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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3화 (13/144)

#13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에녹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물론 나도 에녹에게 이 이야기의 문제를 물을 생각은 없었다.

아까 식사할 때 이야기 들어보니까 열네 살로 딱 로레이나와 동갑이던데 그 어린애한테 무슨.

그런데도 물었던 것은 이 이야기가 정말 이것으로 끝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괴물이 죽는 게 당연할 만큼 잘못한 것이 있는지 궁금해서요. 사람들을 죽이기라도 했나요?”

내 말에 에녹은 잠시 고민하더니 곧 묘한 얼굴을 했다.

“……아니요. 그런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럼 괴물이 너무 불쌍하네요.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단지 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용사에게 죽임을 당한 거니까요.”

“…….”

“죽음을 슬퍼해 주는 사람도 하나 없고.”

내 말을 끝으로 방 안에는 기나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 역시 지금 꺼내기에는 너무 무거운 이야기였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기에는 신경 쓰이는 부분이 너무 많았단 말이다.

괴물의 죽음에 모두가 환호했다는 것이 꼭 데르키안 황가가 몰락한 지금 상황 같아서.

딱 봐도 인간이 권력을 잡게 되었던 역사를 좋게 알리기 위한 이야기 같은데 너무 같잖잖아.

‘애초에 드래곤의 거처로 주어진 땅이었는데 이곳에 살게 해 달라며 부탁하고 들어온 거였으면서.’

자기들한테 해가 될 내용은 쏙 뺀 채로 만들어 놓은 것도 웃기고.

사실 카일룸 제국은 역대 황제였던 드래곤의 힘으로 풍요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였다.

생명력이 강한 탓에 어느 작물이던 간에 잘 자랐고, 누가 작정하고 꾸미기라도 한 듯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 많았다.

그랬던 땅이었건만 마지막 드래곤 황제가 죽고 인간 황제가 즉위한 이후부터는 서서히 메말라 갔다.

땅에 맞지 않는 주인이 앉아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기 싫었던 것인지 칼리드 사후 권력을 잡은 이들은 이 사실을 숨긴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이 땅이 원래부터 그런 줄 알고 묵묵히 살아가지.

레오나드가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곳곳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보기 전까지.

“여, 역시 아가씨는 참으로 착하십니다! 그런 부분까지 생각하시다니. 하지만 에녹 님의 이야기도 훌륭…….”

“……아니요.”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리려 애를 쓰는 길버트의 말을 가르고 에녹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기억력이 좋다는 건 가끔 이래서 싫다. 상대방이 본래 어떤 얼굴이었는지까지 같이 기억하게 되잖아.

아까보다 낯빛이 얼마나 어두워졌는지. 어깨는 얼마나 움츠러들었는지. 반짝반짝 빛나던 눈빛이 어떻게 침체하였는지.

이 같은 것들 전부 다.

“로레이나의 말이 맞아요.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보지 못했네요.”

에녹이 베개 안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괜히 말했나?’

에녹의 태도는 단순히 모르던 것을 알게 되었다고 보기에는 조금 과했다.

자신의 인생관이 송두리째 뒤흔들렸다면 모를까.

방 안에 다시 한번 묘한 기류가 흘렀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나선 것은 이번에도 길버트였다.

“……자, 그럼 이야기는 이쯤하고 다 같이 디저트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길버트가 손뼉을 짝짝 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못지않게 디저트를 좋아하는 에녹이 여기에 낚였음은 물론이고.

“……디저트를 직접 만든다고요?”

축 처져 있던 눈이 덕분에 원래의 형태를 되찾았다. 다행이다. 안 그래도 마음 쓰였는데.

“예, 오늘은 특별히 제 특제 디저트 만드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럼 다 같이 주방으로 가실까요?”

에녹이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길버트를 따라갔다. 역시 길버트가 애들 잘 다룬다니까.

나도 그 둘을 따라가려는데 별안간 젠이 뒤에서 내 드레스 자락을 잡았다.

곧이어 내 귓가에 속삭인 말은 얼굴에 절로 미소가 피어오르게끔 만들었다.

“역시 난 네 이야기가 좋아.”

녀석, 말도 참 기특하게 하네.

* * *

그 후로 몇 달간 이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꽤 재미있게 놀았다.

저택 옆에 있는 호수에서 뱃놀이하기도 했고 물장구도 여러 번 쳤다. 셋 다 홀딱 젖은 채로 와서 메리가 어찌나 당황했던지.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무렵에는 사과도 땄다. 물론 당연하게도 우리 중 사과가 열린 곳에 손이 닿는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길버트와 기사들이 열심히 일했지. 무거운 녀석들 목말 태우느라 고생했을 거다.

그때 딴 사과로 길버트의 특제 애플파이 맛을 내 보겠다고 셋 다 열의를 불태웠는데 결국 아무도 흉내 내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맛을 낸 거지? 만드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는데 왜 같은 맛이 안 나는 거냐고.

언젠가는 꼭 알아내고 말 거라며 벼르던 어느 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무렵,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에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떠났다.

“잘 지내. 꼭 편지하고. 알겠지?”

“……알겠어.”

젠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아멜리오 백작가를 떠난 이는 놀랍게도 젠이었다.

물론 거의 반년이나 있었던 셈이니 짧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젠보다는 에녹이 먼저 갈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이제 꽤 회복되었던 것 같은데.’

황궁에서 돌아오라는 편지도 꽤 여럿 왔었던 것 같고 말이야. 황태자의 목숨을 구한 것에 대한 보상도 편지들과 같이 왔었으니 확실했다.

……아니, 잠깐. 아무리 쉬는 게 좋다고 해도 그렇지 너무 안 가는 거 아니야?

“혹시라도 집에서 누가 괴롭히면 다시 와. 아니지. 그냥 편지해.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럴 리는 없을 테니까.”

얘가 조심성이 없네. 보통 소설들 보면 사생아는 구박받는 경우가 많다고.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많고.

여기도 소설 속인 데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잖아.

하지만 이런 내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젠은 담담한 어조로 분명하게 말했다.

“그리고 설사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이제 네 뒤에 숨는 일은 없을 거야.”

나직이 말을 뱉던 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꽤 쌀쌀한 겨울날. 그 가운데서 젠의 시선을 받는 동안 왠지 모르게 온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절대로.”

말을 마친 젠이 몸을 돌려 헨티슨 가에서 온 기사들과 함께 걸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젠이 마차에 오르기 직전일 때가 되어서야 발을 움직였다.

“젠!”

혹시라도 놓칠까 싶어서 힘차게 달렸다. 다행히도 젠은 내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빨리 뛰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느라 미처 속도 조절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어…….”

마차 바로 앞까지 와서 발을 헛디딘 나는 결국 앞으로 넘어졌다.

그에 놀란 젠이 앞으로 튀어나와 나를 받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젠은 나를 아무 문제 없이 받아 낼 정도로 몸집이 크지 못했으니까. 결국 젠은 나와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

“조심 좀 해! 괜찮아?”

젠이 내 어깨를 잡고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내 밑에 깔리느라 더 많이 다친 것은 자기면서.

하지만 나는 괜찮냐고 묻거나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살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다른 것을 물었다.

“……나중에 꼭 다시 만나. 알겠지?”

굳이 달려와 이 말을 꺼낸 것은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젠을 보는 것이 꼭 오늘로 마지막일 것 같다는.

젠은 나를 받아 낸 자세 그대로 앉아 가만히 내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 침묵이 꽤 길어져 기사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올 무렵 젠이 웃었다.

내가 알던 젠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활짝.

“그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젠은 마차에 올랐다. 에녹이 떠난 것은 그로부터 2주 뒤의 일이었다.

이제야 맡아 줄 아이들이 사라졌다며 좋아하던 나는 에녹이 떠난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아침 식사를 위해 앉은 식당 테이블이 너무 휑하게 느껴져서.

그제야 나는 지난 반년이 내게 꽤 중요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내게 있어 단순히 돌봐 주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시한부인 나에게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친구’였다는 사실도.

* * *

시간은 꽤 빠르게 흘러 어느덧 이곳에 온 뒤 6번째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젠과 에녹이 떠난 뒤로는 무려 4년이 지난 셈이었다.

‘그리고 올해로 나는 성년이 되었지.’

그 둘이 떠나고 한동안은 외로워 죽을 것 같던 것도 제법 괜찮아졌다.

에녹이 매주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 주어서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 몸이 본래의 생활에 다시 잘 적응했기 때문이었다.

이전 세계에서는 대화를 나눌 친구 하나 없는 삶을 살았으니까.

지금이야 저택 사람들이 있으니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그래도 에녹의 편지를 거절하는 건 조금 힘이 들었어.’

에녹은 종종 편지에 수도로 한번 올라와 주면 안 되겠냐는 내용을 덧붙였다.

처음에는 바쁘다고 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아무리 내가 할 일이 많다고 한들 황태자보다 바쁠 수 있겠냐고. 이제 핑곗거리도 다 떨어졌는데 어떻게 하지.

……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메리, 홍차 맛이 아주 좋은데? 네가 우린 거지?”

“어떻게 아셨어요? 헤헤. 집사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한번 해 봤는데. 좋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진짜 좋아. 어떻게 한 거야? 나도 배워 보게.”

“아, 그게요…….”

가만히 앉아 메리의 설명을 듣고 있을 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보낸 건지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드래곤 문양이 새겨진 것이.

‘아, 맞다. 이제 곧 에녹이 편지 보낼 시기지.’

저번에 알렌 왕국으로 떠난다고 했던 게 마지막이었나. 찻잔을 내려놓으며 편지를 집어 들었다.

에녹이 보내는 편지는 늘 그의 눈동자 색을 꼭 닮은 녹색이었다.

편지지를 조심스레 펼치자 에녹을 닮은 정갈한 글씨체가 보였다.

언젠가 한 번쯤 수도로 올라와 주었으면 좋겠는 로레이나에게

편지지 가장 꼭대기에 적힌 말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역시 이 말로 시작할 줄 알았다.

위는 농담으로 생각하고 넘겨주리라 믿습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그럼 물론이지. 아침마다 디저트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길버트와 추격전을 벌이는 탓에 근육이 더 는 느낌이다.

저는 저번에 말한 대로 아버지를 대신하여 알렌 왕국에 와 있습니다. 제가 직접 올 줄은 몰랐는지 왕궁에서 난리도 아니에요. 차린 음식들을 버리고 더 좋은 음식을 내오겠다는 것을 말리느라 혼났습니다.

순한 얼굴로 쩔쩔매는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더 좋은 음식을 주겠다는데 왜 마다하고 그런담.’

답답한 마음에 작게 혀를 찼다. 그 후로는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 이어졌다.

알렌 왕국은 카일룸 제국과 다른 점이 많다는 것.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며칠을 고생했다는 것.

왕궁에 있는 정원에 내 머리카락이 생각나는 분홍색 꽃이 예쁘게 피어 있다는 것.

300년 전처럼 마법이 있었던 시대라면 영상으로 찍어서 보여 주고 싶었다는 것.

그리고 편지 마지막에는 이제는 하도 보아서 익숙한 그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에녹 오델리아 데프론

예전 모습 그대로인 편지에 어쩐지 흐뭇한 기분이었다.

마치 내가 직접 에녹이 자라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기분이랄까.

이제 편지도 다 봤…….

‘……잠깐 이건 뭐지?’

시선을 내리니 망설이다가 적은 듯 맨 끝에 덧붙여진 내용이 보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나는 잠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한 순간, 나는 하마터면 들고 있는 찻잔을 놓칠 뻔했다.

추신. 사실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에 들릴 생각이에요.

……뭐,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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