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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1화 (11/144)

#11화

“네?”

……뭐가 상관이 없는데? 그런 눈으로 보면서 저런 대사를 하면 사람이 오해하잖아.

놀란 내 얼굴을 마주하던 에녹이 싱긋 웃었다.

뱉은 말과는 달리 별 감정 없었다는 듯 매우 산뜻한 느낌이었다.

“덕분에 조금 쉬게 되었으니까요. 그간 해외 일정도 많았고 검술이나 궁중 예법, 제왕학, 군사학, 신학…….”

기계처럼 여러 학문을 내뱉던 에녹이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에녹이 어떤 마음인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 에녹은 마치 이전 세계의 내 모습과 같았으니까.

‘그것도 한창 생활고로 인한 아르바이트와 수험생 생활에 찌들어 있었을 때.’

하지만 내가 아무리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들 지금 에녹이 느끼는 압박감과 부담감에 비하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한 나라를 책임지기 위해 하는 공부라니.

‘황태자 진짜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지난 2년 동안 놀고먹었던 내 생활을 떠올리고 나니 어쩐지 숙연해졌다.

“……뭐, 그런 것들을 배우느라 쉴 틈이 별로 없었거든요. 다친 탓이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쉬니까 좋네요.”

“그렇게 오랜만에 쉬는 건데 더 좋은 곳에 가셔야 했던 거 아니에요? 저희 영지 안에는 볼거리가 별로 없는데 괜히 죄송하네요.”

“이렇게 지내게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요. 그리고 그런 건 상관없어요.”

심호흡하듯 잠깐 말을 멈춘 에녹이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구경거리가 많은 곳이라고 한들 영애같이 좋은 사람이 없다면 소용없으니까.”

“……전하, 자꾸 그렇게 칭찬만 하시니까 부끄러운데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이렇게 계속 칭찬만 퍼부어 주는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지?

이전 세계에서는 매번 반대되는 말만 들어서 저런 말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 나를 저렇게 좋게 봐주는지도 모르겠고.

‘단순히 생명의 은인을 대한다고 하기에도…….’

잠시 고민하고 있으려니 에녹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꽤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입술은 이제 괜찮은 겁니까?”

“아, 네, 보세요. 멀쩡하죠?”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하고 있구나. 그럴 필요 없는데.

이제 정말 괜찮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입을 열심히 오물거렸다.

치아가 몇 개인지 보여 줄 기세로 움직이자 그에 에녹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눈물 한 방울을 뚝…….

……아니, 잠깐만. 눈물이라니? 이렇게 갑자기 운다고?

“왜, 왜 그러세요? 제 얼굴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나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자기도 울 줄 몰랐는지 에녹이 한껏 당황한 얼굴로 급히 눈물을 닦아 냈다.

하지만 이미 눈가에 대롱대롱 달린 눈물들은 아무리 닦아도 좀처럼 마르지를 않았다.

‘뭐야. 이거 어떻게 해?’

우는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달래 주어야 하는 거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괜히 주변만 살피던 중 주위를 순찰하던 황실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어젯밤에 에녹을 암살하려 했던 남자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했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다고는 하던데 혹시 몰라 계속 살피는 모양이었다.

그쪽을 계속 쳐다보다 보니 기사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하던 기사의 시선이 에녹을 향했는데 어쩐지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 아니에요. 이거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괜찮아진 걸 보니까 안심이 되어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제 입술 때문에 그러시는 건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에녹이 애써 울음을 참으며 맑게 웃었다. 세상에, 남 걱정되어서 우는 사람은 처음 봤네.

“목숨을 구해 준 분 앞에서 추태를 부렸잖아요. 이렇게 창피한 일이…….”

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말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예쁘고 따뜻한 추태도 있어?

“추태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에녹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저었던 것을 보면.

“아니요, 추태가 맞아요. 제 몸 지킬 능력도 갖추지 못해서 영애의 도움까지 받았으니까요. 이 나라 황태자라고 말할 면목이 없네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우는 듯 웃어 보인 에녹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축 처진 어깨가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서였다. 머릿속에만 맴돌던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었던 건.

“사람이 언제나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잖아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때도 있는 거죠.”

“…….”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언제든 저한테 도움을 청하셔도 괜찮아요. 제 몸은 튼튼하니까 그때도 아마 거뜬히 나을…….”

“아니요.”

어느새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갈무리한 에녹이 내 말을 끊었다.

방금까지 울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단호한 목소리였다.

미처 닦아 내지 못한 눈물 자국이 아니었다면 혹시 화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었을 정도로.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설사 내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고 해도.”

“…….”

“절대로.”

‘……왜?’

저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처음 들었던 생각이었다. 내가 조금만 희생하면 아무도 죽지 않을 수 있는데.

설령 다음에는 내 입술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내 입술 따위가 에녹의 목숨값에 비할까.

하지만 이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쩐지 이보다 더 굳어진 에녹의 얼굴을 보게 될 것 같다는 묘한 예감 때문이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눈을 처음 떴을 때 영애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보고 내가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를 거예요.”

“…….”

“나 때문에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희생하는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아요.”

잔뜩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에녹이 다시금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그 눈을 가만히 마주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나는 결코 저런 눈을 할 수 없겠구나.

평생을 불운 속에서 살아온 나는 타인의 그런 희생을 기꺼워할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딱 봐도 사랑만 받고 자랐을 것 같은 에녹과 나는 달라도 한참은 다르니까.

“……알겠어요.”

일단 에녹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 말을 지킬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황은 정리해야 했으니까.

다행히도 에녹은 이 말만으로도 충분했던지, 안심한 듯 살짝 미소 지었다.

급하게 쓸어내느라 벌게진 눈가가 초승달 같이 휘어졌다.

“다행입니다. 영애라면 제 말을 이해할 것 같았어요.”

……내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아예 생각도 못 하는 것 같네. 심히 양심에 찔리는군.

이럴 때는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지.

“이만 들어갈까요? 밖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은데.”

“벌써요?”

에녹이 아쉽다는 눈길로 벌떡 일어선 나와 내가 앉아 있던 빈자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렇게 쳐다봐도 안 된다.

곧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다른 건 몰라도 식사는 꼬박꼬박 젠이랑 먹어야 한다고.

내가 넘어오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에녹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전하? 방으로 올려보내 드릴까요?”

내 말에 뭐라 대답하려던 에녹이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머뭇거리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영애는 어떻게 합니까? 영애도 방에서 식사하나요?”

“아니요. 저는 젠이랑 식당에서 먹어요.”

“젠이라면…… 혹시 영애와 함께 크루시아 축제에 왔던 그 남자아이를 말하는 건가요?”

오, 그걸 봤단 말이야? 젠이 내 뒤에 계속 숨어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맞아요. 기억하고 계시네요?”

“영애와 이야기하다가 제가 가니까 뒤로 숨는 것을 봤거든요.”

……그것까지 봤어?

그래도 앞에 자기 싫다고 말한 거까지 들은 것 같지는 않다. 그래, 그게 어디야.

“하하……. 젠이 낯을 많이 가려서요.”

정확히는 싫어하는 거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지.

안 그래도 집에서 쫓겨난 애 더 큰 일 나게 만들 일 있어?

“그렇군요…….”

에녹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끝을 흐렸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나와 젠의 식사 자리에 끼워 달라고 하려던 거 같은데. 내가 젠이 낯을 가린다고 말한 이상 말을 꺼내기 어렵겠지.

‘좀 불쌍하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젠이 싫다고 한 사람이랑 같이 밥 먹을 수는 없잖아.

저택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잘 안 하는 앤데 처음 보고 비호감인 사람은 오죽하겠냐고.

“그럼 식사는 방으로 올려 드릴게요. 독성을 완화하는 데 좋다고 기사님이 따로 부탁하신 게 있거든요.”

말을 마친 나는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해냈다. 해냈어. 젠, 이 누나가 저 초롱초롱한 눈빛을 이겨 냈다고!

아, 진짜 거절하기 힘들었다. 성격도 저런데 순하게 생기기까지 해서 거절하기 진짜 마음 아프…….

“아쉽네요. 같이 식사하면 히르첸 왕국에서 사 온 디저트를 대접하려고 했는데.”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이름에 저절로 발이 멈추었다.

……히르첸 왕국? 그 디저트로 유명한 나라?

“가지고 온 디저트 특성상 나누면 보기에 안 좋아져서 같이 있을 때 먹어야 하거든요. 어쩔 수 없네요. 그럼 다음에…….”

“에녹 오델리아 데프론 황태자 전하.”

뭘 그렇게 급하게 결정하고 그러세요. 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지.

“생각해 보니 젠도 새로운 사람을 좀 만나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황태자 전하를 저희 식사에 초대하겠습니다. 같이 가지 않으실래요?”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양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아까 산책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한쪽 팔을 내밀었다.

그에 에녹이 자연스럽게 내 팔에 손을 얹으며 웃었다.

“저야 영광이죠.”

* * *

“……이게 뭐야?”

식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젠이 처음 뱉은 말이었다. 다행히도 에녹은 디저트를 가지러 간 참이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마터면 간 떨어질 뻔했네.

“아, 식기가 세 개라서 그러는 거지? 생각해 보니까 손님이 오셨는데 혼자 식사하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정말 그 이유뿐이야?”

젠이 미심쩍다는 얼굴로 내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이 자식, 눈치가 빠른 건 알았다만 이 정도면 그냥 사람 속 꿰뚫어 보는 수준 아니야?

“물론이지.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

정말 아무런 흑심도 없다는 양 연기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넘겼다.

물론 식사를 끝낸 후 에녹이 디저트를 꺼내면서 다 쓸모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만.

“이게 바로 히르첸 왕국에서 가져온 디저트입니다. 모쪼록 영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우와…….”

나도 모르게 디저트를 향해 바짝 몸을 붙이며 눈을 빛냈다. 세상에, 디저트가 이렇게 영롱할 수가.

“돈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젠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걸 아직도 기억해? 노트에 적힌 거 지우랬더니 머릿속에 적어 놓은 모양이다.

아니, 잠깐. 내가 책이라고 말한 거는 어디다 빼먹고 온 거야?

“마음에 들어요?”

“네! 너무 예뻐요. 이거 진짜 제가 먹어도 되나요?”

“당연하죠.”

와, 내가 말로만 듣던 히르첸 왕국 디저트를 먹어 볼 줄이야.

디저트는 에녹이 아까 왜 그렇게 말했는지 한눈에 보일 정도로 정교하고 화려했다.

동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무도회장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케이크였는데 한가운데에는 공주와 왕자가 두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이렇게 생긴 디저트를 어떻게 나누어. 하마터면 내가 둘 사이를 찢어 놓을 뻔했네.

“이렇게 귀한 걸 대접받았는데 저희도 뭔가…….”

“아, 괜찮아요. 여기 머물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에녹이 두 손을 저으며 나를 말렸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지.

딱 봐도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 몇 달 전에는 예약해야 받을 수 있을 것 같이 생겼는데.

아무리 계산해봐도 에녹과 기사들이 여기서 먹고 자는 비용이 이 디저트보다 비쌀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말해 보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해서 그래요.”

“그래도 제 목숨도 구해 주셨는데…….”

“그건 아까 괜찮다고 했잖아요. 어서요.”

내 말에 에녹이 더 거절하지 못하고 휘젓던 손을 내렸다.

“아무거나…….”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에녹이 별안간 뭐라 중얼거리더니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 상태로 젠을 한 번 보더니 다시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도대체 뭐길래 저러는 거지?

‘……혹시 젠을 달라는 건?’

아, 그건 안 되는데. 젠이 들었다면 코웃음 칠 만한 상상을 한 나를 뒤로한 채 에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윽고 에녹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괜찮다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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