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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0화 (10/144)

#10화

“세상에…….”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이게 혹시 꿈은 아닐까, 볼을 꼬집어 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게 진짜라고?

“입술이 원래대로 돌아왔어…….”

어제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푸른빛이던 입술이 생기 넘치는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건드려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만 같았다.

내가 신의 축복을 너무 얕봤던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잖아.

어떻게 그 심했던 상처가 하룻밤 잤다고 낫냐고.

“진짜 대박이잖아?”

원작에는 나오지 않아 잘 몰랐는데 이런 상처쯤은 이종족에게 거뜬한 모양이었다.

신의 축복 만세! 앞으로 열렬한 신자가 되겠습니다!

“……다행이다.”

인지하지 못했던 깊은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속상해하고 있었던 걸지도.

“아가씨, 오늘도 젠 도련님이 먼저 일어나셨…….”

평상시와 같이 나를 깨우러 들어오던 메리가 말을 잇지 못하고 멈칫했다.

내 치장을 돕기 위해 들고 온 물건들이 손에서 벗어나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메리는 그것들을 차마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가씨…… 입술이…….”

메리가 두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눈꼬리에 미처 흐르지 못한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어제와 다른 의미의 울먹임이었다. 그 모습이 고마워서 나는 싱긋 웃었다.

“좋은 아침이야, 메리.”

울먹이는 메리를 꼭 안아 준 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어쩐지 오늘 시작이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다니.

이제는 꽤 익숙해진 아멜리오 백작가의 아침 식사도 오늘따라 훨씬 맛있는 것 같았다.

한 그릇 더 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내 앞자리에 앉아 식사하던 젠이 불쑥 물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평상시처럼 나와 눈을 마주하려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응, 티나?”

“엄청. 아까부터 계속 실실 웃고 있잖아.”

“내가 그랬나?”

그렇게 말을 하는 와중에도 숨기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솔직히 이건 불가항력이다. 너무 기분이 좋은 걸 어떡해.

하마터면 묻힐 뻔했던 이 예쁜 외모가 기적적으로 돌아왔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

“내 입술 봤어? 말끔히 나은 거?”

“……봤지.”

젠이 짧게 대답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릇을 향해 재빨리 고개를 내렸다.

묘하게 허둥지둥하는 것을 보아하니 젠도 내 입술이 이렇게 빨리 나은 것에 놀란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젠이 어디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었겠어? 남자 주인공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 이종족은 나뿐인데.

아,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단 말이야.

“아무래도 엄청난 힘을 가진 누군가가 내 사정을 알고 도움을 준 게 아닌가 싶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옛날이야기 중에 그런 이야기도 있잖아. 생명의 신이 심성이 착한 인간의 불치병을 고쳐 주었다는 것 같은 거.”

“…….”

“진짜 생명의 신이 나를 도와준 건 아닐까?”

그 순간, 멀쩡히 식사하던 젠이 음식을 잘못 삼킨 모양인지 캑캑거렸다.

흐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나? 생각해 보니 내가 심성이 착하다고 돌려 말한 거나 다름없잖아.

……조금 민망하군.

“미안. 현실감이 없어서 그래. 신의 축복 때문인 건 아는데, 너무 감쪽같아서.”

지금 이 세계는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니 더욱 그랬다.

300년 전 레오나드에게 저주를 건 이사벨을 마지막으로 더는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가 없었으니까.

‘자신이 짝사랑하던 황제 칼리드가 다른 여자와 아이를 낳은 것을 참지 못해서 그런 저주를 날렸다고 했었지.’

이사벨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죽고 나면 레오나드의 저주를 풀어줄 사람이 없다는 걸.

그것이 레오나드가 오랜 시간 고통받았던 이유이자-.

원작이 시작되는 30년 뒤에 레오나드의 앞에 나타나는 셀리아가 여자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셀리아는 이사벨 이후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저주에 걸린 레오나드를 위해 딱 맞춰서 만들어진 구원자인 것처럼.

이 정도면 구원 서사가 참으로 완벽하다고 볼 수 있지. 역시 로맨스 판타지 소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야.

잠시 셀리아와 레오나드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던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셀리아의 모습을 그려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난 셀리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니까.’

아쉽게도, 원작에는 셀리아의 외양에 대한 묘사가 없었다. 아무래도 레오나드의 저주 때문인 것 같았다.

<크루시아>는 오로지 레오나드의 시점에서만 진행되니까.

‘그래도 얼굴을 못 보는 거지 다른 것들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머리색이라도 언급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참 불친절하다니까.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품에 몰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치 옆에서 보기라도 한 것처럼 레오나드의 심정이 세밀하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작이 아직 완결이 나지 않아 다음 편을 볼 수 없었던 것이 속상할 정도로 말이다.

뭐 그거야 데드 엔딩을 피하고 살아서 내가 직접 보면 되겠지.

“……나.”

지금쯤 레오나드는 어디에서 뭐 하고 있으려나. 제국 안에는 있을까?

“……이나.”

어디 있든지 간에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열심히 훈련하는 중이겠지?

“로레이나!”

아, 깜짝이야. 고개를 드니 젠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미안.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못 들었어. 왜?”

“……만약 진짜로 누군가가 도와준 거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글쎄…….”

정말 누가 나를 도와준 거라면…….

“솔직한 심정으로는 얼굴 붙잡고 뽀뽀도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젠의 얼굴이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

고작 뽀뽀 가지고 뭘 저렇게까지 부끄러워하고 그러지. 이럴 때 보면 젠도 완전히 어린애라니까.

‘물론 나도 사는 게 바빠서 연애할 틈은 없었다만.’

이번 생도 시한부 선고받은 덕택에 물 건너간 것 같고. 잠깐. 생각하니까 엄청 억울하잖아.

‘이렇게 태어나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

……두고 봐라. 죽을 고비만 넘기면 원작이 시작될 때부터 나도 연애 실컷 해야지.

“아가씨!”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젠을 놀리려던 순간, 저 멀리서부터 메리가 내 이름을 부르며 빠르게 달려왔다.

어찌나 빠른지 중간에 넘어질 뻔했을 정도였다.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급한 일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이야, 메리?”

숨이 찬 듯 잠시 허리를 굽히고 숨을 고르던 메리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내 예상대로 꽤 급한 일이었다.

“에녹 님이 깨어나셨어요!”

* * *

식사도 거의 마무리되었겠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에녹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젠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에녹이 젠에게 단단히 찍힌 모양이었다.

“지금 들어가도 될까요?”

방문 앞에 서서 묻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 에녹이 깨어났다고 하니 이제 좀 쉴 수 있겠네.

“예, 그런데 아직 온전한 정신은 아니신지라 조금 횡설수설하실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약 기운이 남아 있으니 당연히 그러시겠죠.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살짝 묵례한 후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곧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내가 말했지? 전하께 딱 어울리시는 분이라고.”

“하긴. 지금도 걱정되어서 오신 것 같긴 해.”

“어제 아무 망설임 없이 독 빨아내시는 거 봤어? 진짜 멋있었다니까. 우리도 그렇게는 못 할 텐데.”

“방금 보니까 입술도 다시 멀쩡해지신 것 같더라고. 진짜 대단하신 분이야.”

……저기 칭찬해 주는 건 고마운데. 그런 말은 문이 제대로 닫혔나 확인 좀 하고 해 주겠니?

더 듣고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기에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난 뒤 방 안에는 적막이 흘렀다. 내가 꽤 큰 소리를 내며 들어왔음에도 말이다.

에녹이 깨어났다고 해서 왔는데, 아닌가?

“전하.”

“…….”

“전하?”

꽤 큰 부름에도 에녹이 누워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침대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기사가 눈을 떴다고 했는데. 혹시 다시 의식을 잃은 건 아니겠지?

“잠깐 실례할게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정말 다시 의식을 잃은 거라면 큰 문제니까.

침대 옆쪽으로 조금씩 다가가자 베개 위로 은발이 흐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에녹은 넓은 침대 한가운데에 가지런히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건가?”

혹시 몰라 코 밑에 살짝 손가락을 대보았다. 그러자 고른 숨을 쉬는 것이 피부를 타고 느껴졌다.

자는 게 맞았구나. 혹시 문제 생긴 걸까 봐 깜짝 놀랐네.

‘그럼 그냥 나중에 와야…….’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을 때 뒤에서 희미한 신음이 들렸다.

“으으음…….”

“전하?”

곧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에녹이 천천히 눈을 떴다.

싱그러운 풀빛을 닮은 녹색 눈동자가 잠시 몽롱한 상태를 유지하더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눈이 마주치고 잠시 뒤, 에녹의 입에서 기함할 만한 말이 튀어나왔다.

“……요정님?”

……네? 뭐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 에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있자 곧 멍한 눈으로 나와 눈을 마주하던 에녹의 눈에 조금씩 생기가 돌았다.

안 그래도 큰 에녹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방금 자기가 무슨 말을 뱉었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니, 지금 이 말은, 그게 그러니까…….”

“…….”

“……미안해요.”

에녹이 손으로 연거푸 얼굴을 문지르며 사과를 건넸다. 이제 그만 좀 하지. 그러다가 얼굴 닳겠다.

“괜찮아요. 듣기 나쁜 말도 아니었는걸요.”

“그래도 당황했을 테니까요. 쓰러지기 전까지 영애에게 어울리는 말을 계속 생각하던 중이어서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것 같아요.”

나에게 어울리는 말이란 상상의 동물을 대체할 만한 단어를 말하는 거겠지. 아까 포기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괜찮다니까 그러네.

“정말 괜찮아요, 전하. 세상에 요정이라는 말을 듣고 기분 나쁠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깨를 으쓱하며 내뱉은 말에 에녹의 얼굴이 화르르 타올랐다.

자기도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던지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던 에녹이 푹 고개를 숙였다.

그 움직임에 소매가 내려가 팔목에 감은 붕대가 살짝 보였다.

“그, 그 말 안 하면 안 되나요?”

“무슨 말이요? 요정이요?”

아, 너무 생각 없이 막 말했나. 에녹이 애써 돌려 말한 건데.

아니나 다를까 에녹이 내 말에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는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여전히 발개진 얼굴을 가린 채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봤자 귀 끝까지 붉어져서 소용없었지만.

“예, 부끄러워서…….”

“…….”

아무래도 진지하게 생각 좀 해 봐야겠다. 정말로 황태자는 동생 삼으면 안 되는 건지에 대해.

“기사님께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의사 말에 따르면 당분간은 몸을 많이 움직이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은근슬쩍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자 그제야 에녹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전형적인 10대 초반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보다도 어리면서 어딘가 어른스러운 면이 있는 젠과 달리.

“아, 들었습니다. 가벼운 산책 정도는 괜찮다고요.”

“그래요?”

나는 다시금 붕대가 감겨 있는 부위를 살펴보았다. 하긴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니고 오른쪽 팔목이니까. 요 앞을 걷는 것 정도는 괜찮을지도.

“전하, 그럼 저랑 정원 구경하실래요? 별건 없지만 제가 저택 구경시켜 드릴게요.”

“별것 없다니요. 창밖만 봐도 정원이 얼마나 잘 가꾸어져 있는지 알겠던데요. 공을 많이 들인 것이 딱 표가 나요.”

창밖을 힐끗 내다보던 에녹이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햇살에 결 좋은 은발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생긴 것도 그렇고 어쩜 말도 저렇게 예쁘게 하지?

“그럼 가실까요?”

파티장에서 아가씨를 에스코트하는 신사처럼 장난스레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놀란 듯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던 에녹이 푸스스 웃으며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얹어진 손의 온기가 제법 따뜻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환자니까요.”

“물론이죠.”

능청스러운 말에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아, 나 진짜 애들 돌보는데 재능 있나 봐. 나는 연신 웃으며 에녹을 정원으로 이끌었다.

산책 코스는 그리 길지 않았다. 애초에 저택에 딸린 정원이 크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산책은 끝났지만 나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대신 정원 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아 쉬는 것을 택했다.

아직은 이 정도 걷기에도 무리였던 것인지 에녹의 안색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앉아서 쉬자고 안 했으면 아무런 말 없이 참고 계속 걸었을 사람이니.’

아니나 다를까 에녹은 내가 벤치에 앉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에녹이 편하게 앉아 한숨 돌리는 것까지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전하, 속상하시겠네요.”

“예? 뭐가요?”

“한동안 여기서 지내셔야 하잖아요. 소원 나무에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적으셨는데.”

“아…….”

내 옆에 앉아 꼬박꼬박 잘 대답하던 에녹이 말끝을 흐렸다. 조용히 뒷머리만 긁적이는 것이, 또 뭔가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잠시 뒤 작게 웃음을 터뜨린 에녹이 천천히 나와 눈을 맞춰왔다.

“괜찮아요. 이제는 상관없어졌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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