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이틀 뒤, 황궁에는 꽤 많은 손님이 찾아왔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등장한 그들은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황궁 정문으로 당당하게 다가왔다.
한눈에 담기 어려울 만큼 인원이 많았지만 입을 열었던 것은 그 선두에 서 있는 남자뿐이었다.
“문을 열어라. 그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꽤 큰 키의 남자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에 기사가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정문 앞에서는 아주 작은 소리만 들려왔다.
사각사각.
남자의 바로 옆에 선 또 다른 남자가 아까부터 뭔가를 적고 있었다.
도대체 뭔지 알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으나 그 누구도 입을 열지는 못했다.
남자의 존재감에 짓눌려 숨 쉬는 것도 버거웠으니까. 남자 역시 이 사실을 깨달았는지 조용히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겁먹지 마. 어차피 죽일 생각 없었어.”
“…….”
“이곳을 안 지나갈 생각은 그보다 더 없지만.”
그 말에 나름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남자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들은 남자의 털끝도 건드릴 수가 없었다.
남자를 호위하던 이들이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몸 곳곳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한 남자의 기운 때문이었다. 남자의 머리 위로 포효하는 드래곤의 형상이 보였다.
그 기세에 잠시 주춤하던 기사들은 곧 자기도 모르게 남자를 위해 길을 터 주기라도 하는 양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이라도 내린 것처럼, 매우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덕분에 남자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남자의 일행은 눈 깜짝할 새에 정문을 통과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기사들이 그것을 황망하게 바라보고 있을 무렵,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어라…….”
“……비?”
그 말을 시작으로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최근 카일룸 제국에는 1년에 몇 번 올까 말까 했던 비가.
그마저도 이렇게 많이 내린 적은 없었다.
“말도 안 돼…….”
비현실적인 광경에 황궁 쪽으로 고개를 돌린 기사는 곧 마주한 광경에 탄성을 내질렀다.
화려하지만 어딘가 황폐한 구석이 있었던 황궁이 마치 마법처럼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본 이들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들여보낸 남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황궁의 진정한 주인의 귀환이었다.
* * *
황궁에 도착한 남자, 아니 레오나드는 본래 자신의 것인 곳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를 보았다.
자신이 아는 이의 것과 제법 닮아 있는 은발도 함께.
“내가 누구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갑작스러운 하대였지만 황제, 아이작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저렇게 대놓고 힘을 드러내고 다니는데.
게다가 레오나드는 마지막 드래곤 황제 칼리드의 얼굴을 쏙 빼다 박았기에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었다.
칼리드의 초상화는 레오나드를 찾기 위해 아이작이 매일 보던 것이었으니.
‘지금이라도 저 목을 찌르면…….’
조용히 검이 꽂혀 있는 위치를 훑던 아이작은 곧 체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레오나드의 뒤로 쓰러져 있는 황실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의 집무실이었으니 호위하는 이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도 당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검을 빼내는 데 성공한다고 한들 자신이 저 괴물을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그나마 에녹이 황궁에 없는 것이 다행이군.’
그사이 레오나드가 검에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본 아이작은 더 고민할 새도 없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꾹 다물려 있던 입에서 나온 말은 꽤 뜻밖이었다.
“기다렸습니다.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시여.”
아이작이 레오나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레오나드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이작은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레오나드는 슬쩍 제럴드의 옆으로 향했다. 도중에 대화하던 기억이 날아가면 큰일이었으니.
그리고 그 순간 제럴드의 얼굴을 확인한 아이작은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젠장.’
역시 헨티슨 남작가일 줄 알았다.
300년 전 레오나드의 탈출을 도왔을 것으로 의심되는 가문 중 유일하게 한 번도 수도로 안 올라오지 않았던가.
명확한 증거를 잡지 못한 탓에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쳐들어갈 걸 그랬어.’
잠시 생각하던 아이작은 곧 고개를 저었다.
되돌릴 수 없는 일로 후회하는 것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일단 이 자리를 살아서 나가는 것이 먼저였다.
“……우선 ‘그날’ 있었던 일에 깊은 애도를 보냅니다, 폐하.”
아이작이 숨을 고르며 금기어를 내뱉었다. 레오나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더 괴로운 300년 전 그 일을.
“일이 그렇게 된 후 사라진 폐하를 찾으려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건 폐하뿐이시니까요.”
레오나드를 찾아다녔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직 갓난아기일 때 확실하게 죽여버리기 위함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하지만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
“황제의 자리를 오래 비워 두면 안 된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데프론 공작가가 나서긴 했지만 그뿐입니다.”
황제, 아니, 이제는 자리에서 내려온 데프론 공작, 아이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데프론 공작가는 한 번도 이 자리를 욕심낸 적이 없습니다. 진정한 주인께서 돌아오셨으니 저는 이만 원래 자리로 물러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아이작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도착한 책상 서랍에서 그가 꺼낸 것은 카일룸 제국의 상징인 드래곤이 수놓인 반지였다.
대대로 카일룸 제국의 황제가 꼈다던 권력의 상징.
‘이걸 넘기면 황위가 바뀌는 거겠지.’
그리고 자신은 ‘아이작 데어 데프론’이 아닌 ‘아이작 데프론’이 된다.
황족이 아닌 자는 전과 같은 이름을 가질 수 없으니까.
짧아진 이름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반지를 든 채 다시 돌아온 아이작은 떨리는 손으로 레오나드에게 반지를 넘겨준 후 다시 무릎을 꿇었다.
“본래부터 폐하의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진 황위 교체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레오나드가 가만히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의 모습은 제법 진실되어 보였다. 지켜보던 레오나드 쪽 기사들이 얼굴을 마주 보며 감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레오나드의 눈에는 보였다.
아무 미련 없는 척 위장한 눈 안에 번들거리는 짙은 욕망과 떨리는 손을 통해 느껴지는 굴욕감이.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은 사람을 생김새로 구분하지 못하는 레오나드가 터득한 나름의 구별 방법이었다.
‘그냥 죽이는 것이 마음이 편한데.’
하지만 아이작이 저렇게 나온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 레오나드가 그를 죽이면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감만 심어 주게 될 터였다.
무엇보다 데프론 공작가가 당시 갓난아기였던 레오나드를 암살하려 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데프론 공작가의 암살 계획에 가담했던 다른 가문들도 서로 쉬쉬할 것이 분명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아이작은 언젠가 돌아올 황궁의 주인을 기다리며 카일룸 제국을 바르게 통치한 이상적인 황제였다.
그만큼 아이작 데어 데프론, 아니 아이작 데프론은 평판이 좋은 자였다.
게다가 레오나드가 돌아오자마자 아무 말 없이 황위를 넘겨주지 않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작을 죽일 명분이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데프론 공작가가 레오나드를 찾아다녔다는 증거는 차고 넘칠 테니까.
‘이제 막 즉위하는 상황에서 굳이 그런 위험을…….’
아니, 사실 이 모든 것은 다 핑계였다.
레오나드가 망설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
로레이나 아멜리오.
유일하게 저주가 통하지 않는 특이한 여자.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웃을 때 어여쁜 푸른 눈이 어떻게 휘어지는지. 울기 직전이면서 애써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던 얼굴이. 망설임 없이 자신의 앞을 막아서던 연약한 몸이.
그 뒤로 숨기고 있던 떨리는 손마저도 또렷하게 기억에 새겨졌다. 그렇기에 레오나드는 차마 눈앞의 남자를 죽일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누구의 아버지인지 알고 있는 로레이나가 이를 알고 어떤 얼굴을 할지 두려워서.
결국 레오나드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황궁 동쪽에 있는 탑 꼭대기에 가둔다. 내일쯤 풀어주도록.”
“네!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아이작을 데리고 갔고 방 안에는 몇 기사들과 제럴드, 레오나드가 남았다.
다들 생각보다 빨리 끝난 상황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꼭 이게 끝이 아니라 숨어 있던 적이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끼이익.
“누구냐!”
때맞춰 난 소리에 기사들이 날이 선 반응을 보이며 검을 들이밀었다.
엄청난 실력자가 나올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문 뒤에서 등장한 것은 두툼한 가방을 멘 왜소한 체격의 남자였다.
검을 든 기사들을 보며 울먹이던 남자는 급히 가방을 뒤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이윽고 가방에서 나온 것은 웬 종이봉투 하나였다.
“펴, 편지 배달부인데요.”
“편지 배달부?”
기사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남자를 훑어보았다.
그에 남자가 잔뜩 울상인 얼굴로 손을 덜덜 떨며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 주었다.
“보, 보세요! 저는 이 편지들을 배달하려던 것뿐이라고요!”
“그럼 여기까지는 왜 들어왔지? 보통 편지는 정문에 있는 기사에게 전달하고 돌아가지 않나.”
“정문에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그제야 자신들이 여기까지 어떻게 하고 왔는지를 깨달은 기사가 조용히 탄식했다.
하긴. 아직까지 정문에 기사가 남아 있을 리가.
“어떻게 할까요?”
이를 지켜보던 제럴드가 레오나드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에 잠시 편지 배달부를 보던 레오나드가 슬쩍 손짓한 뒤 걸음을 옮겼다.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이를 잘 알아들은 제럴드는 편지 배달부를 데리고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누구에게 온 편지지?”
“황제 폐하께 온 편지…….”
“오늘부터 황제 폐하는 저기 계신 분이다. 말조심하도록.”
제럴드가 얼굴을 굳히며 경고했다. 그에 배달부는 울고 싶었다.
그냥 편지 배달하러 왔을 뿐인데 난데없이 반란 현장을 목격하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보낸 사람은 누구지?”
“아, 그것이…….”
배달부가 황급히 편지 봉투를 살폈다.
“로레이나 아멜리오…….”
“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곳에서 반응이 돌아왔다. 손에 들린 편지가 순식간에 채 가졌음은 물론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구석에 있던 검은 머리의 남자가 눈앞에 와 있었다.
아까 옆에 있는 사람이 ‘황제 폐하’라고 칭했던 사람이.
“왜 로레이나가…….”
의아한 얼굴로 편지를 살피던 레오나드가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편지에는 기억 속의 것과 똑같지는 않지만, 로레이나의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오밀조밀한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로레이나의 편지임을 확인한 레오나드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어두워졌다.
영문을 모르는 배달부는 그 앞에서 벌벌 떨었다.
‘뭐, 뭐가 잘못되었나?’
편지를 뚫어 버릴 기세로 살피던 레오나드가 입을 뗀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제럴드.”
“예, 폐하.”
“황태자, 아니, 에녹이 알렌 왕국에서 언제 돌아온다고 했지?”
“예정대로라면 오늘이지만 그 전에 남부에 볼일이 있어서 들린다고…….”
착실하게 대답하던 제럴드가 불현듯 깨달은 사실에 말을 멈추었다. 잠깐만. 남부라면…….
“아멜리오 백작가…….”
생각나는 대로 내뱉던 제럴드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레오나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 붉은 눈을 본 순간 알았다.
레오나드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잠시 느릿하게 웃던 레오나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곱게 접혀 있던 편지지가 그의 손에 처참하게 구겨졌다.
“로레이나가 에녹 데프론과 맞선을 보러 황궁에 온다는데.”
“크헙…….”
“때마침 에녹 데프론은 아멜리오 백작가로 향하고 있고 말이야.”
“흡…….”
“이게 무슨 뜻인 것 같나?”
답을 짐작할 수밖에 없는 질문에 모두가 말없이 숨만 들이켰다. 뭔지는 알겠지만 절대로 대답해서는 안 된다.
‘대답하면 끝장이다!’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지만 물론 이 중에서도 예외는 있었다.
레오나드가 왜 이러고 있는지 그 내막을 알지 못하는 편지 배달부였다.
“아, 아마도 서로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맞선은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것이니까요.”
“…….”
“그것도 아니면 사랑의 도피?”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던지 배달부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 순간, 뒤에서 갑작스레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레오나드가 벽에 기댄 채 이쪽을 보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편지지는 다 가루로 만들어 없애 버린 뒤였다.
“사랑의 도피라……. 재밌네.”
레오나드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미소 지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왜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걸까.
방금까지 쓰던 방이라 난방이 잘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한기에 제럴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해야만 한다.
“지금 당장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로 기사들을 보내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직접…….”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레오나드가 제럴드를 지나쳐 천천히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넌 여기 남아서 정리해. 아멜리오 백작가에는 내가 직접 간다.”
“네?”
기겁하는 제럴드를 뒤로한 채 레오나드는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기사들도 준비시켜. 지금 당장.”