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젠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화가 난 것 같은 눈빛에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당연한 거니까.
“누가 뭐라고 말을 해서가 아니야, 젠.”
“그럼?”
“그냥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가리고 싶은 거야.”
중얼거리듯 말하며 손수건을 조금 더 들어 올렸다. 아까 손거울을 통해 본 내 모습이 생각나서.
“내가 보기에도 흉측하니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젠이 성큼성큼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뭐 하는 건가 싶어서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젠이 팔을 내 얼굴 쪽으로 뻗었다.
그것이 내가 들고 있는 손수건을 내리기 위해서라는 것을 안 순간, 재빨리 몸을 물렸다.
“뭐, 뭐 하는 거야?”
“네 얼굴 보려고.”
……그걸 누가 모른대? 왜 그러냐는 걸 묻는 거잖아.
이런 내 생각을 눈치라도 챈 듯 젠이 조용히 덧붙였다.
“보여 줘.”
“……왜?”
“네가 말했잖아.”
잠시 뜸을 들이던 젠이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얼굴이었다.
“내가 네 얼굴을 좋아한다고.”
“아니, 그건…….”
그냥 네가 너무 귀여워서 놀리려고 그런 건데. 이런 식으로 나한테 써먹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고.
“……그런 식으로 한 말이…….”
하지만 이런 내 말은 젠에게 닿지 못했다.
아까 망설이던 기색은 어디로 간 것인지 젠이 제법 단호하기까지 한 얼굴로 말을 끊었으니까.
“네 말이 맞아.”
“…….”
“좋아해.”
주어 없는 말에 어쩐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당황해하고 있을 때 젠이 내 얼굴을 가린 손수건을 잡아 내렸다.
그 탓에 독으로 인해 파랗게 물든 입가가 밤공기에 노출되었다.
“하나도 안 흉측해.”
“그, 그…….”
“예뻐.”
이어지는 말에 결국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야?
애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난 그저 바른 아이로 자라길 바랐을 뿐인데.
이런 건 나중에 네 짝한테나 써먹으라고!
“젠, 그렇게 말해 주는 건 고마운데, 정말 무섭지 않아?”
“무서워?”
“그, 아까 내 얼굴 보고 도망간 거 아닌가, 해서…….”
그에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젠이 작게 탄성을 뱉었다.
“아, 그때 도망간 게 아니라 축제에서 제럴드…… 형을 본 것 같아서 그런 건데.”
“그래?”
뭐야, 내 얼굴 보고 도망간 것이 아니었구나. 계속 신경 쓰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괜히 의심해 버렸네. 미안해라.
“다행이다. 조금 속상할 뻔했거든.”
“뭐가?”
“네가 이제는 내 얼굴 안 보겠다고 할까 봐.”
가만히 말을 듣던 젠이 내가 앉아 있는 침대 왼쪽에 걸터앉았다.
그 무게감으로 인해 침대 한쪽이 잠시 출렁거렸다.
“그런 생각은 안 했어.”
“알아.”
“진짜야. 절대로 안 했어.”
고집 센 어린아이 같은 말투에 푸스스 웃음이 터졌다. 이러니까 자기 나이답네.
웃음을 몰래 삼키는 나를 잠시 미심쩍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젠이 빼앗은 손수건을 돌려주었다.
나는 손수건을 잠시 바라보다가 본래 있던 곳에 가지런히 올려 두었다. 이제 가지고 있을 필요 없으니까.
이런 내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젠이 불쑥 물었다.
“너는 괜찮아?”
“뭐가?”
“그…… 입술 말이야.”
“네가 괜찮다며? 그리고 예쁘다고 해 줬잖아.”
걱정 어린 시선에 나는 활짝 웃어 주었다. 방금까지는 울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도 괜찮아. 속상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주위 사람들이 괜찮다고 하면 나도 상관없어. 어차피 밖에 많이 돌아다닐 것도 아니고.”
기분이 이렇게까지 괜찮아진 건 다 젠 덕분이겠지.
어쩐지 간질간질한 느낌에 손을 들어 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 손가락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광경이 제법 보기 좋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랑 많이 놀아 줘야 한다?”
“……그래.”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잠시 젠과 실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아직 젠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오늘은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너무 피곤했으니까.
얼핏 귓가에 잘 자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 * *
재잘재잘 떠들던 로레이나가 잠이 들었다.
자신을 올곧이 바라보던 푸른 눈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레오나드가 고개를 돌렸다.
“제럴드.”
그 작은 부름에 창문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쳤다. 연거푸 다리를 주무르는 것을 보아하니 꽤 오래 있었던 모양이었다.
“기척 숨기는 법 좀 더 익혀. 이러다 들키겠어.”
“레오나드 님이 아니라면 아마 아무도 눈치 못 챘을걸요? 아멜리오 영애도 전혀 모르는 것 같던데요.”
제럴드가 나름 항변했지만 레오나드는 이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늘 있었던 일이었다.
“알아보라고 한 일은 어떻게 됐어?”
“……그게.”
잠시 뜸을 들이던 제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사해 본 결과 황태자를 공격한 건 저희 쪽 사람이 맞았습니다. 레오나드 님께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 같더군요.”
“우발적이라고 하기엔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이 아니던데.”
“……비밀 기지 물건에 손을 댄 것 같습니다.”
어이없는 상황에 레오나드가 조용히 혀를 찼다.
레오나드는 에녹에게 활을 쐈다는 남자를 본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에 바로 제럴드를 찾아갔다.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지만, 혼자서는 생김새만으로 사람을 구별할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로레이나가 눈치채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크루시아 축제가 열리는 곳부터 헨티슨 남작가까지는 본체화해서 날아가면 금방이었으니.
께름칙한 기분에 제럴드에게 남자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지만 설마 자신의 사람이었을 줄은 몰랐다.
상상치도 못한 상황에 연거푸 한숨만 나왔다.
“일단 혼자 도망친 것으로 위장한 다음 빼내 오기는 했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레오나드의 시선이 잠시 곤히 잠들어 있는 로레이나에게로 향했다. 잘 자고 있나 살피던 시선이 그녀의 입가로 내려왔다.
오늘 그 남자만 아니었더라면 예쁜 붉은빛을 유지했을 입술이었다.
만약 로레이나가 하프 엘프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입술만으로 끝나지 않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붉은 눈이 잔뜩 가라앉았다. 다시금 제럴드를 향한 눈이 서늘한 빛을 띠었다.
“……처리해.”
“예?”
“처리하라고 했다.”
로레이나의 영향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굳이 로레이나가 연관되어 있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레오나드가 해 나가야 하는 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다.
명령에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 부하는 필요 없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녀석 하나 때문에 나머지 전체가 위험해질 뻔했다. 제대로 고문이라도 해서 그놈이 비밀 기지에 대해 입을 열었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는 않겠지.”
“……맞는 말씀입니다.”
제럴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심이 과해서 그랬다는 것을 알지만 이렇게까지 해가 된다면 더는 함께할 수 없었다.
그냥 보내 주기에는 너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고.
“그럼 처리되는 대로 보고해서 올리겠습니다. 지금 대화 내용도 같이…….”
“아니, 지금 대화 내용은 필요 없어.”
레오나드가 고갯짓으로 로레이나를 가리켰다.
“같이 대화하지 않더라도 한 공간에 있기만 하면 그 순간의 기억은 잊히지 않는 모양이니까.”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자고 하신 거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그렇다는 건 로레이나만 옆에 있다면 레오나드는 아무런 문제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사람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거야 똑같겠지만 그거야 옆에서 누군가 말해 주면 그만인 일이 아닌가.
대화 내용을 적고 그걸 레오나드가 확인하고 나면 불태우는 일도 더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비밀 엄수가 필수인 이상 이는 번거롭고 위험한 일이었으니 지금 같은 상황은 엄청난 성과였다.
레오나드 역시 이를 모르지 않을 터였다.
“아멜리오 영애를 곁에 두실 겁니까?”
제럴드는 긍정의 답이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만큼 레오나드는 저주를 푸는데 열성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레오나드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한참이나 지나서 들려온 답 역시 애매했다.
“……허락해 준다면.”
평상시 레오나드의 모습을 생각하면 기함할 만한 일이었으나 제럴드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내색하지 않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레오나드를 모시던 자의 연륜이었다.
“아, 맞다. 제럴드, 남작에게 전해 줄 말이 있어.”
“무엇입니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 알 거야.”
레오나드가 얼마 전부터 살짝 욱신거리던 몸을 생각하며 덧붙였다.
“한 반년 정도?”
그 말에 제럴드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저 말이 가리키는 바는 딱 하나였다. 제럴드를 포함한 모두가 기다려 온 날이었으니까.
바로 레오나드가 성체가 되는 때.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말씀을 전하러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제럴드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제럴드가 무사히 저택을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레오나드 역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뒤를 돌았다.
그렇게 문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 순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로레이나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까 나누었던 대화도 함께.
‘속상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주위 사람들이 괜찮다고 하면 나도 상관없어.’
밝게 웃으며 말했지만 로레이나는 생각보다 더, 어쩌면 본인이 자각하는 것보다 많이 속상해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옆에 놓인 손거울이나 입가를 가리던 손수건만 보아도 바로 눈치챌 수 있는 것이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잠시 고민하던 레오나드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방법 때문에 다소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로레이나에게 이에 대한 허락을 구하기에는 너무 위험 부담이 많았다.
이 능력에 관해 설명하려면 일단 자신이 마지막 드래곤 황제 칼리드의 아들이라는 것부터 밝혀야 했으니.
로레이나에게 가까이 다가간 레오나드는 잠시 멈칫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
잠시 뒤 부드러운 촉감이 입에 닿았다. 그것이 로레이나의 입술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치료에 집중했다.
다행히도 생명의 기운이 로레이나에게 잘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생명의 신의 핏줄이라는 것이 이렇게까지 축복이라 여겨진 적은 없었는데. 온몸이 저릿한 정도로 강한 쾌감이 일었다.
잠시 뒤 레오나드가 입을 뗐을 때, 로레이나의 입술은 다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레오나드는 그것을 만족스럽게 보다가 웃었다.
부디 너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잘 자.”
귓가에 작게 속삭인 레오나드가 방을 벗어났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타고 울렸다.
어느 달빛이 완연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