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아가씨…….”
“…….”
“아가씨, 일어나세요!”
음, 이 목소리는 메리인가. 그럼 조금만 더 자야지.
“어서 일어나세요! 젠 도련님은 벌써 일어나셨다고요.”
“뭐?”
그 말에 더 늘어져 있으려던 것도 잊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건 처음부터 말해 줬어야지!
“언제? 언제 일어났는데?”
“30분쯤 전이요.”
안 돼. 내가 바른길로 인도해 주기로 해 놓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나는 재빨리 씻은 뒤 메리가 준비해 준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실내용인데도 입기 복잡한 드레스를 다 입고 나니 메리가 머리를 해야 한다며 자신의 앞에 앉혔다.
……아, 벌써 피곤하다. 젠만 아니라면 그냥 잠옷 입고 돌아다녔을 텐데. 물론 길버트와 메리가 난리 치겠지만.
“메리, 좋은 본보기가 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거 같아.”
“제가 솔직하게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뭔데?”
불안하긴 하지만 궁금하니까 일단 들어 봐야지.
“제가 보기에 아가씨는 좋은 본보기가 아니라 그냥 젠 도련님을 따라가려 애쓰고 계신 것 같아요.”
“…….”
“아가씨가 굳이 이러지 않으셔도 도련님은 이미 아주 바람직한 생활을 하고 계시던데요.”
……그래, 인정한다. 아멜리오 백작가에 오고 일주일을 지켜본 결과, 젠은 이곳에 온 게 처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잘 적응해가고 있었다.
식사는 나보다 깔끔하게 했고 내가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젠은 항상 먼저 깨어 있었다. 잠을 자기는 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심지어 공부도 딱히 내가 가르쳐 줄 것이 없었다.
최근 길버트에게 영지 경영 등 후계자가 갖춰야 할 것들을 배우고 있는 터라 어린아이 선생님으로 모자라지는 않았을 텐데도.
“물론 아가씨께 배울 점은 있어요.”
“정말?”
메리가 머리를 반묶음으로 해 주고는 다 되었다며 나를 거울 앞에 세웠다. 좋아. 오늘도 완벽하다.
“느긋하신 점?”
“……혹시 욕이야, 그거?”
“아니요! 정말로요. 젠 도련님은 가끔 왜 저렇게까지 하시나 싶을 정도로 치열하게 움직이실 때가 있거든요. 아직 어리신데 조금만 여유를 가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여유라.”
“네, 젠 도련님은 한창 뛰어다닐 나이잖아요.”
하긴 젠이 마음껏 노는 모습을 보지 못하기는 했다.
매일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나랑 대화하는 게 끝이니까.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에 놀 거리가 부족한가?”
“물론입니다.”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을 알리며 방으로 들어서던 길버트가 메리 대신 대답했다.
마치 이 이야기가 나오기만을 기다린 사람 같은 말투였다.
“어린아이가 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죠. 젠 도련님도 그걸 아시는지 아가씨와 대화할 때를 제외하고는 서재에서 책만 보시고요.”
……그래, 맞다. 그랬었지. 길버트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자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안 되겠다. 놀 거리가 없다면 찾아 나서야지.
어른스러운 게 젠의 장점이긴 하지만 때로는 나이에 맞게 놀기도 해야 한다.
어린애라면 어린애답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 그 나이에만 쌓을 수 있는 추억이라는 것도 있는 거니까.
“근처에서 열리는 축제 같은 거 없어? 여기 말고 영지 밖에서 말이야.”
“하나 있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 젠 도련님께 알맞은 곳은 아니라…….”
“뭔데?”
잠시 망설이던 길버트가 입을 열었다.
“크루시아 축제입니다.”
“……크루시아?”
깜짝이야. 여기서 갑자기 원작 소설 제목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네.
“무슨 축제인데?”
“아가씨도 아실 겁니다. 크루시아의 꽃말이 뭔지 아시죠?”
물론이다. 저택 서재에서 읽었던 책 중에 꽃말에 대한 것도 있었으니까.
500년도 넘게 산 엘프였다던 백작 부인의 영향인지 저택 서재에는 희귀한 자료가 많았다.
빙의되고 며칠 동안은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을 만큼. 어디 보자. 크루시아 꽃말이…….
“변함없는 사랑이잖아.”
말을 내뱉는 순간 멈칫했다. 아, 설마.
“혹시 연인들을 위한 축제야?”
“네.”
듣자마자 욕이 절로 나왔다. 아. 하나 있는 축제가 왜 그 모양이람.
“그래도 축제인데 어린아이가 즐길 수 있는 게 하나는 있지 않을까?”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그 축제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소원 나무’라는 것인데 사랑에 관련된 것 외에 다른 소원을 적기도 하니까요.”
“소원을 적어서 나무에 걸어 두는 거야?”
“맞습니다.”
으음, 소원 적기라. 젠 또래의 남자아이가 즐길 법한 놀이는 아니긴 한데.
“먹을 것도 많겠지?”
“그건 물론이죠. 축제니까요.”
“그럼 됐어.”
적어도 백작저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는 재미있겠지. 젠은 그동안 축제에 가지 못했을 테니 좋은 경험이 될 테고.
“메리.”
“네, 아가씨. 외출 준비를 도와 드릴까요?”
“아니.”
그렇게 사람 많은 곳에 내가 갈 수는 없지. 딱 보기에도 위험하잖아.
“젠 데리고 축제 다녀와. 돈은 충분히 챙겨 줄 테니까.”
“……네?”
내 말에 메리의 얼굴이 못 들을 것이라도 들었다는 양 새하얗게 질렸다. 옆에 서 있는 길버트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왜 저래?
“설마 젠 도련님과 저, 이렇게 둘이 다녀오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맞아. 좀 힘들 것 같으면 길버트나 다른 사람들도 같이 데리고 나가도 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메리가 고개를 숙여 발끝을 바라보며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뭐야, 뭐가 문제인데.
“아가씨 정말 모르세요?”
“뭔데 그래.”
“젠 도련님이 아가씨 외에 다른 사람과는 한마디도 안 하시는 거요.”
뭐시라……? 매일 자기 전에 인사하러 오는 젠이?
“어쩌다 대화하게 되었을 때도 눈을 안 마주치신다니까요. 계속 노트만 들여다보신다고요.”
그럴 리가 없다. 식사 중에도 나와 눈을 마주하려 애쓰는데. 너무 귀여워서 내가 일기에도 적어 놨다고.
“젠 도련님은 아가씨가 곁에 없으면 잘 웃지도 않으세요. 아가씨가 같이 안 가시면 분명 축제도 잘 즐기시지 못할걸요.”
“…….”
“저택 사람 중 누가 가도 아마 마찬가지일 거예요.”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데. 젠이 밝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잘 대해 준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몰랐다.
이래서야 내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잖아.
“……어쩔 수 없지.”
젠을 데리고 온 것은 나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이 어떻든 간에 내가 책임을 져야지.
“메리, 나도 같이 갈 테니까 외출 준비 좀 도와줘.”
“네! 젠 도련님께도 말씀드릴까요?”
“응, 근데 갈 거냐고 먼저 물어봐. 가기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알겠어요.”
메리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길버트 역시 마차를 준비해 놓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아, 맞다. 까먹을 뻔했네.
“기사들도 데리고 나갈 거니까. 준비하라고 해 줘.”
“몇 분 정도면 될까요?”
“되도록 많이. 백작저 보안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 인원으로 준비해 줘.”
“……네?”
나는 ‘겨우 축제 한번 가는데?’라는 얼굴로 이쪽을 보는 길버트를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축제 가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항상 만반의 대비를 해야지.
* * *
“와, 너무 멋져요!”
축제에 도착하자마자 메리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눈을 빛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놀랐다.
‘생각보다 잘 꾸며져 있네.’
사실 크루시아 꽃이 화려하게 생긴 편은 아니라 그리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젠을 데리고 오기에 나쁘지 않은 축제였다.
“젠은 어때?”
메리와 마찬가지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가며 축제를 구경하고 있는 젠을 보며 물었다.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봐 손은 꼭 잡은 채였다.
“어? 뭐라고?”
“어떠냐고.”
축제 멋지지? 여기 내가 오자고 한 거야. 어쩐지 뿌듯한 기분에 미소 짓는 나를 빤히 보던 젠이 입을 열었다.
“예뻐.”
……응?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젠이 살짝 발을 들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너 예쁘다고.”
“…….”
“됐지?”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이나 할 법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젠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나는 제자리에 굳은 채로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뭐지? 저 얼굴에 저런 대사라니. 말할 때 사람 눈 빤히 보면서 말하는 건 누가 가르쳐 준 거야, 도대체.
‘……나구나.’
그것을 깨달은 즉시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젠을 엄청난 아이로 만들어 버린 거 아닐까.
미래에 짝이 누가 될지 심히 궁금해지는…….
“앗.”
“아, 죄송해요.”
잠시 젠이 연애하는 모습을 상상하던 순간,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해 옆 사람과 부딪혔다.
혹시 다친 건 아닌지 확인하려 고개를 들었는데.
……어라?
“……모레트 영애?”
내 부름에 부딪힌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내 얼굴을 확인한 소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멜리오 영애?”
역시나. 레이첼 모레트였다.
* * *
나는 내 옆쪽에서 소원을 쓸 종이를 고르고 있는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 옆에 있는 사람을.
‘모레트 후작가 영지에 황태자가 온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레이첼은 축제의 취지에 걸맞게 황태자와 데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황태자는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을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은색 머리카락 하며 청초한 이미지와 매우 잘 어울리는 녹색 눈동자까지.
웃으면 햇살 같은 따스한 느낌이 날 것 같은 사람이었다.
‘진짜 잘생겼네. 괜히 사람들이 황태자 외모 가지고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구나.’
덕분에 눈은 호강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낭패였다.
그 유명한 하프 엘프와 황태자라니. 안 그래도 이쪽을 보던 시선이 배가 되었으니까.
과도한 관심은 사양합니다. 눈에 덜 띄려고 일부러 기사들도 평상복 입으라고 했다고요.
‘이 소설은 왜 이렇게 엑스트라들이 잘생겼어?’
내 옆에서 오만상 다 찌푸리고 있는 젠도 그렇고. 아, 잠깐. 얘는 왜 또 기분이 안 좋아졌지.
아이 돌보기 힘들다, 정말.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저 사람 혹시 황태자야?”
적개심이 가득 담긴 표정에 의아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젠이 내 드레스 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하려…….
“나 저 사람 싫어.”
“…….”
“황태자 싫다고.”
……혹시 누가 들은 건 아니겠지? 레이첼의 일행 중에 이 말을 들은 사람이 있을까 봐 간담이 서늘했다.
불안감에 재빨리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으나 주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다행히도 소원 나무에 정신이 팔린 탓에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젠. 우리랑 대화할 일은 없을 테니까.”
나도 여기서 더 관심이 쏠리는 건 싫고.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허리를 숙여 젠의 귓가에 속삭였다. 물론 이 생각은 내 오만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나름대로 유명인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는데.
“안녕하십니까, 아멜리오 영애.”
봄 햇살 같은 나긋한 미성이었다. 나무에 소원을 적은 쪽지를 걸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뒤를 돌 만큼.
눈이 마주치자 싱그러운 녹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와, 레이첼이 왜 그렇게까지 난리 쳤는지 알겠네. 이런 남자친구가 준 목걸이라면 나라도 그랬을지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젠에게 한 짓을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안녕하세요, 황…….”
“에녹입니다.”
황태자, 아니, 에녹이 내 말을 황급히 끊었다.
“에녹이라고 불러 주세요. 이런 곳까지 와서 황태자 대접을 받고 싶지는 않아서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존재감을 드러내고 계신대요.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옷만 평상복이지 다 황실 기사들인 거 티 난다고요.
먹을 것을 사느라 메리와 길버트가 자리를 비웠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황태자 전하를 뵙는다며 난리를 쳤을 게 분명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는 하는 건지, 에녹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네요. 아까 모레트 영애가 인사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요?”
“음, 그……, 뭐랄까. 사실 그동안 저한테는 영애가 상상의 동물 같은 느낌이어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에 가만히 있자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던 에녹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미안해요. 제가 말하려던 건 그게 아니라……. 상상의 동물보다는 좀 더 예쁜…….”
한참을 횡설수설하던 에녹은 곧 알맞은 단어를 찾는 것을 포기했는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속상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기까지 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다.’
미치겠다, 진짜. 왜 이렇게 귀여운 애들이 많은 거야? 황태자만 아니었더라면 동생 삼을 뻔했다.
“아니에요.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사실 상상의 동물이라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니죠. 이제 남은 이종족은 저뿐이니까.”
“그래도…….”
이러다 에녹이 땅을 파고 들어갈 것 같아서 재빨리 말을 돌렸다.
소원 나무 앞이라 마침 적당한 대화거리도 있었고.
“전하, 아니, 에녹 님은 소원 뭐 적으셨어요?”
“저는…….”
잠시 주위를 살피던 에녹이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황궁에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적었습니다.”
“……예?”
데이트 도중에 집에 가고 싶다고? 나는 황당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 에녹을 바라보았다.
……이거 생긴 거와 달리 아주 몹쓸 인간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