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잠시 뒤 기사들이 재료를 한 아름 들고 돌아왔다.
가루를 상처 위에 뿌리고 꽃잎은 살짝 으깨서 얹어 두었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독을 뺄 만큼 뺐으니 이제 괜찮을……. 앗.”
기사들에게 안심하라 말하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급격한 현기증이 일었다.
아무리 안 죽는다고 해도 이 정도까지 독을 빨아낸 건 조금 심했나.
“아가씨!”
저 멀리서 메리가 울먹이며 달려왔다.
품에 한 아름 들려있던 먹을거리가 바닥에 형편없이 나뒹굴었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메리의 신원을 파악하지 못했기에 그녀를 막으려던 황실 기사가 괜찮다는 내 말에 곧바로 뒤로 물러났다.
내가 빨리 말했으니 망정이지 방금 큰일 날 뻔하셨어요. 메리가 당신 정강이 걷어차려고 하는 거 내가 봤거든.
“아, 아가씨 입술이!”
다급히 달려온 메리가 양손으로 내 볼을 감쌌다. 이어서 달려온 길버트도 연신 눈물을 훔쳤다.
다들 이렇게 기겁할 정도면 진짜 심각하긴 한 모양이다.
이러다 나 거울 보고 기절하는 거 아니야?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신 거예요…….”
내 앞에서 울지 않으려 하던 메리가 기어코 눈물을 쏟아 내었다. 나라고 좋아서 이런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남은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어.’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미처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한참을 빨아내고 나니 알겠다.
화살에 묻어있던 건 맹독이었다.
치료를 제시간에 잘 한다고 해도 그로 인해 생긴 흔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아주 독한 독.
에녹 역시 상처는 아물겠지만, 그 부위에 푸른 흔적이 남을 것이었다.
‘아마 내 입술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방금 한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만약 나 때문에 에녹이 잘못되었다면 분명 더 괴로웠을 테니까.
“메리, 나 할 만큼 했지?”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물론이죠…….”
“나 이렇게 생겼어도 계속 같이 있어 줄 거지?”
“아까부터 자꾸 왜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당연하죠!”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나는 작게 웃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거면 되었지, 뭐. 나는 메리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고개를 돌렸다.
먼발치에서 젠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젠…….”
그러나 내 부름이 닿기도 전, 젠은 고개를 돌려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젠이 저러는 건 조금 상처인데.
……그렇게 흉한가?
* * *
잠시 뒤 도착한 의사는 에녹을 살피더니 내가 잘 조치했다고 말해 주었다.
솔직히 불안한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닌데, 정말 다행이었다.
“놀랍습니다. 그 두 가지가 도움이 된다는 걸 어떻게 아셨죠?”
“책에서 읽었어요. 집에 관련 서적이 있었거든요.”
“그렇다고 해도 약초 이름이 다 비슷해서 외우기 쉽지 않았을 텐데…….”
거기까지 말하던 의사는 내 머리칼을 보더니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유명한 하프 엘프라는 걸 이제야 안 모양이었다. 엘프 기억력 좋은 거야 잘 알려진 사실이니 굳이 설명할 필요 없겠지.
“그런데 이건 구하기도 힘든 독인데 어쩌다…….”
나와 의사가 대화하는 것을 지켜보던 황실 기사가 그 말에 입을 열었다.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네. 화살을 쏜 남자를 아무리 추궁해도 입을 열지 않더군. 에녹 님을 노린 것이라는 말 밖에는.”
원래부터 에녹을 노린 거였다고? 예상 밖의 소식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럼 내 쪽으로 쏜 화살이 실수였던 거구나.
‘이게 원작대로 간 거라면, 내가 아니더라도 에녹은 원래부터 살 운명이었던 거네.’
굳이 내가 나설 필요 없었다는 말이었으나 아쉽다거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나 때문이 아니었다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을 뿐.
원체 운이 없던 인생을 살다 보니 이 정도야 이제는 면역이 되었다. 이것보다야 젠이 문제지.
“길버트, 젠 어디로 갔는지 찾았어?”
“근처에 구경할 것이 있으신 것 같더라고요. 여기 있어 봤자 좋은 광경은 못 보실 테니 그냥 보내 드렸습니다.”
“젠 혼자서? 너무 위험하잖아.”
“헨티슨 남작가에서 온 기사 두 분이 따라갔으니 아마 괜찮으실 거예요.”
“그런 거면 나한테 말하고 가지. 나도 갈…….”
무심코 자리를 벗어나려다가 지금 내 상태를 떠올리고는 멈칫했다.
……그냥 있자. 괜찮겠지. 내 얼굴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으니 가 봤자 싫어할 거다.
그사이 에녹의 치료를 끝낸 것인지 의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빨리 조치해서 다행입니다.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대화하던 황실 기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긴, 눈앞에서 황태자가 암살을 당할 뻔했다는데 침착한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 그럼 이제는 별 이상이 없으신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아직 몸 안에 독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 당분간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상처가 아물 시간도 필요하고요.”
“혹시 마차를 타는 건…….”
“장거리는 안 됩니다.”
의사가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는 말이긴 했으나 황실 기사들에게는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그 말은 에녹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황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꼼짝없이 묶여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으니까.
황궁까지는 아무리 빨리 가도 2, 3일은 걸릴 테니 지금 가는 것은 에녹의 몸에 상당한 무리가 갈 것이었다.
“아, 혹시 집이 이 근처가 아니라 그러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저희 의원에 빈방이 하나 있는데…….”
“……괜찮네.”
황실 기사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에녹은 이 나라의 황태자다.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고 한들 변두리에 있는 의원에 황태자를 모실 수는 없겠지.
기사들도 같이 머물러야 하는데 저 인원이 한 방에 다 들어갈 수도 없을 테고.
‘이 근처에 에녹이 머물기에 적합한 곳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든 순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레이첼에게 시선이 닿았다.
맞다. 모레트 후작가가 있었지?
그때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레이첼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 저희 영지에서 모실게요. 어차피 지, 지금까지 계셨잖아요!”
그래, 모레트 후작가라면 황제도 안심할 거다. 애초에 레이첼을 황태자비 감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잘 되었다. 그럼 나는 이제 신경 안 써도 될…….
“안 됩니다.”
응? 왜 안 되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싸늘한 얼굴로 말을 뱉은 기사 하나가 레이첼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에 레이첼이 잔뜩 몸을 움츠렸다.
단순히 겁에 질려서 그렇다고 보기에는 뭔가 기사가 화내는 이유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모레트 영애.”
“……네, 네?”
“오늘 축제에 온 사람 중 꽤 많은 이들이 에녹 님을 알아보더군요,”
“저, 그게…….”
“분명 에녹 님의 일정에 대해 함구해 달라는 말을 모레트 후작가에 전한 것 같은데. 아닙니까?”
가만히 기사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제야 상황이 이해되었다.
레이첼은 황실 측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에녹의 일정에 대해 발설했다.
그것도 사람이 많이 모인 파티장에서. 그런 상황에서 다시 모레트 후작가로 돌아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정보가 새어 나갈 줄 알고 그런 위험을 감수해. 그것도 에녹이 의식을 잃은 이 위급한 상황에.
“제, 제 잘못이에요! 그,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만…….”
“영애의 사정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영애의 부주의함 때문에 에녹 님께서 다치셨다는 사실이니까요.”
……우와, 센데? 바들바들 떠는 레이첼이 가엽지도 않은지 황실 기사가 차가운 말을 쏟아 내었다.
화난 건 알았지만 설마 저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비가 될지도 모르는 아가씨인데.
물론 레이첼이 파티장에서 에녹이 올 거라고 떠드는 건 나도 들었기에 편들어 줄 생각은 없다만.
‘아, 혹시 이번 일로 황태자비는 물 건너간 건가?’
레이첼의 운명이 어찌 되었든 간에 에녹이 여기 있는 황실 기사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에녹이 이 사람들에게 소중하다는 뜻이겠지. 기사들이 왜 그렇게 에녹에게 목을 매는지 이해가 갔다.
자기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날 밀어내려던 것만 보아도 평소에 에녹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을지 딱 보이니까.
“이 일에 대한 책임은 모레트 가에 묻도록 하겠습니다. 에녹 님을 그런 곳에 계시게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래,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 다른 적당한 곳을 찾아야겠지.
……아니, 잠깐만. 그런데 왜 다들 절 보시는 거죠?
“아멜리오 영애.”
아니야, 제발 아니라고 해 줘요. 난 내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바쁘다고요.
“실례가 안 된다면 아멜리오 백작가에 잠시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황실 기사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아. 불길한 예감은 어쩜 이렇게 딱 들어맞을까.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충분히 사례도 하겠습니다.”
……저 말은 안 들어주면 충분한 처벌이 있다는 뜻일까? 잠시 눈을 감고 에녹이 잘못되었을 경우를 상상해 보았다.
황제가 황태자를 매우 아낀다고 들었으니 그냥 벌로는 안 끝날지도. 그 생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 이렇게 데드 엔딩인 건가?’
온몸에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물론 에녹이 다친 것은 나 때문이 아니었고, 오히려 나는 그의 목숨을 구한 쪽이니 그런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괜히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어떤 이유든 간에 내가 죽는다는 건 사실이니까.
혹시 알아?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내 불운이 여기서도 작용할지.
“제발 부탁드립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 영애뿐입니다.”
황실 기사들이 일제히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신의 축복을 받은 이종족이라는 것과 독을 직접 빨아내면서까지 에녹을 살렸다는 사실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 듯싶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어마어마한 행적에 아차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고.
“……알겠어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혹시 몰라 헨티슨 가에서 한 장 더 작성해 둔 계약서였다. 주어만 쏙 뺀 채로.
“그럼, 여기에 서명만 해 주세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는 기사에게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상대는 황태자지만 알 게 뭐야.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난 내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고.
* * *
그렇게 나는 축제를 더 즐기지 못하고 아멜리오 백작가로 돌아왔다.
에녹이 그렇게 다쳤는데 거기 더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나저나 한번 외출할 때마다 식구가 늘어서 돌아오네.
“메리, 에녹 님이랑 기사님들 방은 다 배정해 드렸어?”
“네, 최대한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해 두었어요. 물론 기사님들이 에녹 님이 누워 계신 방을 밤새도록 지킨다고 하셔서 소용은 없겠지만요.”
메리가 우느라 팅팅 부은 눈을 깜빡이며 배시시 웃었다.
아무래도 메리는 아직 에녹의 정체에 대해 모르는 모양이었다.
……지금 여기서 에녹이 황태자라고 말하면 메리는 아마 기절하겠지?
기사들도 되도록 비밀로 해 달라고 했으니 당분간은 말하지 말자.
“난 이제 한숨 잘 테니까. 메리도 그만 쉬어.”
“……알겠어요, 아가씨. 필요하신 게 있으면 꼭 저 부르세요!”
몇 번이나 뒤를 돌아 나를 살피던 메리가 문을 살짝 닫고 나갔다.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지자 나는 이불 속을 더듬어 숨겨 둔 물건을 꺼내었다.
아까부터 가지고 있던 손거울이었다.
“진짜 심하긴 하네…….”
입술은 물론이고 입 주변까지 멍이라도 든 것처럼 푸르게 물이 들어 있었다.
‘……확실히 젠이 도망을 갈 만해.’
내 생각보다 얼굴이 더 심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에녹을 구한 일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조금……, 아니, 많이 속상하기도 했고. 이러고 밖을 돌아다닐 수는 있으려나.
“코 밑으로 천이라도 두르고 다닐까.”
그럴싸한 베일을 찾으면 괜찮을지도. 대충 어떤 느낌인지 보기 위해 침대 옆 탁자에 놓여 있는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손수건을 반으로 접은 뒤 그대로 코 아래쪽을 가려보았다.
‘대충 이런 느낌이려나.’
잠시 그러고 거울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메리인가?
“메리?”
꽤 크게 낸 목소리에도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침대 위에 달린 설렁줄을 당기려던 순간,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에 나는 서둘러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렸다.
아까 도망갔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이 모습도 그리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젠이구나. 어서 들어와.”
잠시 뒤 문이 끼이익 열리며 젠이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처럼 자기 전에 인사하러 온 모양이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보던 시선이 손수건을 두른 입 쪽에 꽂혔다.
“왜 그러고 있어?”
“……아, 이거?”
역시 손수건으로 이러고 있으니 신경 쓰이나?
하지만 내 얼굴 보고 도망친 애한테 그대로 민얼굴을 보여 줄 수는 없잖아.
……아, 그냥 자는 척할 걸 그랬다. 괜히 들어오라고 그랬어.
“아직 입가를 가릴 것을 준비하지 못해서 잠깐 이러고 있는 거야.”
“왜 입가를 가리는데?”
얘도 참. 왜 이렇게 당연한 걸 묻고 그러지. 아까 도망친 것이 미안해서 모르는 척하는 거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보기 흉하니까 그렇지. 너도 알잖아.”
“……누가 그래?”
설핏 웃으면서 뱉은 말에 젠이 미간을 찌푸렸다.
달이 은은하게 비추기 시작한 늦은 저녁, 어두운 방 안에서 붉은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누가 그런 말을 했냐고 묻잖아.”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