…….”
내 부름에 젠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정수리 부분만 보고 있는데도 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양쪽 귀가 불에 타오를 듯 달아오르고 있었으니까.
은근히 부끄러움이 많구나. 귀여워라.
“……내려 줘.”
내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조용히 한숨을 내뱉는 모습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젠을 꼭 껴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젠을 데려오길 잘한 것 같다. 어쩜 이렇게 귀엽지.
“젠.”
“…….”
“나 또 좋아하는 거 있는데, 안 들어 줄 거야?”
그 말에 젠이 눈이 세모꼴이 된 채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제야 젠의 눈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냥 보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예뻐서 손가락으로 살짝 젠의 눈가를 매만졌다.
“이거야, 내가 좋아하는 거.”
“……뭐?”
“네 눈 말이야. 이렇게 예쁜데 왜 그렇게 안 보여 주려고 해?”
젠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랗게 뜨였다. 마치 처음 듣는 말인 것처럼.
세상에. 남작가에서 도대체 어떤 취급을 받은 거야. 계속 노트를 들고 다니는 것도 가정환경의 영향일 것이 분명했다.
“젠, 앞으로 나랑 있을 때는 노트를 내려놓고 이야기하자.”
“…….”
“난 네가 나랑 눈을 마주하며 이야기해 주는 것이 좋아.”
젠은 그 말에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젠이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안 돼. 혹시라도 잊어버리는 게 있으면…….”
“그럼 나한테 말해. 내가 다 말해 줄게.”
“…….”
“네가 보지 못한 것까지 전부, 다.”
멍하니 나를 보는 젠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약속이야.”
가만히 있는 젠의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었다. 이 정도면 젠에게 확신을 주었으려나.
“나 기억력 하나는 끝내주게 좋거든. 알지? 나 하프 엘프인 거.”
잠시 머뭇거리던 젠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 아무래도 나 이쪽에 소질 있나 봐.’
다년간의 아르바이트 생활이 헛된 것이 아니었어. 지금이라도 내가 바른길로 인도해 줘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젠을 품 안에서 놓아 주었다. 예상대로 젠은 후다닥 맞은편으로 달아났다.
그게 귀여워서 난 또 웃음을 터뜨렸다. 젠이 다시 화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는 했으나 괜찮았다.
노트만 보던 눈이 오로지 나만을 담고 있었으니까.
그래,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 사이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비쳤다. 마차는 어느새 아멜리오 백작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