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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4화 (14/144)

#14화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놀라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한 것인지 편지에는 나를 달래는 말들이 이어졌다.

그래 봤자 별 소용없었지만.

미리 말을 안 해서 미안해요.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그래,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어.

아마 편지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거예요. 한 3, 4일 뒤 정도]

심지어 도착하기까지 얼마 안 걸린단다. 무르다고 한 거 취소다, 이 사람아.

길버트가 해 주었던 특제 애플파이가 먹고 싶네요.

길버트가 들었다면 뛸 듯이 기뻐할 말을 끝으로 에녹은 편지를 마쳤다.

많이 놀라긴 했지만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까 말했듯이 에녹과 만나는 것은 무려 4년 만이니까.

‘사실 걱정이 되기도 했고.’

에녹이 황태자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 곧 레오나드가 자기 자리를 되찾으러 황궁으로 쳐들어가니까.’

알렌 왕국에 조금 더 있다가 오는 건 어떠냐고 말하려고 했는데. 이미 오는 중이라니 한참 늦어 버렸군.

이렇게 된 이상 레오나드가 에녹을 죽이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원작 속 레오나드는 잔인한 성정이 아니었으니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레오나드가 반란에 성공한 뒤 황제와 황태자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혹시 모를 가능성에 걸어봐야지.

‘그나저나 에녹이 여길 온다라.’

놀란 마음도 잠시, 어느새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피어났다.

에녹도 나와 마찬가지로 올해 성년이 되었을 텐데 어떻게 변했을까?

4년이면 시간이 꽤 지났으니 키도 많이 자랐겠지. 예전에는 나랑 얼마 차이 안 났는데 지금은 어떠려나.

편지를 보았을 때 성격은 그대로 인 것 같았다. 웃는 얼굴이 예쁘니 그건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면 좋을 텐데.

에녹의 모습을 상상하던 것은 곧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도대체 이게 얼마 만이야.’

에녹이 오면 뭘 하면 좋을까. 일단 편지에 길버트의 특제 애플파이가 먹고 싶다고 적혀 있었으니 미리 길버트에게 말해놓자.

그리고 손님방도 깨끗하게 청소해놓으라고 하고.

‘오면 무슨 이야기를 하지?’

난 요즘 뭐가 유행하는지 거의 모르는데. 그냥 얌전히 듣고 있는 게 좋으려나.

조금 있으면 에녹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한껏 들떴다. 아니야. 굳이 요즘 이야기를 할 필요 없지!

“4년 전에 있었던 일 이야기만 해도 충분…….”

거기까지 말한 순간, 붕 떠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4년 전 일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젠은 잘 있으려나.’

매주 편지를 보냈던 에녹과 달리 젠은 아멜리오 백작가를 떠난 뒤로 편지 한 통이 없었다.

혹시 몰라 헨티슨 남작가로 편지도 보내보았으나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뒤 헨티슨 남작이 가족들을 데리고 수도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만 건너 들었을 뿐.

‘설마 잘못된 건 아니겠지?’

잘살고 있을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젠이 사생아라는 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다이아나의 파티가 있었던 날, 제럴드가 젠을 모른 척했었던 것까지 포함해서.

정말 무슨 문제라도 생겼으면 어떡하지.

‘아닐 거야. 이런 생각은 그만하자.’

생각을 털어버리려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가만히 있으면 나쁜 쪽으로 생각이 빠진다니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직접 만나 본 제럴드와 다이아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들도 아니었고.

‘에녹을 어떻게 맞을지나 생각하자.’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에녹을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손님에 저택 사람들도 들뜬 모양인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얼굴이 제법 환했다.

사용인들에게도 에녹이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는 증거였다.

‘그러고 보니 에녹이 돌아가는 날에 난리도 아니었지.’

그날 황제가 황실 전용 마차를 보낸 탓에 에녹이 황태자라는 게 다 알려지고 말았으니까.

그간 숨겨왔던 사실이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밝혀진 탓에 아멜리오 백작저는 잠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들 ‘혹시 뭔가 실수한 게 있나?’ 싶은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었지.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에녹은 원체 성격이 좋았던 탓에 모든 사용인이 다 좋아했으니까.

‘그러니 다시 온다는 말에 이렇게 다들 화기애애한 거고.

그 분위기 덕분에 나도 울적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하여튼 쓸데없는 고민만 많다니까.

준비를 도우며 마음을 다독이는데, 메리가 다급히 이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가씨, 황실 편지가 왔어요.”

“응, 아까 읽었잖아. 그래서 다들 손님 맞을 준비 하는 거고.”

다 같이 있을 때 들었으면서 왜 그러는 거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우뚱하자 메리가 답답하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요, 그거 말고 새로운 편지가 도착했다고요.”

“뭐?”

편지가 또 왔다고? 뭔가 이상했지만 일단 메리로부터 편지를 받아들었다. 편지에는 익숙한 드래곤 문양이 찍혀 있었으나 난 놀라지 않았다.

이 문양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셋뿐이었고 그 사람 중 내게 편지를 보낼 만한 사람은 에녹밖에 없었으니까.

‘어차피 이것도 에녹이 보낸 것일 텐데, 뭐.’

깜빡한 내용이 있어서 또 보냈나 보지. 단순하게 생각하며 편지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문제는 바로 거기서 터졌다.

나머지 사람일 가능성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이게 뭐야?”

편지 첫 줄을 읽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더라니.

마지막 줄에는 평소와 달리 나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이작 데어 데프론

에녹의 아버지이자 이 나라 황제의 이름이.

“메, 메리!”

“왜 그러세요, 아가씨?”

“이거 당장 땔감으로 써. 지금 당장.”

“네? 하지만 이거 황실에서 보낸 편지인데요.”

메리가 황실 편지는 차마 땔감으로 쓰지 못하겠다며 쩔쩔맸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그러시는 거예요?”

‘무슨 내용이냐고?’

아주 간결한 편지의 내용을 그래도 더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황태자인 에녹이 성년이 되기까지 약혼을 하기는커녕 연애조차도 안 하고 있는데 그게 나 때문인 것 같다는 것.

그리고 둘이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음을 알고 있으며, 보아하니 너도 우리 아들이 싫은 것 같지는 않던데 한번 와서 만나 보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이런 말도 덧붙여져 있었다. 수도로 올 수 없다면 자기가 시간을 내서라도 내려가겠다는 말과 함께.

황궁에서 지내는 것도 제법 나쁘지 않아요, 영애.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내 두 눈을 의심했다. 나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황족이 아닌 사람이 황궁에서 지내는 경우는 딱 두 가지뿐이었으니까. 외국에서 온 귀한 손님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황족이랑 결혼하여 황족이 될 예정인 사람 정도지.’

이건 그냥 에녹이랑 결혼하라는 거잖아. 당연히 내가 전자일 리는 없으니까.

‘이를 어쩐다…….’

에녹은 지금 황궁에 없으니 이 일은 에녹 모르게 황제가 벌였을 가능성이 컸다. 아까 본 에녹의 편지에도 별다른 말은 없었고.

무슨 심정인지 이해는 간다. 한 나라의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성년이 될 때까지 연애 한 번을 안 했다니.

후계자를 보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겠지. 그래, 그 심정 충분히…….

‘……아니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있는 힘껏 편지를 집어던졌다. 옆에서 메리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바라보았으나 상관없었다.

이건 내 상식 밖이라고. 무슨 프러포즈를 이런 식으로 해? 그것도 본인도 아니고 아버지가!

그리고 다짜고짜 결혼이라니. 아무리 상대가 에녹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편지를 무시했는데, 겨우 이 편지 하나로 내 결혼이 결정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리고 영지 밖으로도 잘 못 나가는데 수도로 올라오라니. 난 못 해. 못 한다고. 내가 괜히 에녹을 못 만난 줄 알아?

“난 이 편지 못 받은 거야, 메리.”

“……저, 아가씨.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은데요.”

“왜? 가끔 배달 중에 편지가 분실되기도 하잖아.”

“황궁에서 보내는 편지는 전담 배달부가 따로 있는 거 아시잖아요. 그 배달부가 편지를 분실할 리 없다는 것도요.”

“…….”

“황태자 전하 편지 많이 받아 보셔서 잘 아시면서.”

메리가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그건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크게 한숨을 내쉬자 내 앞쪽으로 유유히 지나가던 메리가 바닥에 나뒹구는 편지를 주웠다.

그리고는 그것을 다시 곱게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아가씨, 아무리 싫어도 당연한 사실을 부정하시면 안 돼요.”

안다, 안다고. 하지만 그렇게라도 부정하고 싶은 걸 어떡해.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이렇게 에녹과 편지를 주고받지는 않을 거야.

물론 조심한다고 한 거고 에녹의 편지가 아니었더라면 이 생활을 견디기는 조금 힘들었을 테니 불만은 없지만.

“왜 그렇게까지 싫어하시는 거예요? 그냥 한번 만나 보라는 것뿐이잖아요.”

메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래, 메리는 모르겠지. 지금 황궁으로 가면 내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말이야.

“황태자 전하께서 막무가내로 구실 성격도 아니시고요. 왜 그렇게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사색이 되시는지.”

“……맞아. 죽어.”

“네?”

“거기 가면 죽는다고.”

이제 곧 레오나드가 반란을 일으키는 시기란 말이다. 지금 거기 있으면 데드 엔딩 확정이라고.

나 같이 죽을 것이 결정된 엑스트라는 더더욱!

“……아가씨도 참. 은근히 살벌한 농담 좋아하신다니까.”

메리가 어색한 얼굴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농담 아니야, 메리. 이 편지는 답이 없어.

선택지가 두 가지인데 어느 걸 골라도 죽는 길이야. 내가 수도로 올라가든 아이작이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로 내려오든 내가 그 인간과 같이 있으면 말이야.

그동안 에녹이 어찌 될까 걱정했는데 내가 지금 걔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어.

“……안 되겠어. 방법은 하나야.”

“어떻게 하시려고요?”

“일단 편지를 받았으니 답장을 써야지.”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경건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편지를 읽은 사람이 최대한 기분이 좋게끔 글을 적어 내려갔다.

이런 것쯤은 이미 경험이 있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4년 전에 다이아나한테 보낼 때는 이보다 더했는걸.

옆에서 내가 써 내려가는 편지의 내용을 보던 메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수도로 올라가시겠다고요? 아까는 안 가신다면서요.”

“말만 그렇게 하는 거야. 그래야 영지로 안 내려오실 테니까.”

“그럼 나중에는 어떻게 하시게요? 이렇게 보내 놓고 안 가시면 황제 폐하께서 이상하게 생각하실 텐데.”

“걱정하지 마, 메리. 그런 상황이 되기 전에 에녹이 돌아올 거야.”

그제야 메리가 이해했다는 듯 크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의 신뢰도가 메리한테 꽤 높은 모양이었다.

그래, 확실히 에녹이 이런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볼 성격은 아니지.

“다 됐다.”

다 쓴 편지지를 봉투에 곱게 접어서 넣은 다음 메리에게 내밀었다. 이제 이 편지를 메리가 부치고 나면 모든 일은 해결된다.

‘이거 생각보다 간단하잖아?’

그럼 난 이제 레오나드가 황궁에 쳐들어갔을 경우 에녹이 살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봐야지.

한시름을 놓은 나는 그렇게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보낸 이 편지 한 통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까맣게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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