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이름이요?”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묻자 에녹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예.”
아니, 고작 이름 부르는 게 뭐라고 그렇게 뜸을 들였대? 난 또 더 엄청난 것을 바라는 줄 알았네.
“너무 욕심이 없으신 거 아니에요? 더 좋은 거 말씀하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더 받은 게 많은걸요.”
에녹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음,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건 받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면 저희 집사의 특제 애플파이라도…….”
“아니요, 괜찮습니다.”
에녹이 배시시 웃는 얼굴과는 달리 제법 칼같이 말을 끊었다.
너무 단호하게 끊은 거 아니야? 길버트 상처받는다고.
“저는 그거면 충분합니다. 정말로요.”
“정말요?”
“예, 오히려 과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에녹이 눈꺼풀을 내리깔며 나직이 답했다.
과분할 것까지 뭐 있냐며 장난스레 말하지 못했던 건 에녹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그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사실 아까부터 두 분이 대화하는 걸 지켜봤는데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게 굉장히 친근하고 좋아 보이더라고요.”
“…….”
“그래서 저도 사이에 끼고 싶었습니다. 안 될까요?”
말을 마친 에녹이 나를 보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어차피 처음부터 허락할 생각이었다.
메리에게 정체를 숨기기에도 이쪽이 더 편할 테니까.
안 그래도 ‘전하’라고 부를 때마다 저택 사람들이 신경 쓰였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물론 ‘에녹’이라는 이름도 안심할 수는 없지만, 대놓고 전하라고 부르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
“좋아요. 혹시 괜찮으시면 저도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로레이나.”
기다렸다는 듯 냉큼 내 이름을 부르는 모습에 기가 막혔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저렇게 강아지처럼 웃는데 어떻게 기분이 나쁠 수가 있겠어.
설사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보자마자 다 풀어지게 생겼는데.
“로레이나도 나를 허물없이 불러 주었으면 좋겠어요. 친구처럼.”
“에녹.”
“…….”
“이렇게요?”
에녹이 그랬던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곧장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내 얼굴을 마주한 에녹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멍하니 허공만 보는 것이 뭔가 충격받은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맞은편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 말 못 하시는 거 보니까 마음에 안 드시는 거 같네. 그냥 원래대로…….”
“아, 아니에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에녹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나 세게 저었던지 옆에 앉은 나에게까지 미세한 바람이 느껴졌을 정도였다.
진짜 표정 못 숨긴다니까.
“……너무 좋아서 그랬습니다. 이런 식으로 친근하게 불려 본 적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제외하고 처음이라.”
당연히 그렇겠지. 황태자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또다시 부끄러워하는 에녹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뒤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꽤 멀리까지 들릴 정도로 식당이 시끌벅적하군요.”
“길버트?”
뒤를 돌자 길버트가 인자하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즐겁게 놀고 있는 손녀와 손자들을 보고 있는 듯한 얼굴이라 어쩐지 조금 부끄러웠다.
심장이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저택이 시끌벅적한 것도 오랜만인데 저녁에 파티라도 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파티?”
“예, 아가씨도 이렇게 아가씨 또래인 분들과 노시는 건 거의 처음이시니까요. 도통 저택 밖으로 나가지를 않으시니…….”
길버트가 말을 삼키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미안, 길버트. 하지만 나는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놀러 나갔다가 죽는 멍청이는 되고 싶지 않다고.
“나야 괜찮은데 전……, 아니, 에녹은 괜찮을까?”
“단순히 먹으면서 이야기를 듣는 수준의 파티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무슨 이야기?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길버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길로 주변까지 훑어보는 것을 보아하니 궁금해하는 것이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멜리오 백작가의 나이 먹은 집사는 수천 가지의 재미난 이야기를 알고 있거든요.”
자신만만한 길버트의 말에 우리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 들어가 잠시 기다리자 눈 깜짝할 새에 파티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길버트가 준비한 파티는 흡사 이전 세계의 파자마 파티 같았다.
물론 내가 직접 해 본 적은 없으니 보기에 그랬다는 말이었다.
젠과 에녹 그리고 나는 상대적으로 편한 옷차림으로 베개를 가지고 누워 길버트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에게 빙 둘러싸인 채로 실감 나게 목소리를 내는 길버트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물론 길버트만 한 것은 아니었고 중간중간 나도 이전 세계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사이에 막장 드라마도 몇 껴 있어서 길버트가 ‘아가씨, 어디서 그런 흉측한 이야기를……?’이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무시했다.
이전 세계에서는 이게 인기가 폭발적이었다고.
“그래서 여자는 눈가에 점을 찍고 나타나 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노력…….”
“……아가씨.”
“남자는 여자가 이전에 자기 부인이었던 것도 모르고 서서히 사랑에 빠져…….”
“아가씨!”
길버트가 큰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는 조용히 헛기침했다.
아, 지금이 딱 중요한 타이밍인데. 봐, 도중에 끊기니까 젠도 아쉬워하잖아.
“아가씨 이야기도 물론 재밌지만 조금 더 아가씨 나이에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재밌었는데.”
진짜 아쉬웠는지 젠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봐, 이게 은근 중독성이 있다니까.
“저……, 그럼 이번에는 제가…….”
에녹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들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에녹이 나서자 길버트가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흐음, 재밌기만 한데 이상하네.
“오! 좋습니다. 어떤 이야기인가요?”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모시는 아가씨는 막장 드라마 이야기만 해 대지.
여기서 제일 어려서 순수한 동화 이야기나 할 줄 알았던 젠은 듣기만 해도 한숨만 나오는 암울한 이야기나 늘어놓지.
생각해 보니 길버트가 한숨을 쉴 만도 했다.
“사실 이미 유명한 이야기라 해도 될지…….”
“괜찮습니다. 최근에 유행하는 이야기라면 아가씨는 모르실 테니까요.”
잠시 나를 힐끗 보던 길버트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저택 서재에는 백작 부인이 남겨 놓은 책들밖에 없어서 죄다 옛날 것들뿐이었으니까.
이 나이 먹고 동화책을 다시 읽는 것도 웃기고 말이야.
“나라를 구한 용사 이야기, 아시나요?”
“아, 수도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그 이야기 말이군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인 듯 길버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게도 나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고.
모두가 허락하는 분위기에 잠시 목을 가다듬던 에녹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직 어린 나이인 젠을 의식한 것인지 동화 구연이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느 나라 깊숙한 곳에 괴물이 살고 있었습니다. 괴물은 손짓 한 번이면 온 마을을 날려 버릴 정도로 강했어요.”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 에녹이 두 손을 들더니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괴물이 강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 같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웃겨서 먹던 과자를 뿜을 뻔했다.
저런다고 무섭게 느껴지겠냐고. 금방이라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 것 같이 생겼으면서.
“사람들은 혹시나 괴물이 자신들의 마을을 망가뜨리지는 않을까 두려움에 떨며 살았습니다.”
이번에는 에녹이 두 손을 들어 어깨를 감싸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왜 이렇게 웃기지. 길버트가 했을 때는 하나도 안 이상하고 재밌었는데.
“크흡…….”
결국 참다못한 길버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에녹이 고개를 돌린 순간 목이 메어 그랬던 것처럼 헛기침했기에 걸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젠은…….
……쟤는 어떻게 저 표정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잠시 에녹의 말에 집중하는가 싶던 젠은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나에게 잠시 몸을 기울인 젠이 조용히 속삭였다.
“나중에 그 뒷이야기 해 줘. 다른 이야기가 더 있으면 그것까지 해 줘도 좋고.”
“내가 한 이야기 재미있었어?”
“응.”
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맞춰왔다.
에녹이나 길버트의 이야기를 들을 때와는 달리 매우 흥미로운 기색이었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네가 한 이야기 말고는 별로 재미없어.”
“히히…….”
나도 모르게 입에서 바보 같은 웃음이 터졌다.
길버트와 에녹에게는 미안하지만 참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깨가 절로 들썩거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애가 내 이야기가 제일 좋다는데 뭘 어떻게 하겠어? 역시 괜히 인기가 있었던 게 아니라니까.
“좋아. 이따 자기 전에 들려줄게.”
젠의 방에 찾아가겠노라고 약속한 뒤 다시 에녹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야기의 흐름을 보니 괴물을 물리친 용사가 예쁜 공주님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는 흔한 동화인 것 같았다.
역시 어느 세계나 아이들을 위한 동화는 비슷하구나 싶었는데…….
“사람들이 신께 괴물을 없애 달라고 빌었지만 신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극히 일부이기는 하나 괴물이 신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신마저 사람들을 저버리자 마을은 혼란에 빠졌고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용사는 괴물을 해치우러 길을 떠나게 됩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은 이 부분부터였다.
아이들을 위한 평범한 동화 같으면서도 묘하게 자세한 설정들이 존재했으니까.
꼭 그 부분들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알아 달라는 것처럼. 이 이야기 꼭…….
‘카일룸 제국의 데르키안 황가 이야기 같잖아.’
생명의 신이 지상에 남기고 간 핏줄이라는 것부터 타고난 강력함에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는 것까지 전부 똑같았다.
드래곤은 한두 가지 특별한 능력을 제외하고는 인간과 그리 다를 것 없었던 다른 이종족들과 달리 유일하게 초인적인 힘을 갖고 태어났으니까.
‘인간화와 본체화를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도 있고.’
이야기 속 ‘괴물’을 ‘드래곤’으로 바꾸면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다.
“……해서 용사는 괴물을 무찌르는 데 성공했고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에녹의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딱 원했던 분위기의 이야기였던지 길버트가 훌륭한 이야기라며 손뼉을 쳤다.
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가만히 있었고.
막히지 않고 이야기를 다 전한 것이 뿌듯한지 에녹이 살포시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산통을 깨는 일 같았지만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에녹.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네? 네, 제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남들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이야기 시작부터 쭉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괴물이 잘못한 것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